나는 기후문제에 대응하는 데 권위주의적이거나 비민주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왜 그런지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고 한다. 나는 민주주의 자체의 역사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또한 나는 환경운동을 위한 전략에 대해서, 그리고 대학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간단히 논평하고자 한다.
기후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민주주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인민의 자기통치를 의미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 정의(定義)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우리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민주주의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본주의의 대리인들, 그리고 그 밖의 금융·종교·군사 방면의 이해관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대두된 최초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이것은 아테네를 가리키는 단어 ‘아테나이(athenai)’가 아테네인들을 의미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아테네인들과 아테네는 하나로, 동일한 현상으로 간주된 것이다. 아테네는 진정한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아테네인들은 그 도시(폴리스)의 안녕은 자기자신들의 노력, 즉 정치적·군사적·행정적 문제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개인적 인격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어떻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주적 아테네는 매우 효율적인 정체(政體)였다. 그들은 많은 전쟁에서 이겼고, 해외 식민지를 확보했으며,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찬란한 예술작품들과 학문을 창조해냈다.
아테네에서 정치권력은 아테네 시민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 점에서 오늘의 시민들의 경우와는 아주 달랐다. 그런데 정치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현대의 정치체제에서 민주적 권력이란 흔히 선거에서 투표를 할 능력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투표에 연관된 ‘권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권력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투표의 대상이 되는 문제들은 이미 긴 정치적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정해진 것이며, 어떤 이슈를 공적 의제로 삼을 것인지에 관한 결정도 사전에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진짜 권력은, 투표과정에 앞서서 정치적 의제를 정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사회에서는, 의제들은 보통사람들이 청문회에 초청되기 이전에,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주어진 (‘현실적’인) 대안들에 투표를 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만약에 시민들이, 아테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의제를 통제한다면 기후변화 문제―그리고 이와 연관된 석유산업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공적 토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 시민들이 계속되는 화석에너지 사용에 의존하는 미래를 선택할지 아니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기반을 둔 미래를 선택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면, 그 결과는 (이 문제가 한 번도 정치적 의제에 오르지 못한) 오늘날의 상황과는 전혀 달라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 투자자, 투기꾼, 금융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이들 과두지배층과 선출된 정치가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유지시켜주기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정을 할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권정치이다. 이 금권정치에서는 진정한 권력구조가 공적인 감시의 눈에서 벗어나 은폐돼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비판을 받을 때마다 결정과정이 너무 느리다거나 하는 이유로, 민주주의가 욕을 먹기 일쑤이다. 하지만 어떤 유형의 정치시스템이 “위기를 해결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기는 이미 시작되어 진행 중이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는 환경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결합되어 있다.
핵심적인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그 무엇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얼마나 책임을 지느냐 하는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폴리스의 안녕이 바로 자기자신들과 자신들의 노력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긴급한 문제는 지구의 안녕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어떻게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막막하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질문들 중의 하나는, 만약 보통사람들에게 우리 공통의 미래―지구의 미래―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힘(권한)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 평범한 사람들의 양식(良識)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서구형(型) 사회들에서 시민들이 어떤 조건 속에서 교육을 받고 어떻게 사회화되었는가를 좀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후기 근대성’이라고 일컫는 오늘의 지적 상황에서는 애매모호함이나 긴장, 혹은 인지적 불일치나 도덕적 불화상태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관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적·도덕적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집단적·직업적 생활에서 따르는 가치가 전혀 다른 경우가 흔하다. 우리 중 다수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사회의 중심적 가치(예컨대 소비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자신을 ‘문제’의 일부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 시민들은 각자가 올바른 ‘태도’를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태도와 정치적 행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사적인 개인, 소비자, 시민들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세계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학은 어떤가? 내 경험으로는 오늘날 대학인들 중에서 정치적 변화를 고취하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이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 교육학 분야에서는 사실이다. 나는 교육이론과 관련해서 정치와 기후변화 문제를 분석하고 살피는 작업을 수년 동안 계속해왔다. 그런데 나의 분석은 흔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나, 황당하다는 표정에 부딪혔다. “(정치적) 변화를 위한 교육을 하는 게 교육자들의 과업이라뇨?” 교육 관련 연구자들과 이론가들―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별로 남아 있지도 않지만―은 자신들의 비정치적인 혹은 무비판적인 태도가 현상체제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말 혹은 1990년대 초까지는 대학인들은 자신을 공적 지식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이후 여러 이유로 나쁜 평판을 받고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지나친’ 사회·정치적 관심을 갖는 것은 ‘쿨’한 태도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학인의 위치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수 혹은 학생으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위치를 활용하여 사회라는 당나귀를 괴롭히는 등에(소크라테스적 의미의)가 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가장 긴급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정치적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적 형태는, 기존의 권력구조가 제시하는 이분법―현상의 틀 속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도록 강제되는 것, 예를 들면 권위주의로 힘을 갖느냐 아니면 무력함 속에 있느냐, ‘위기’냐 아니면 ‘위기의 해결’이냐 등으로,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을 더욱 고정시킨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져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 우리에게 보다 많은 권위주의적 제도가 필요한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질문은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미 충분히 민주주의를 시행해왔고 그 결과 생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환경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어떤 권위주의적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참여’라는 것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운동의 전략은 진지한 정치적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민주적 권력을 장악하거나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아테네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갱생시키는 능력을 가진 매우 효율적인 통치 형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민주주의는 또한 폭넓은 대중적인 지지와 모든 사람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민주주의가 여전히 최선의 전향적인 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김정현 옮김)
이 글은 2014년 9월 오슬로에서 개최된 심포지엄 ‘Ecological Challenges 2014’에서 발표된 기조연설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출처는 New Compass (2015. 3. 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