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오늘 시민의회라는 테마를 놓고 좌담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선생님들을 모신 것은 그간 시민의회 내지는 그 유사한 개념을 화두로 삼아 적극적으로 발언하거나 활동하신 분들 가운데서 지금 여기 계신 선생님들이 대표적인 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바쁘실 텐데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제가 사회를 볼까 합니다만, 진행을 어떻게 할까요? 일단 현직 대통령을 탄핵한 데까지 이른 최근의 시국에 대해서 각기 간단하게 소회를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서, 곁들여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시민의회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셨는지 개인적인 동기를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출발하면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면 오늘 좌담에서 무슨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몇개 키워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새벽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는 뉴스도 나왔는데, 지난 몇달 동안 역사적인 촛불집회를 경험하면서 느끼셨던 소회랄까 그런 것을 우선 간단히 돌아가면서 말씀해주시죠.
곽노현 오늘 아침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된 걸 보면서 저는 사람이 아니라 제왕귀신, 정경유착귀신이 구속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왕과의 결별, 정경유착과의 결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조직과 기관마다 신민의식이나 권위주의를 강요하는 크고 작은 제왕들이 있는 것 같거든요. 저는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제멋대로 군림하는 제왕적 권력이나 그 옆에서 공사 분간 못하고 호가호위하는 인간들을 더이상 봐주지 못하겠다는 시민의 뜻이 표현되었다고 봐요. 그 힘으로 제왕적 경제권력 이재용도 구속시킨 거고요.
제가 최근에 관심을 부쩍 갖고 있는 건 대법원장이라는 사법부의 제왕적 존재예요. 지난 4·13 총선으로 우리 국민들이 입법부부터 한번 심판하고 재편했죠. 야당의 분당사태 속에서도 만년 과반의석 여권세력을 형편없이 축소시키고 여소야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번엔 촛불시민혁명으로 행정부를 혼냈습니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대통령부터 수석, 장차관, 이런 사람들을 줄줄이 구속했어요. 이제는 사법부 차례라는 것이죠. 젊은 법관들이 법관독립을 기치로 들고 일어났어요. 사법부를 바꿀 굉장히 큰 계기가 주어졌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지난 총선과 촛불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우리사회는 대의권력에 대한 시민주권의 우위를 총체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앞으로는 대의권력 전체가 헌법과 시민 앞에 좀더 겸손한 권력으로 바뀔 것으로 봅니다. 촛불시민혁명으로 각성한 시민들은 당연히 삶의 질을 위한 본격적인 개혁 국면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전례 없는 전율 속에서 역사의 위대한 시기를 몸으로 살아내서 그런지 피곤한지도 모르겠어요.
이진순 지금 곽노현 선생님은 촛불시민혁명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저는 이번 촛불항쟁을 과연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아요. 물론 감동적이고 위대한 시민의 힘을 표출했고, 그래서 현실정치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고, 시민으로서의 자존의식, 자부심 같은 것들이 대거 고양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동력이 앞으로 어떻게 유지, 계승되고 사법부나 교육계, 노동계 등등 사회 곳곳으로 퍼져 나가 새로운 물길을 낼 것이냐에 따라서 성격이 다시 규정되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혁명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미흡하다는 생각입니다. 박근혜 퇴진, 하야를 외치던 촛불은 국회 탄핵안 가결을 기점으로 헌재의 탄핵 인용을 청원하고 기다리는 모양새로 바뀌었죠. 처음엔 국회, 다음엔 헌재 그리고 이제는 대선 후보가 어떻게 이 사회를 개혁할 것인가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에요. 법과 제도의 테두리 내에서, 국민들은 청원을 하는 입장이라는 거예요. 아래로부터의 힘이 기존 제도권력을 대거 쇄신하거나 대체하려는 지점으로 나아가진 않았다는 점, 전반적인 분야의 권력재편 의지로까지 시민들의 에너지가 발전한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저는 혁명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봅니다.
곽노현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모든 혁명은 일반시민이 권력의 주체로 눈뜨면서 시작하는 건데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시민혁명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시민들이 촛불 한 자루씩 들고 일어나 법적 절차를 밟아서 구치소로 보낸 것만 해도 혁명적 성과입니다. 놀랍게도 촛불민심은 지속적으로 정치의 중심을 잡아주며 적폐청산과 사회경제개혁을 요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존 시민혁명의 역사를 혁신했다고도 볼 수 있지요. 다만 진행 중인 열망의 혁명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진순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번 촛불시위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순간 프레임의 덫에 갇힐 수 있다는 겁니다. “할 거 다 했다”, “이 정도면 됐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게 있어요. 이번에 “광장에 직접민주주의가 꽃피었다”라든가 “죽어가는 대의제를 국민의 힘으로 살려냈다” 이런 제목을 단 신문들을 많이 봤잖아요. 아직 시민의 직접행동을 보장하는 어떤 제도화도 이루어진 게 없고, 정당개혁도 된 게 없는데.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가는 프레임 설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더 나아가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되는데, 저는 언론에서 쉽게 혁명이라고 쓰는 것이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종철 혁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동감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가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봐야 보다 확실한 개념규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는 진행 중인 과정이니까요. 지금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을 시키는 상황까지 왔는데, 이 정도도 사실 엄청난 일이지요. 이 흐름이 계속되어 구체제의 핵심적인 기반에 균열이 생겨 무너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때 그것을 우리가 혁명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구체제라는 것은 결국은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기성 권력구조, 소위 정경유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현철 굳이 학술적 개념규정으로 말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학술적 개념으로는 혁명이라고 보기 어렵겠죠. 시스템이 바뀐 것이 없으니까. 이재용·박근혜가 구속되었다 하더라도 재벌체제와 제왕적 대통령시스템이 바뀐 게 아니니까요.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수없이 많은 촛불이, 10년 이상 있어왔는데, 시민들 뜻이 관철된 건 이번 딱 한 번이에요. 그건 제도적 통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탄핵이란 제도적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집결된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었고, 따라서 예외적이었던 것이죠. 대의제는 제도화된 권력을 기반으로 작동되는데, 이 권력을 국민이 제어·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4~5년에 한번 하는 선거 말고는 없는데, 그마저 왜곡되지요. 그래서 일상적으로 제도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참여 기구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 모든 제도권력에 다 관철되어야 합니다.
사법부 개혁 말씀하셨는데, 지금 사법부가 모순을 갖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대법원장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법부 개혁에 대해서는 판사들 회의를 통해서 대법원장을 선출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시민들이 참여해서 인사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서 법관 인사편성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은 인사에 대법원장 입김이 그대로 반영됩니다. 대법관 추천 인사도 마찬가지예요. 대법원장이 추천한 사람을 대법원장이 꾸린 인사위원회에서 다시 추천하는 시스템이니까요. 민주화 이후에 사법부 독립이 됐다지만, 사법부 독립의 핵심은 법관의 독립입니다. 법관이 재판할 때 독립적인 지위로 판결을 해야 되는데 지금 대법원장 눈치를 보고 있어요. 행정·입법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이라는 것이 오히려 시민들의 감시에서 멀어진 대법원장 일인체제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이후로 시대를 역행하는 판결이 많았어요. 유신헌법 희생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도록 한 판결을 뒤집는 판결도 있었죠. 대통령이든 대법원장이든 모든 제도권력에 대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참여해서 그 권력을 비판하고 제동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번을 그것을 공론화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이지문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될 때까지 지난 4년 동안 우리 정치는 무엇을 했는가. 국회는 무엇을 했는가. 그러니까 결국 우리 대의제도정치의 실패라고 봐야 합니다.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결국 국민들이 나선 거죠. 문제는 제도정치권에서는 광장의 시민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또 자기들끼리 짝짜꿍해서 대통령 뽑고 헌법개정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제도정치를 보완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 본 〈한겨레〉 칼럼 제목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제목이었는데, 우리가 광장에 가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개개인이 일상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민주주의자로서 자부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어요. 동의합니다. 저는 이번 촛불광장은 일반시민들이 민주시민으로서 학습·훈련하는 장(場)이기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더 확대, 심화하는 시민교육의 장을 만들어내는 일도 시민참여의 제도적 틀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데 ‘시민의회’라는 것은 이 두 가지, 즉 제도정치를 보완·견제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을 민주주의자로 훈련시키는 장도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지금 시급히 제안하는 것입니다.
‘와글’의 시도는 왜 실패했나
김종철 시민의회의 필요성을 바로 말씀해버리셨네요.(웃음) 한 바퀴 돌면서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이미 복잡한 문제들이 꽤 제기되었습니다. 지금 이지문 선생님이 우리 시민들이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한 학습의 장으로서의 시민의회를 말씀하셨는데, 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여기 계신 분들이 각각 시민의회라는 아이디어에 어떻게 도달하셨지 그것부터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먼저 이진순 선생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시민의회 개최를 제안하셨다가 상당히 공격을 받으셨죠? 그 이야기 좀 듣고 싶습니다.
이진순 작년 12월 초까지도 정당별로, 정치인별로 입장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죠. 거국내각 한다고 했다가, 탄핵이 되느냐 안되느냐 했다가.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의 요구와, 제도정치가 거기에 반응하는 속도와 방향에는 상당한 갭이 있었어요. 기존의 제도정치가 오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죠. 사실상 대의제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죠.
저는 집회에 가면 감동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많이 100만 명이나 모여서 왜 우리는 구호를 한두 가지밖에 내세우지 못할까 아쉬웠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촛불 들고 나올 때는 하고 싶은 말들이 100가지 200가지가 될 텐데. 과거 1987년의 국민운동본부는 종교계나 원로, 시민단체나 정치계 인사들까지 포괄한 연대였지만 이번에는 그런 조직적 구심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서 시민을 선도하거나 그럴 수 있는 시대도 아니죠. 저는 그래서 온·오프라인으로 자발적인 시민들의 의견들을 모으고 수렴해서 토론을 지속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와글’은 해외 풀뿌리 정치운동에 관심을 갖고 국내에 소개하는 활동을 해온 그룹이고, 월가점령시위 때 만들어진 온라인 시민참여 플랫폼인 루미오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이죠. 그래서 이슈별로 얘기한 의견들을 정리해서, 적어도 그것을 말 그대로 ‘대변’할 대리인들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저희가 생각한 온라인 시민의회 대표단입니다. ‘시민대표’라는 용어 때문에 많은 분들의 반발과 우려를 샀는데, 사실 뭐라고 부를지도 당시 공개토론방에서 논의 중인 상태였어요.기본취지는 대의제에 해당하는 대표(representative)가 아니고 단순 위임받아 전달하는 자(delegate) 정도를 생각한 거였어요. 온라인 시민의회를 제안한 제 개인적인 입장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온라인 시민대표단이 전국적으로 3,000명 정도 되면 좋겠다, 처음에는 20~30명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단체나 개인들이 주제를 등록하는 방식으로 해서 3,000개의 모임 정도가 온라인에 모이고 3,000명의 대표가 나오고, 그 사람들이 이 내용을 정리해서 언론에도 공표하고 특검에도 전달하고 의회에도 전달하고 이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그런 문제의식으로 제안했던 거였어요. 12월 6일 온라인 플랫폼을 열고도 규칙, 방침이나 활동방식 등이 확정된 것 없이 아직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국회 표결이 끝나고 나니까 다음 날부터 일제히 주목을 받으며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죠.
기본적으로 저희가 운영상의 미숙으로 잘못한 점들이 있었어요. 운영방식에 대해서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 버전을 열어놓아서 오해를 산 것도 있었죠. 비판은 크게 두 종류였는데, “너희가 뭔데 누구를 대표한다는 거냐?”와 같은 비판은 저희가 시민의회의 취지와 목적을 충분히 토론하고 합의하지 못한 데서 온 문제로, 겸허하게 수용하고 깊이 곱씹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정당이 잘하고 있는데 왜 숟가락 얹으려고 하느냐”는 거였는데, 이런 문제제기에는 지금도 동의하기 어렵고, 앞으로 시민 주도의 정치활동을 이야기하려 할 때마다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지문 저도 취지에 동의해서 발기인으로 참여했지만 ‘시민의회’라는 말을 쓴 것이 무리였다고 생각해요. ‘의회’라고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일반 시민단체로서 활동했다면 괜찮지만 시민의회라고 하면 대표성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반드시 법제도로서 시민의회가 설립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이쪽 사람 저쪽 사람 다 들어와서 논쟁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진순 나중에 ‘시민회의’라고 할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는데요(웃음), 그런데 굉장히 낯설 수는 있지만 꼭 국회의원만 의회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말 그대로 ‘의논할 의’ 자 아닙니까. 국회의원, 시의원만이 아니라 군중들이 충분히 의회를 할 수 있다, 이런 콘셉트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으나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냥 광장의 모든 사람이 주제별로 모여서 떠드는 그런 방식의 토론을 온라인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거였어요.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이나 15M운동을 저는 이 시대 시민항쟁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시다발로 많은 곳에서 점령운동이 벌어졌지만 어디든 원형으로 모여서 토론하는 거예요. 누가 앞에서 사회 보고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생성에 기초한 운동입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사회엔 직접민주주의의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오프라인으로도 경험해본 바가 없는데 온라인으로 시민의회 이러고 나오니까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곽노현 저도 촛불집회 몇 차례 나가면서 곧바로 이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장과 의회 사이에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숙의하는 토론과정이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 이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3차 촛불집회쯤 때부터 여의도 정치권하고 광장의 요구가 좀 달랐어요. 이른바 황교안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야권 총리를 지명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였을 겁니다. 당시 우상호 원내대표가 “광장은 광장의 방식으로, 의회는 의회의 방식으로 하면 된다”고 이분법적으로 선언했는데, 몹시 아쉬웠습니다. 광장과 국회가 서로 다른 역할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그런 국면에서는 “광장이 의회의 토대이고 젖줄입니다”라든가, “광장의 요구를 의회의 방식으로 관철하겠습니다”라든가, 양자의 상호보완성을 깊이 강조해야 될 시점에, 잘못 들으면 완전히 따로국밥이라는 식의 얘기를 했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서둘러서 쓴 글이 지역민회에 대한 것이었어요. 주요 도시마다 광장과 의회를 연결할 시민 토론·숙의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지요. 시민들이 주요 개혁의제를 토론하는 데 필요한 공간과 시설은 지자체가 공공시설을 내놓으면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잖아요? 그런 공간과 시설만 정기적으로 확보하면 발언의지가 충천한 시민들이 모일 것 같았어요. 자치구면 한 235개, 지역구 단위가 되면 253개쯤 되죠. 한군데서 200명씩 모이면 총 5만 명 아닙니까. 이렇게 모여서 동일 주제를 놓고 동시다발로 매주 논의, 표결하다 보면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 정치권에 명령할 분야별 국민개혁요구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 정도는 해야 의회를 제대로 견인할 수 있는 시민권력이 생길 것으로 본 것이죠. 한마디로 의회민주주의는 광장민주주의와 민회민주주의의 두 날개를 달아야만 건강해진다고 봤습니다.
김종철 이번 촛불항쟁 기간 중에 전국적으로 시민이 주체가 된 의사결정 구조가 형성되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촛불집회 초기에는 사전집회라는 형식으로 여러 그룹들이 거리에서 자유토론을 했잖아요. 근데 언젠가부터 그것마저 잘 안 보이데요. 역시 온라인을 통하든 오프라인을 통하든 뭔가 집중적인 토론과 숙의의 자리들이 마련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게 흐지부지된 게 많이 아쉽군요.
이진순 퇴진행동에서도 1월 한 달을 국민토론주간으로 설정해서 지역별 토론한다고 시도는 했죠. 그게 왜 기대만큼 안됐을까 보면, 우선 퇴진행동의 국민토론 사이트조차도 보통사람 개인이 들어가서 의견을 남기기에는 뭔가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주로 단체 소속의 사람들이 자기들 토론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는 쪽이었어요. 또하나 중요한 것은, 토론의 결과가 어디에 쓰일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토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논의에서 끝나면, 반복되고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죠. 실효성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희가 온라인 플랫폼에서 온라인회의 대표단이라는 것을 설정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 이후에 이어서 성과들을 내놓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던 거예요.
김종철 그 대표단은 어떻게 대표성을 얻지요? 몇천 명을 모으려 하더라도 선출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방법을 제시하셨어요? 제비뽑기 이야기를 하셨나요?
이진순 추천을 해서 올리고 온라인으로 투표를 하는 거지요. 제가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저도 해외 사례에서 시민의회를 만들 때 추첨으로 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추첨민회를 구성하자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봤어요. 제대로 된 추첨을 하려면 행정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해서 성별, 연령별, 지역별로 일정한 풀을 구성하고 추첨을 해야 되는데, 행정부의 협력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럼, 정권이 바뀌어 추첨으로 민회를 구성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해야 하나? 박근혜가 구속이 될지 안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행정부가 움직여줄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김종철 시민의회라든지 이런 게 일반시민들에게는 아주 낯선 아이디어죠. 국회가 있는데 무슨 또 의회냐, 그런 의문은 당연히 가질 것이고요. 그러나 누군가 발의는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발의하는 주체를 믿을 수 없다, 너희가 무슨 대표성이 있느냐, 이렇게 공격해 들어오면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죠. 굉장히 어려운 문젭니다. 그러나 이번에 하신 시도는 그냥 실패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것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봐야죠. 앞으로 우리가 헤쳐가야 할 문제들이 뭔가를 보여준 것이니까요.
대의민주주의의 모순을 극복하자면
오현철 저는 20년 전에 하버마스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요, 그 논문의 핵심은 하버마스는 틀렸다는 거였어요. 하버마스는 시민의 의사소통권력으로 제도권력을 견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뭐가 바뀌겠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의사소통권력으로 제도권력을 비판만 해서는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다, 제도권력 그 자체를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2000년대의 낙선운동은 하버마스가 말했던 의사소통권력이 시스템·체제 권력을 견제하는 대표적인 형식입니다. 이번 탄핵도 마찬가지죠. 이것은 시민들이 어떤 의제를 던지고 그것을 관철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치권력이 만든 의제를 거부(veto)한 거죠. 적극적으로 시민들이 정책과 법안을 만드는 제도가 필요하다, 거부권력이 아니라 결정권력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인가 2005년인가에 어떤 미국 박사학위 논문을 봤는데, 입법·사법·행정 외의 제4부를 얘기하고 있더군요. 무작위 추첨으로 뽑은 사람들로 구성한 제4부인데, 저는 바로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시민참여 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여사회연대도 있고 공론조사도 있고 합의회의 등등 다른 많은 방식이 있는데 시민의회가 왜 좋은가. 대표성과 정당성에서 월등히 낫습니다. 무작위 추첨으로 시민을 뽑는 것을 이론적으로 ‘소우주’를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대한민국 5,000만 명 국민을 딱 한 501명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로 완벽하게 뽑으면 이 사람들이 토론한 내용은 5,000만 명이 한자리에서 토론한 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통계학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이것이 입법·사법·행정의 제도권력을 견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어요. 간단하게 말하면 대통령이든 의원이든 대리인을 뽑았는데, 이 대리인들이 자기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주인인 국민의 말을 듣지 않아요. 이 딜레마는 주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는 절대 극복할 수 없습니다. 대리인들이 착하고 일을 잘하더라도 그들을 좀더 다그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잘못할 때에는 즉각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의민주주의의 모순은 미국 트럼트 현상이나 유럽에서 극우정당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어디에나 항상 잠재하고 있는 겁니다. 대의민주주의가 19~20세기에 좀 잘나갔는데 그걸 가지고 자만하고 대의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게 잘못이죠. 제일 좋은 건 역시 주인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시민의회가 현재 대의민주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깔끔한 해결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곽노현 말씀하신 많은 부분에 공감합니다. 회사건 사단법인이건 어떤 조직이든 보세요, 일정한 규모를 넘으면 대표나 운영위나 이사회를 뽑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임기 몇년 주고 필요한 일 알아서 다 해라, 우린 4년 뒤에 선거만 한번 해서 잘했는지 교체가 필요한지 심판하마, 이렇게 하는 조직 봤습니까? 없잖아요.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대표가 아니라 총회에서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하죠. 그러니까 국가가 굉장히 예외적인 거예요. 입법권은 국회에, 사법권은 법원, 행정권은 대통령한테 있다 규정하고 말죠. 명색이 주권자인데 모든 결정권을 세 기관에 몽땅 몰아주고 몇 년에 한번 선거로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권한만 남겨둔 거잖아요. 그런데 대리인의 힘이 세지면 주인 등 위에 올라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거마저 왜곡하는 힘까지 이들에게 생기니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죠. 최고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주권자인 시민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헌법에는 정말 놀랍게도 그런 것이 없어요. 100% 순수 대의민주주의 제도라고 할까요. 물론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 큰 환상을 가질 순 없죠. 그러나 대리인의 전횡을 억제하려면 어느 순간에는 본인이 쉽게 개입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통제장치가 있어도 쉽게 사용하진 못하겠지만 통제장치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정치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될 겁니다. 사실 시민들의 직접참여 확대가 이른바 진보와 혁신에 도움이 될지 안될지도 단기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고 봐요. 상당한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있어야 훈련도 되지요. 다양한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대의권력을 통제할 헌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시민의회도 그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김종철 우리 헌법이 제1조만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을 해놓았지 실제로 민주공화국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이나 방법, 이런 게 헌법에서는 명기돼 있지 않죠.
이지문 저는 무엇보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는 선거로 만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정치권이나 대선 후보들, 여야의 개헌안을 보면, 국민소환, 국민발안, 국민투표 한다면서 마치 이것들이 곧바로 직접민주주의인 것처럼 포장하는데, 그것들은 대의민주주의의 전제하에 도입하는 제도입니다. 시민의회를 포함해서 모두 대의민주주의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선거만으로 대의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없어요.
그중에서 저는 지금으로서는 시민의회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국민발안, 국민투표, 국민소환 모두 물론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모여서 심의하는 과정이 없다는 점에 한계가 있어요. 시민들이 같이 모여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숙고하는 과정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론조사 전화 많이 받지 않습니까? 사드배치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무상급식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면서. 그렇지만 솔직히 일반시민들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잘 모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찬성이냐 반대냐 물어보면 뭔가 답을 해야 되니까 그냥 말한단 말이에요. 그걸 취합해가지고 국민여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정말 우리 국민들의 생각이 아닌 것이죠. 직접 찬반 쪽의 주장을 다 듣고 나서 논의하고 난 뒤에 다시 여론조사를 하면 결과가 바뀐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진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충분히 정보를 습득한 다음에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시민의회 경험
오현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사례를 보면, 거기도 우리나라처럼 소선거구제입니다. 득표율이 40%에 불과해도 의석은 80%를 점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한국도 득표율과 의석 비율이 불균형하죠. 소선거구제에서는 항상 그런 문제가 있는데, 국회의원들은 자기들이 당선되기 위해서 그것을 고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 주지사가 된 사람이 시민의회를 구성해서 선거법을 새로 만들자고 제안을 했어요. 선거구별로 추첨을 통해 시민들을 모아놓고 선거법에 대해서 1년 동안 숙의하게 한 거예요. 참가하면 수당을 주고, 여기서 만든 선거법을 주민투표에 붙여서 통과되면 법률로 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정치학에서 개념적으로 ‘약한 공중(weak public)’과 ‘강한 공중(strong public)’이라고 하는데,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는 권한을 부여받은 ‘강한 공중’인 것이죠. 이 사람들이 매주 주말마다 1년 내내 모였는데, 제일 처음에 모여서는 캐나다 정치학과 대학생 3학년들이 보는 교재를 갖고 선거법을 공부했습니다.
1년 뒤에 이들이 제시한 선거제도는 사람들 예상과 달랐어요.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정당 지지가 의석에 반영되는 비례대표제로 결론을 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시민의회에서는 단기 이양식 비례대표제를 제시했습니다. 정당에서 추천한 후보자들에 대해서 유권자들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순서를 매기는 방식입니다. 비례대표제와는 큰 차이가 있어요. 단순한 비례대표제에서는 유권자는 정당만 선택하지, 정당 내의 누가 될 것인지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당 간부가 후보 순번을 매기죠. 즉 정당 간부의 권력이 막강해집니다. 그런데 주민이 직접, 출마한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쓰면 정당 내부에서 누구를 추천하든 시민이 결정권한을 갖게 됩니다. 요컨대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시민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야기죠. 전문가, 의원들은 자기들의 권한이 센 제도를 생각해내고, 시민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서 대리인을 어떻게 잘 부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서 해법을 낸다는 거예요. 접근방식이 전혀 달라요. 이처럼 권한을 주고 기회를 주면 시민들이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회는 진입 문턱이 없어야 됩니다. 가령 무슨 교육을 몇달 동안 받고 와라, 이런 식의 조건이 있으면 안됩니다. 투표권도 나이만 차면 무조건 주잖아요. 투표권이 있어야 기표소에 갑니다. 시민의회 들어갈 때에도 조건을 세우면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입장벽을 없애고 추첨을 해서, 당신 뽑혔으니 하겠느냐, 이렇게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가 갖는 의미가 뭐냐 하면, 주권자인 시민이 제도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고 거기에 권능이 부여된다면, 사람들이 기꺼이 모여서 참여하고,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곽노현 저는 시민의회에 대해서도 환상을 가질 순 없다고 봅니다. 선거대의기구가 아닌 추첨대의기구인 셈인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는 보지만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고작 몇백 명인데 그것의 교육효과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나 이를테면 선거구 획정이라든가 국회의원 보수 책정, 선거법 개정 같은 것은 선거로 뽑힌 의원들한테는 이해가 상충하는 문제니까 이런 안건은 시민의회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겠죠. 그때마다 국민투표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요. 저는 국민투표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도 만들고, 광장과 의회 사이에 시민의회 같은 제도도 만들어서 다양한 민심표출 통로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당연히 의회가 가장 많은 일을 하겠지만 때로 시민의회가 역할을 하고 때로는 국민투표·국민발안·국민소환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도 역할을 할 때 국민들의 목소리가 좀더 반영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개헌안을 시민의회 방식으로 마련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긍정적입니다. 의회처럼 당리당략에 좌우되지 않고 일반시민의 집단지성으로 개헌안이 마련될 테니까요. 그런데 개헌 과정이 진짜 시민주도형이 되려면, 시민의회에서와 동일한 주제와 일정으로 개헌 논의를 진행하는 개방형 지역민회가 방방곡곡에서 운영되면 좋겠어요. 다른 때 같으면 참여할 시민이 많지 않겠지만 지금은 촛불시민혁명이 진행 중이라 가능할 것 같아요. 국민참여개헌절차법 같은 것을 만들 때 지역민회 지원 의무를 규정한다든지, 새로 뽑힐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지역민회가 공공시설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김종철 시민의회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오늘 우리가 모였는데요?(웃음) 물론 시민의회가 전부는 아니죠. 시민의회는 기존의 국회와 양립하면서 국회가 하지 못하는 기능을 하자는 거죠. 어쨌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시민의회라는 개념이 왜 새삼스럽게 대두됐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기존의 정당 중심 대의제 정치, 자유민주주의적 의회제로는 세계가 직면한 긴급한 위기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국가운영도 갈수록 어렵다는 인식이 광범하게 퍼졌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 민주주의를 철폐하고 독재체제로 갈 것이냐? 그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수 민중의 요구와 세계가 당면한 상황에, 제대로 응답하고 책임을 지는 정치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 결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란 과연 어떤 것인지, 진짜 민주주의라는 게 뭔지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볼 필요가 생기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보통 민주주의라고 하면 무조건 선거를 생각합니다. 선거만 하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거의 전부 선거근본주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선거를 백번 해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트럼프 같은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질 뿐이죠. 하기는 선거제도를 개선하면 어느 정도 상황이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세계에는 꼭 미국식 민주주의만 있는 게 아니라 스위스식 민주주의도 있고,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처럼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면 지금보다는 질적으로 높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좀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선거법 개정을 포함해서 여러가지 과감한 개혁을 꼭 이뤄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선거제도 자체가 갖는 근본적인 결함 때문에, 선거로만 대표자를 뽑아서 의회를 운영하는 제도만으로는 옳게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저만의 생각이 아니고, 갈수록 많은 지식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근년에 들어 세계적으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생각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숙의민주주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시민의회인 거죠. 그러나 당분간은 선거제도와 추첨제가 같이 가야 되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국회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현재의 국회가 무슨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너무나 뿌리가 깊으니까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은 소선거구제 중심의 선거제도부터 혁파해서 비례대표제를, 최소한 독일 수준 정도까지라도 확대하는 게 긴급한 과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시민의회에 대해서도 생각을 계속하면서 그 실현 방안을 열심히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엘리트 정치에서 시민주체의 정치로
이진순 저도 ‘와글’에서 해외 정치혁신 사례를 모아 《듣도 보도 못한 정치》(2016)라는 책을 내면서 얻은 교훈은 그거예요. 지금 대의제 위기는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죠. 그런데 이게 특히 언제 격화됐느냐 하면 세계금융위기 이후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국민을 배신하는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저항운동이 벌어지는데, 그게 이탈리아 오성운동이나 스페인 포데모스 같은 시민정당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과 같은 분노 표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기존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해서 가지게 된 불만의 핵심은 기득권정치, 권력카르텔에 대한 분노입니다. 좌다 우다,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다르지만 막상 위기가 터지니까 좌우 해법이 별 차이가 없고 죽어나는 건 서민이고, 금융 관련 부정부패 같은 문제가 터질 때 보니 좌우 상관없이 정경유착이 있더라는 거죠. 이런 정치에 불신, 불만이 쌓여가는 것인데요, 저희가 책(《듣도 보도 못한 정치》)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가 대부분 그거예요. “우리는 좌에서도 우에서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래로부터 왔다”는 구호를 표방하는 새로운 시민세력의 등장이죠. 이 사람들이 풀뿌리 조직을 만들고 풀뿌리를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아래에서 위로(bottom―up)냐 위에서 아래로(top―down)냐. 보텀업 정치를 우리사회 그 어떤 정당도, 정부도, 어디서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죠. 참다못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직접 거리로 나설 만큼 제도권 정치세력들이 제 역할을 못한 거죠. 저는 시민들한테 권한과 기회가 주어지면 소수의 전문가 그룹 못지않게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제가 이견이 있는 부분은, 시민의회를 상설화하자는 주장이에요. 그건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도구든 국가예산이 들어가고 직함이 생기고 이러면서 기성 제도권 안에 하나의 기구로 복속되는 순간 사적 이해관계가 생길 수 있는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시민의회에서도 시민의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직업정치인이 아니지만, 시민의회가 상설화되고 국회 정도의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고 하면, 정책자문을 하는 사람들, 지원단, 국회로 치면 입법조사처 같은 곳이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로비가 거기로 향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대의제의 많은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당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해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당이 촛불 들고 나온 국민들 의견을 수렴하고 감지해서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한데 그걸 안하고 있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게끔 그런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시한부로 시민의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국회가 정당법, 선거법 이런 것들 절대 안 바꿀 거니까 시민이 직접 나서서 하자는 거죠. 상설적으로 국회와 시민의회가 병립되는 방식이 아니라, 시한부로 시민의회를 만들어 그것의 목적과 활동기간을 설정하는 것이죠. 시민의회는 다양한 목적과 취지에 맞게 다양한 층위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보통명사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번에는 개헌을 위한 시민의회, 기한은 1년, 이런 식이로요. 때로는 시민의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놓아서 결정된 내용을 국회 거치지 않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도 있고, 혹은 교육감 수준에서 지역별로 시민의회를 통해서 결정된 것을 교육정책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목적에서 다양한 단위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 당사자주의에 입각한 토론·합의 모델이죠.
이지문 경희대학교 김상준 교수님 주장의 핵심이 비상설 시민의회입니다. 이슈가 있을 때 국민의 일정 수 이상이 요구하거나 국회 3분의 1 이상 또는 대통령이 요구했을 때 시민의회를 소집하고, 끝나면 해산한다. 말씀하신 것처럼 국회 말고도 지방의회 차원이나 교육부, 법무부 차원으로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다양하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오현철 저는 상설이냐 비상설이냐 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헌법재판소를 시민의회로 대체한다고 할 때, 추첨으로 15명을 뽑아 1년 임기로 하는 방법도 있지만, 헌법재판의 사안마다 별도의 시민의회를 15명 배심원으로 구성할 수도 있겠죠. 어떤 식으로 설계하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근본적인 한계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김종철 그런데 지금 학자들 가운데는 상설기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잖아요? 하원은 종래대로 선거로 선출하고 상원은 시민의회 방식으로 한다든지, 혹은 국민 중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사람들로 아예 입법·행정·사법 외의 제4부를 구성한다든지, 그런 식의 구상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던데요?
이지문 추첨 관련해서 해외의 연구는 주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나오고 있는데, 영국과 미국은 기본적으로 양원제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양원 둘 다 선거로 뽑던 것을 한 원(院)을 추첨으로 바꾸자는 것이니까, 새로 뭘 만드는 게 아니라 방식만 바꾸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단원제입니다. 기존과 다른 방식의 것을 새로 만들어서 그걸 시민의회로 하자는 주장은 제가 알기로 공식적으로 발표된 문건으로는 아직 없어요. 저는 궁극적으로는 시민의회의 상설에 찬성하지만 현실적으로 비상설로라도 우선 하자는 입장입니다.
김종철 결국 덴마크식 시민합의회의 같은 것을 하자는 거군요.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는 주로 과학기술 문제를 다루면서 아직 정치문제는 다루지 않지만요.
이지문 네. 그러나 시민의회에 가장 적합한 사안은 선거법이죠. 선거구 획정조차 국회에서는 기한 내에 합의하지 못했잖아요. 제가 정의당 같은 데 가서―당신들이 제도(선거법) 바꾸자고 아무리 말해 봤자 안된다, 그러니까 시민의 힘을 빌려라, 시민의회를 만들어서 일반시민의 판단에 맡기면 틀림없이 현행의 소선거구제 방식을 바꿀 거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적극적으로 시민의회를 주장해서 공론화하라고 조언을 합니다만, 안하더군요.
이진순 정당에 있는 분들을 만나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진보정당이냐 보수정당이냐 그런 거랑 상관없이 모두 당원들의 판단력을 신뢰하지 않아요. 당원들은 좀더 교육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죠. 정치인들이 주로 만나는 시민들은 민원 청탁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보통의 일반시민들이 공익을 우선하는 판단을 하고 정치적 의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지문 민주노동당 때 대의원의 10%를 추첨으로 뽑자고 한 안건이 제기되었는데,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못 얻어서 부결된 일이 있어요. 그런데 진보신당이 나왔잖아요. 진보신당은 새로운 당이니까 50%만 찬성하면 가결되거든요. 그래서 진보신당은 대의원의 20%인가를 추첨해서 뽑았어요. 그런데 그때도 논쟁이 있었어요. 능력 없는 사람이 뽑히면 어떻게 하느냐, 책임감이 없을 것 아니냐. 분명히 진보진영에조차 엘리트주의가 있다고 보여요.
이진순 저는 지금은 기득권 정치세력도 자기들 입맛에 맞는 개헌을 도모하고 있으니까, 단순히 헌법개정이라는 이름을 들고 나오기보다 ‘국민주권 강화를 위한 시민의회’ 같은 것을 제안하고 싶어요. 그게 헌법을 바꿔야 되는 일이면 헌법을 바꾸고, 국회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면 국회법을 바꾸고, 시행령 수준에서 바꿔야 되는 거면 그걸 바꾸자는 것이죠. 적어도 무엇을 제안한다는 걸 명확하게 하는 게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곽노현 현실에서 엘리트나 전문가, 관료들이 모든 걸 결정하고 일반시민은 뒷전의 구경꾼으로 물러나 있지요. 시민의회 방식을 여기저기서 의사결정 과정에 활용하면, 전문가와 엘리트들이 지금처럼 북 치고 장구 치며 공적 결정과정을 좌우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일반시민의 집단지성 형성과 판단을 보조하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전문가, 정당들이 사회 현안을 놓고 첨예하게 맞설 때가 많은데, 이런 교착상태를 시민의회 방식으로 풀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좀처럼 해법이 안 나오는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시민의회 방식이 시도되면 좋을 것 같네요. 배심재판이나 시민의회가 활성화돼 누구든 평생 몇 차례씩 참여할 기회를 가지면 좀더 주의의식이 강해질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려면 사람들이 과도한 노동시간에서 벗어나야 될 겁니다. 경제민주화의 진전 혹은 자영업자,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시민의회 방식을 활용할 때 경제민주화가 촉진될 것으로 보시는지 여기 선생님들께 여쭤보고 싶어요.
이지문 경제민주화가 안된 상태에서는 시민의회의 대표성이 왜곡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씀인데요, 여유 있고 먹고살 만한 사람들만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더불어 또하나 흔히 제기되는 질문이, 과연 시민의회가 제대로 판단을 하겠느냐는 의구심입니다. 우선 후자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국회나 지방의회도 항상 올바른 결정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에요. 시민의회도 당연히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저는 봐요. 오히려 시민의회가 100%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물론 교육개혁과 경제개혁이 전제가 되어야죠. 그러나 그것이 다 된 상태에서 시민의회를 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도 시민의회가 필요한 것이죠.
시민의회가 잘되기 위해서 저는 우선 두 가지 부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당이라고 하나요? 시민의회에 참가함으로써 최소한 경제적 피해가 없도록 보장을 하고, 기타 다른 불이익도 없도록 직장에서 제약을 받지 못하게끔 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하나는 대표성 부분인데요, 5,000만 유권자 중에서 200~300명을 대표로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이냐, 너무 적은 수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해 숙의할 시민의원을 300명 뽑았다고 가정하면, 온라인을 통해서 시민의원 한 명당 20~30명씩을 결합시켜주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시민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모 국회의원이 그러대요. 캐나다나 아일랜드 같은 나라들은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됐고 민주주의 참여교육이 되어 있기 때문에 (시민의회가) 가능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니 전면적으로 시민의회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요. 제가 반박을 했어요. 그들은 그들대로 장점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장점이 있다―문맹률이 제로에 가깝고, 40대 이하는 거의 대학을 나왔고(다니고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적 능력을 갖고 있고, 온라인 참여지수도 세계 1위이고, ‘촛불’로 나타난 시민의식을 봐도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현철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시민의회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전문성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의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얘기를 했죠. 희곡을 보고 나서 전문 비평가가 쓴 비평 하나랑, 시민 100명이 쓴 100개의 비평을 모은 것이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요즘식으로 말하면 집합지성을 얘기한 것이죠. 파티를 할 때에도 요리사 한 명이 와서 요리하는 거랑, 파티에 참석한 100명이 각기 자기 요리를 갖고 와서 하는 거랑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개개인의 시민이 전문가 한 사람보다는 전문성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민 다수가 모여서 지혜를 모으면 전문가보다 훨씬 낫다는 겁니다. TV 틀어보십시오. 전문가들이 나와서 얘기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으로 끝나죠. 전문가들은 전문가들 시야가 있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 양보할 수가 없어요. 전문가들한테 자문을 받아서 시민들이 결정을 하게 해야죠. 완전히 뒤집어놔야 해요.
또하나 중요한 점은, 현대 정치시스템에서 의사결정은 전문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4대강사업을 보세요. 이쪽 전문가 저쪽 전문가 다른 입장이 있지만, 결국 어떻게 결정됩니까. 그전 선거에서 다수표 받은 쪽이 이깁니다. ‘전문성’이라고 포장하지만 권력 있는 쪽 뜻대로 결정되는 겁니다. 시민의회는 시민들이 모여서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것을 기반으로 토론을 해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즉 전문성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예를 들었는데요, 어느 구두장이가 좋은 구두장이인지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이 만든 신발을 직접 신어보는 것이라고 했어요. 어느 신발이 발에 잘 맞을지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사자라는 말입니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토대로, 내 생활지식을 결합시켜서 만드는 창조물은 시민의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정당, 꼭 필요한가
김종철 지금과 같은 의사결정 시스템에서는 결국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요. 그리고, 그 결정의 결과가 합리적이고 현명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쯤에서 좀 근본적인 질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정당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야 된다, 지역에서 출발해야 된다, 밑에서부터 출발해야 된다, 이런 당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바람직한 방식으로 대의제 정치를 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진순 신생 정당들이기 때문에 더 지켜봐야 하지만, 창당하고 짧으면 1년, 길면 3~4년 안에 적어도 원내 3당이 된다거나 주요 대도시의 시장을 낸 사례가 이탈리아나 스페인, 아이슬란드 같은 데서는 전면화되었어요. 시민 주도의 건강한 정당을 만들지 못한 나라들에서는 기성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이 부흥하고요. 요즘 정치가 도 아니면 모로 가는 것 같아요.(웃음) 저희 단체가 유럽의 그런 정당들에 주목한 이유는, 지금 말씀들 하신 시민의회의 작동방식이나 그것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이 정당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장의 에너지와 작동방식을 고스란히 제도정치권으로 갖고 오자는 것이 그 사람들의 고민이었던 거죠. 사실상 운동과 정당의 영역이 그리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아래로 가면 자발적인 풀뿌리 조직이에요. 당원모임도 당사에서 열리는 게 아니고 오늘은 여기 사무실, 내일은 저기 사무실에서, 당직자도 없이 그냥 일반 당원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서 열려요. 정당 하부조직은 스페인은 시르쿨로스(circulos), 이탈리아는 미트업(MEETUP) 이런 풀뿌리 조직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정치, 교육, 경제, 지역자치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정당의 정책으로 올라갑니다.
저는 우선 지역정당이 우리나라에서 허용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 5개 지역에서 1,000명씩 당원을 모집해야 (전국)정당 설립이 가능한데, 이런 정당 설립 요건을 완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정당을 허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역의 풀뿌리 조직에서 정치에 도전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겠죠. 시민들이 참여하고 의견을 상시적으로 계속 올릴 수 있는 단위들을 강화해야 될 것 같아요. 지역정당을 허용한다는 건 이중 당적도 허용한다는 거죠. 지역적으로는 어느 당, 전국적으로는 어느 당, 이렇게 이중 당적도 가능해야 됩니다. 그럼 여성주의든 동물권이든 이슈별로 다양한 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고, 선거 때도 이런 정당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겠죠. 이런 정치생태계가 가능하도록 선거법과 정당법을 바꾸기 위해서 저는 시민의회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종철 그런 정당이 나오려면 우선 선거법이 근본적으로 개정돼야죠. 근데 이 선생님, 우리 녹색당 사정 잘 아세요? 우리 녹색당도 내부에서는 포데모스 못지않게 활발하게 토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죠. 제가 보기에 제일 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정관념이에요. 전략투표 문제 이전의 문제예요. 일반적으로 한국인들, 특히 어른들은 녹색당이라면 그냥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지만 젊은 녹색당원들은 정말 열심히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온갖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을 합니다. 저는 포데모스는 잘 모르지만 자료를 보면서 “어, 우리 녹색당이 하는 방식과 거의 비슷하네” 그런 느낌이 듭디다. 그런데 이렇게 녹색당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데 비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할 가능성은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적·사회적 토양 속에서는 거의 닫혀 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좀 엉뚱한 소린지 모르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민주주의를 하는 데 꼭 정당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죠.
오현철 저는 정당을 현대의 군주라고 생각합니다. 정당에서 몇 명이 나와서 교대로 집권할 뿐이지 군주인 건 맞아요. 왜냐하면 이걸 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민의회 같은 게 꼭 있어야 됩니다. 한편 정당이 잘되기 위해서도 시민의회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카르텔 정당 때문이에요. 두 개 정당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정당이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정당 설립 요건도 문턱이 높지만, 예를 들어서 우리는 원내교섭단체가 20석인데, 5석인 나라도 있어요. 5석이면 예전 민주노동당도 원내교섭단체가 되죠. 그럼 TV에도 나오고 사람들 눈에 더 많이 띌 수 있겠죠.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는 통로가 많아지는 것이죠. 그다음에 우리가 소선거구제 방식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까지 정말 큰 문제인데 기존의 카르텔 정당들이 선거법, 관련 정당법 모든 법률 개정을 막고 있어요. 이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도 그런 기득권 구조와 무관한 시민들이 참여해서 정당법, 선거법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김종철 정당을 어느 정도 좀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치결사체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시민의회가 필요하다, 그런 말씀이신데요. 저는 비록 지금은 현실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시민의회가 정당정치를 대체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요컨대, 직업정치인이 과연 있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자는 거죠.
예를 들어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간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되잖아요? 그리고 유럽에서는 좌파, 우파 정당들 사이에 대연정이니 연합정부니 하면서 기존 정당노선이 사실상 무의미한 정치적 틀이 이제는 거의 굳어졌고요. 원래 정당이라는 게 좌파, 우파 혹은 중도파를 나누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아니에요? 이제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구분은 사실상 없어진 것이 아닙니까? 정당정치를 한다면서 대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적인 이야기잖아요. 그건 정당 중심의 책임정치라고 말할 수 없죠. 제가 비약하는지 모르지만, 경제의 글로벌화와 더불어 기존의 정당정치나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그동안 잘 작동하던 제도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도 원래 그 제도에 내포돼 있던 모순이나 결함이 오랫동안 가려져 있다가 경제성장이 잘 안되는 상황이 되자 표면화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지문 저도 어느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느냐로 진보정당, 보수정당을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지금 좌우 정당들이 좋은 게 좋은 걸로 비슷한 정책을 내고 있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사회적 약자 등에 대한 대변은 더욱 안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시민의회는 이 부분에서도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정당을 기반으로 한 의회는 한번 선거해서 결정된 두셋의 정당이 좌지우지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무당파 목소리나 사표의 목소리는 없어요. 그러나 시민의회 제도하에서는 무당파든 당선자를 못 낸 당에 투표한 사람이든, 그때그때 교육문제든 사법개혁 문제가 됐든 자기생각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진순 저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정당이면 좋겠습니다.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혹은 다른 이슈와 안건을 중심으로 한 100명 모여서 정당을 만들기로 하면 만들어서, 작은 기초단위든 어떤 단위에 출마할 수 있는 권한을 열어놓고 그다음에 유권자들이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죠. 어떤 이슈가 됐든 정치적 견해를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개별 의견에 머무르지 않게끔 상시적으로 활동하는, 그런 덜 관료적이고 유연하고 작고 기민한 일종의 정치결사체 개념으로 정당이 이해되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당 설립 요건을 간소화하면 정당 난립의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만, 다양한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정당이 많은 게 문제인가요? 선택할 정당이 없는 게 문제죠. 어차피 선택은 유권자들이 하는 거니까요.
김종철 그래서 다 의회로 들어가서 그 사람들이 고르게 의석을 차지한다면 좋겠죠. 그런데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잖아요. 의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수한 군소 정당이 있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진순 아니요. 지금 워낙 중앙권력이 강해서 그렇지, 좀더 바람직한 분권형 형태로 간다면 적어도 어떤 특정 지역에서는 그런 정당들이 기초단위에서 상당히 많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김종철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결국 의회에서 결정하잖습니까. 사드문제를 지방에서 결정하지는 않잖아요.
이진순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 저는 연정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소수 정당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다만 연정 참여 여부도 정당 내부의 작동원리에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의견수렴을 거쳐 결정해야겠죠. 예를 들어 이탈리아 오성운동은 총선에서 국내 득표율 1등을 했는데도 원내 제3당의 위치가 되었어요. 이 정당이 연정을 거부했고 다른 데들이 연정을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경우에도 연정을 했어야 되느냐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게 맞느냐는 그 정당 내부에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죠. 우리가 당원 구조가 없는 ‘자영업’ 정당들과 정치인들만 보다 보니까 원래 정당의 순기능을 무시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김종철 아, 물론이죠. 저는 소수 정당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우파 정당하고 좌파 정당이 결합해서 대연정이라고 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정당정치의 관점에서는 말이 안된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탈리아의 오성운동도 그렇고 스페인의 포데모스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가능성이지 그 사람들이 새로운 21세기 정치모델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이진순 맞습니다. 제가 더 주목하는 것은 포데모스와 같은 시기에 각 지역별로 나온 새로운 시민정당, 지역정당이에요.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에서 지금 새롭게 시민정당이 만들어져서 시장을 배출하고 시민참여형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비록 시 단위이기는 하지만 마드리드 같은 경우에는 주민제안을 받아서 그게 몇 퍼센트 이상 지지를 받으면 의회를 안 거치고 바로 주민투표로 갑니다. 그런 식으로 운영하고, 또 시 가용 예산의 25%를 주민참여로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해요. 구별로 할당해서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고, 예산을 어떻게 쓸 건지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하고 있어요. 이렇게 시민한테 큰 권한을 주니까 시민들이 실제로 참여를 해서 성과들을 내고 있습니다.
김종철 선생님이, 꼭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냐, 주체로 참여하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고 하셨는데, 저도 굉장히 공감을 합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먹고살기 힘들고 취직하기 힘들고 여러가지로 고달프고 힘들지만, 지금 대부분의 나라가 다 그렇죠.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주체로 참여해서 해법을 내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느끼면 이렇게까지 절망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권력 있는 사람들한테 휘둘리지 않고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만 있으면, 그런 희망만 있으면 저는 지금 사는 게 갑자기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인내할 수 있는 정도의 시민의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김종철 사실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마음도 그럴 거예요. 자기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진짜 욕망은, 주인으로 살고 싶다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전철을 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다들 피곤한 얼굴들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GDP가 3만 달러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죽는 소리들을 하고 있지만 2만 달러라고 하더라도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거예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다 불행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결국 크고 작은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 즉 정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이런 정치적 소외감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직접 의회에 들어가든 않든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 속에 자신이 언제든 참여할 기회가 잠재적으로라도 열려 있다고 의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참여재판의 경험, 주체적 참여의 기쁨
이지문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2008년에 시작했으니까 이제 10년이 되어갑니다. 제가 대법원에서 이 제도를 도입한 결과를 분석한 걸 봤는데, 두 가지 유의미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영미와 다르게 배심의 평결에 판사가 구속받지 않지만 그래도 배심원들의 평결과 판사의 판결이 90% 일치한다는 점이에요. 두 번째로 2심에 가서 깨지는 비율이 판사가 단독으로 판결한 경우가 배심이 참여한 판결보다 훨씬 더 높다는 거예요. 이것만 가지고 좋다 나쁘다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반시민들이 참여한 판결이 판사가 혼자 한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배심원으로 참여한 사람들한테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이게 강제적이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는 법도 모르고 바빠 죽겠는데 왜 가야 되는가” 하고 불만스러워하다가도 막상 가서 참여한 뒤에는 생각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한평생 이렇게 중요한 공적 결정에 참여할 기회가 어디 있느냔 말이죠.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심사숙고해본 것은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 후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현철 후자도 중요하지만, 전자도 강조할 필요가 있어요. 판사의 단독 판결보다 뒤집히는 경우가 적다는 것이 바로 시민참여제도의 장점을 보여주는 거예요. 판사가 판단할 때는 직업적 편견이 있거든요. 전문가의 직업적 편견―자기도 모르게 “아, 이놈은 유죄네” 하고 예단하고, 거기에 맞는 증거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판결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증거에만 입각해서 판단하는 시민들의 집합지성이 제도적으로 전문성을 더 잘 활용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미국에서도 배심재판을 하는 경우는 2~4% 정도밖에 안됩니다. 잡범들은 아예 (배심재판) 신청을 못 해요. 해 봐야 더 깨지기 때문이죠. 배심원들이 형량을 더 때리거든요. 잡범들은 양형협상을 해서 형량을 낮추는 쪽으로 가고, 사회적 정의가 필요하고 법관들의 편견이나 지식이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정의감과 상식에 호소하려고 하는 사건 같은 경우에 배심재판으로 가게 됩니다. 또한 중요한 점은, 재판관이나 범죄인들이 이런 배심원 재판을 염두에 두고 형량거래를 할 것인지 배심재판을 할 것인지 판단을 하게 된다는 점이죠. 사법절차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건 판결의 사례가 적더라도 중요한 근거가 되는 거예요.
곽노현 재판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대립 당사자주의잖아요. 원고 변호사와 피고 변호사가 증거를 제출하고 그것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며 판단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적 숙의과정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측면이 있죠. 사법과정 시민참여는 시민들의 주권자의식과 시민역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이진순 저는 배심원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느낀 자존감이나 성취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저는 제일 싫은 게 정책 공모하면서 상금 내거는 거예요. 이건 내 문제지만 나랑 비슷하게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먼저 제안을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좋은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 하는 순수한 의지가, 순수하게 존중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됩니다. 제가 마드리드 시민참여국에 있는 분을 만나서, 당신들은 주민제안이 채택되면 그 제안자한테 어떤 보상을 주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 질문 자체를 못 알아들어요. 보상(reward)이 왜 필요한가 이해를 못 해요. 제안자는 워킹그룹에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법안을 조문화하고 타당성을 검토하는 워킹그룹(전문가, 공무원들로 구성된)에 넣어주는 것으로써 예우를 하는 것이죠. 제안자에게는 자신이 제안한 것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이 가장 큰 기쁨인 것이죠. 이건 가치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해요.
김종철 정치참여 그 자체가 재미있는 활동이고, 행복감을 주는 것이죠. 그 자체가 보답인 거죠.
이진순 그렇죠. 정치에 참여하는 게 시민들이 원하는 거다, 그런 확신이 있는 거죠.
오현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례를 봐도 그런데요, 관공서에서 추천한 사람들과 추첨으로 해서 뽑은 사람들의 회의 출석률을 보면,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 출석률이 높습니다. 추천받은 사람들은 출석률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오더라도 소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결정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인도 케랄라 지역의 판차야트 같은 경우에는 예산을 공동체에 줍니다. 그럼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지역사회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를 하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자기권리를 찾고, 권능을 부여받고 그러면서 시민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김종철 중국에서도 그러고 있다고 하잖아요. 기초 행정단위지만 몇몇 지방에서는 예산편성 같은 중요한 문제를 공산당 간부들이 결정하지 않고, 숙의형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추첨으로 선정된 주민대표들로 소규모 회의체를 구성하여 심도 있는 토론과 숙의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를 통해서 결정하는 시스템을 벌써 1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도 추첨으로 뽑혀 참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 문제도 없다고 그래요.
이지문 제가 작년에 그 공론조사를 개발한 제임스 피시킨 교수를 만나봤어요. 몽골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문맹률도 높은데 제대로 될까 의구심이 들어 물어봤더니, 다양한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글을 모르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오현철 포르투알레그레 같은 경우에는 참여예산제를 도입하고 나서 한 시민이 시청에 찾아왔대요. 이 사람이 저소득층이라서 그때까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금 내고 싶다고 온 거예요. 참여예산제를 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시민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시민의 의무를 하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인도 케랄라 판차야트에서도 처음에는 예산을 지역 유지들이 다 먹었어요. 그래서 다음번에는 그 과정을 몽땅 공개했어요. 이 돈이 어떻게 해서 누구한테 갔다는 것을 죄다 알게 되니까 지역 사람들이 분노했고, “이 돈을 저 사람들이 다 갈취했구나, 우리가 이걸 지켜야 된다”고 해서, 그다음부터 우르르 몰려와서 토의하기 시작합니다. 매일같이 얘기하면서 시민으로 성장하는 거죠. 그 전까지는 그냥 하층민이었는데, 시민으로 성숙하면서 권리의식을 갖고 민주주의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말고 발상을 바꿔서 주민들이 스스로 꾸려가는 과정을 줘야 합니다. 그때 토의민주주의가 되고, 정치개혁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것이죠.
재검토해야 할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김종철 지금처럼 가짜 뉴스도 많고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어려운 이런 시대일수록 정말 이런 게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야말로 참여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교육이 되잖아요. 이제 시민정치교육 얘기 좀 해볼까요. 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중요한 방해요소가 소위 ‘교육의 중립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무원과 교사는 정당 가입도, 정치활동도 못하게 금하고 있고, 또 교실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된다면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거론도 못하게 하는데,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 다 바보 만들자는 얘기잖아요. 국민들이 바보가 되면 기득권자들은 더할 수 없이 좋을지 모르지만, 이러고서는 좋은 나라가 될 리가 없잖아요.
곽노현 역사적으로 보건 국제적으로 보건 우리가 도달한 교육수준은 굉장히 높은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우리 국민들로 민주주의를 못하면 어디서도 못할 겁니다. 다만 새로운 과제와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시민의식과 시민역량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되잖아요? 먼저 학교가 학생들의 시민의식과 시민역량을 길러줘야 해요. 공교육으로서의 학교라는 것이 본래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주의 학교 아니에요? 그러려면 학교가 민주주의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합니다. 또한 수업시간에 사회현안에 대한 토론, 논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해요. 그런데 우리 학교들은 이걸 기피하고 있어요. 국민발안이나 국민투표, 시민의회나 배심재판 같은 것이 활성화될수록 일반시민이 똑똑해져야 하고, 초중고 교육부터 바꿔야 합니다. 특히 사회현안 교육을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그러자면 50만 교사들이 우선 정치기본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치기본권도 없는 반쪽 시민이 무슨 수로 민주시민을 길러낼 수 있겠어요. 50만 교사 외에도 100만 공무원까지 무려 150만 명의 모범시민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며 정치천민 취급을 받고 있어요. 명색이 정당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1등 자격조건을 갖춘 무려 150만의 시민을 선거와 정당의 세계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중산층 전문직 150만 명의 진입을 차단한 채 무슨 수로 정당 체질과 문화를 바꿉니까.
이진순 처음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명문화했을 때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겠지요? 공무원 교사가 정부 여당의 홍보역할을 하게 되니까 중립을 지키도록 하려고 시작된 건가요?
곽노현 네. 악명 높은 3·15 부정선거 때 자유당에서 교사, 공무원을 강제로 당원 가입을 시켰답니다. 이런 폐단을 막으려고 4·19 헌법 만들 때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고 정한 거죠. 일차적으로 정권이 공무원, 교사를 정치에 동원하는 걸 막으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났고, 군사정부는 생각이 달랐던 거죠. 교원노조를 해산한 사람들 아닙니까.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워 교사의 손발을 꽁꽁 묶고 국가 종속을 강제한 겁니다. 이렇게 50년이 넘도록 오고 있는 거예요.
김종철 독일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곽노현 독일은 교사가 자유롭게 정당에 가입하고 학교 밖에서는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오현철 독일은 자유일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을 상대로 정치교육을 합니다.
이진순 그런데 정치적 중립 의무를 없앴을 때 다시 자유당 정권 시절과 같은 폐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학생이 교사와 의견이 안 맞으면 바로 반박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지만, 우리 교육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과연 교실에서 선생님이나 특히 교장 선생님이 뭐라고 할 때 학생들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가 되어 있느냐는 건데요.
곽노현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나라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기본권 금지를 용인하고 있는 건 결국 우리 국민, 학부모들이죠. 행정이 정치화되고 교육이 정치화되는 건 곤란하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딱 거기까지만 제한해야죠. 교육에 국한시켜 얘기한다면 수업시간에 교사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특정 정당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주입·교화하는 건 당연히 안될 일이죠. 독일에서도 1976년까지 이 문제로 굉장히 논쟁이 심했어요. 나치체제 겪으며 수백만을 죽인 끔찍한 과거가 있지,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있지, 그 사람들의 이념대립도 우리 뺨치면 뺨쳤지 작은 게 아니었죠. 학교에서의 정치교육 내용과 방법을 둘러싸고 진영싸움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러다 1976년에 보이텔스바흐 합의라는 것이 만들어져요. 보이텔스바흐라는 소도시에 극우파, 중도우파, 중도파, 중도좌파, 극좌파를 각각 대표하는 정치교육학자들이 모여서 정치교육에서 어떤 합의가 가능한지를 토론했어요. 그때 의견일치가 이뤄진 3대 원칙을 보이텔스바흐 합의라고 합니다. 우선, 학교교육에서 정치교육의 목적은 교사의 정견을 주입·교화하는 데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교사의 정치적 주장이나 견해로써 학생을 압도해서는 안된다―학생압도금지원칙으로 불립니다. 두 번째는 논쟁재현원칙.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사안은 수업시간에도 논쟁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에요. 균형 있게 모든 주장을 제시하라는 거죠. 세 번째로 정치교육의 목적은 학생 각자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정치적 실천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을 돕는 데 있다. 당연히 시민행동역량까지 갖춰주면 더 좋겠죠. 보이텔스바흐 3대 원칙은 정치교육의 교육학적 전환을 이뤄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김종철 법제화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상식으로서?
곽노현 그렇죠. 독일은 지금까지 공식 문서 한 장이 없습니다. 반면 영국에선 1996년 보수당 정권이 교육법을 전면 개정하며 이 내용을 법조문으로 만들었어요. 보이스텔스바흐 제1원칙을 ‘정치교화 금지’라는 제목으로 신설했고, 제2원칙 논쟁재현원칙도 ‘논쟁 사안의 균형취급 의무’라는 제목으로 법제화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징검다리교육공동체를 만들 때 세 가지 주장을 내세웠어요. 첫째, 학교에서 사회현안 교육을 해야 된다, 절대 회피하면 안된다. 둘째, 논쟁적인 사회현안 교육은 반드시 보이스텔스바흐 원칙에 따라서 해야 된다. 이 부분을 입법과 협약으로 보장하자. 셋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교사의 보이스텔스바흐 원칙에 따른 수업으로써 100% 충족된다. 그렇다면 교사의 정당 가입 금지, 선거운동 금지, 입후보 금지라는 3중 정치활동 금지는 철폐하자는 거죠. 보이텔스바흐 원칙의 수용과 실천을 전제로, 교사의 정치활동 금지를 풀라는 주장이 지금은 교육계에서 제법 알려져 있습니다. 진보 교육감들이 모두 공감하지만 특히 조희연 교육감이 여기에 적극적입니다.
김종철 이 문제는 교육법이 개정되면 되는 거예요?
곽노현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죠. 교육의 정치중립성의 합리적 핵심은 살리되 공무원법, 정당법, 선거법 등에 산재한 금지 조항을 개폐해야죠. 첫째, 교육감이 이런 원칙에 대해서 교총과 전교조 등 교원조직들과 공식적으로 협약을 맺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감이 보이텔스바흐 원칙 같은 것을 교육지침으로 만들 수도 있죠. 또하나, 영국처럼 교육기본법에 사회현안 교육 원칙을 두는 것이죠. 사회현안 교육을 장려하되, 정치 교화나 주입이 일어나서는 안되고 논쟁적 방식으로 균형 있게 다룰 의무가 있다는 정도로 규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하면 교사의 정치기본권 회복의 토대가 마련될 겁니다. 보이텔스바흐 원칙의 준수를 확실하게 보장한다면, 교사가 적정 수준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김종철 우리나라는 교육계 내부에서 합의를 본다고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지문 맞습니다. 학부모와 시민들이 오해를 해요. 보수 쪽에서는 “정치중립 없어지면 전교조 선생들이 들어가서 교육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명확하게 해두어야 설득이 될 것 같아요.
김종철 정치의 질이 높아야 아이들도 행복해진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시민정치교육을 학교생활을 통해서 열심히 해야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요. 그런 교육이 되면 아이들 입시공부에 지장이 생긴다고 생각하죠.
곽노현 세월호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교육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게, 학교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과정에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거예요.
이진순 저는 학부모 입장에서 시민의회의 기본적인 운영과 구성 방식을 시범학교에서라도 훈련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대안학교에서는 하는 데도 있겠지만 규모가 작잖아요. 일반 공립학교에서는 엄마가 적극적이고, 집안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한테 예쁨을 받지 못하면 회장이 될 수가 없죠.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는 학교라는 자기 생활의 터전과 관련된 논의나 결정에서 발언권을 가져본 역사가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학생들에게 중요한 안건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 자체도 별로 주어지고 있지 않지만요.
이지문 지금 우리 학교들에서는 반장을 뽑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처럼 되어 있죠. 공약 보고 좋은 후보 선출하는 게 민주주의인 것처럼 교육하고 있는데, 반장제도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랑 일본밖에 없다고 들었어요. 지금 한 학급이 30명 정도 되고, 방학 빼면 학급일수도 30주쯤 되니까 학생들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반장을 하면 됩니다. 반장은 원래 돌아가면서 맡는 당번, 봉사의 개념인데, 우린 어릴 때부터 반장 하면 권력, 감투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가르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에 대해서 잘못된 교육이 되고 있어요.
시민의회를 성사시키자면
김종철 교육의 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이들이 거기서 보고 자라기 때문이죠. 모든 게 정치문제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환원주의는 곤란하지만, 결국은 정치가 바로잡혀야 교육도 바로잡힙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 중에 혹시 빠뜨렸거나 특별히 추가하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시대의 민주주의에는 종전과 다른 창의적인 요소가 도입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오늘 그런 이야기는 미처 하지 못한 것 같네요.
오현철 브리티시컬럼비아를 보면 시민의회 웹사이트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거기 글을 쓰고 논쟁을 벌여요. 시민의회에 권한이 부여되니까 거기 가서 이야기하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시민의원들이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일주를 하면서 시민들의 의견도 듣고, 자기들끼리도 계속 토론을 하지요. 시민의회가 하나의 구심점이 되어 모든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게 됩니다.
온라인 시민의회는 하나로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이슈별로 잘라서 여러 개 만들어서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고, 형태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권한이 부여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권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때 시민들은 ‘강한 공중’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이지문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 같은 경우 160명이었는데, 중도에 사퇴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어요. 평균 출석률은 95%. 책임감 없을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들 출석률 보세요. 형편없지 않습니까? 브리티시컬럼비아 시민의회는 처음 석 달은 학습기간, 석 달은 다니면서 주민들 의견 듣는 공청회 기간, 나머지 기간 동안 시민의원들끼리 논의해서 결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런 과정을 다 보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김종철 브리티시컬럼비아는 시민의회가 권고한 선거법 개정이 주민투표에 부쳐졌다가 결국 실패했죠?
이지문 의회에서 장난을 쳤어요. 원래 일반적인 주민투표처럼 50%가 넘으면 통과되는 게 아니라 이때만 두 개의 조건을 둔 거예요. 두 가지 기준은 투표자의 60% 이상 지지, 그리고 79개 선거구의 60%인 48개 이상의 선거구에서 과반수를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79개 선거구 중 77개에서 과반수를 획득했지만 전체 투표의 57.7% 찬성으로 부결되었어요. 두 가지 조건이나 내세운 것은 기득권을 누리는 의회 의원들로서는 선거법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오현철 헌법개정도 의회에 맡겨두면 의원들 이해에 맞게 헌법을 고칩니다. 선거법도 그렇고. 그래서 특히 개헌을 위해서라면, 국회에 자문을 해주는 시민의회가 아니라 브리티시컬럼비아처럼, 국회와 별도로 헌법을 만들 수 있는 시민의회를 만들고, 거기서 도출된 안을 국회 통과하지 않고 국회 추인도 받지 않고 직접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식이 가장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국회를 거치면 반드시 왜곡되게 마련입니다.
이지문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법안을 냈는데, 기존의 헌법개정특위를 인정하고, 그 안에 시민회의를 두어 추첨으로 소집한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자문역이 되는 거예요. 반면 제가 참여하는 추첨민회네트워크에서도 독자적으로 헌법개정안을 마련해서 정의당 윤소하 의원을 통해서 입법청원을 했는데요, 저희는 법으로 독자적인 시민의회를 만들어서, 거기서 결정된 것(개헌안)을 국회에 보내서 국회에서 통과되면 그걸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안입니다.
오현철 선생님은 시민의회의 결정을 국회로 보내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저희는 국회를 통과하도록 안을 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국회의원들이 입법권은 국회에 있는데 입법권을 침해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하나 이유는 지금의 헌법 아래서는 헌법발의는 국회가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헌법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투표로 바로 갈 수가 없어요. 아일랜드 방식도 그렇습니다. 시민의회에서 결정한 것을 국회에 보내서 국회에서 논의한 다음 다시 국민투표를 하는 방식이에요.
이진순 시민의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이걸 구체화하기 위한 논의도 되고 있는데, 저는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 정치권에서 이것을 이름만 갖다가 차 떼고 포 떼고 핵심 가치는 다 죽이고 들러리로 삼아서 ‘자문위원회’ 용도로 한번 써먹고 나면, 그다음에 다시 제대로 된 시민의회를 제기하기는 훨씬 어려워진다는 말입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시민참여 같은 것을 형식상 채택하고 있는 지자체라든가 기관들이 많아요. 오히려 안하고 있는 데가 거의 없죠. 얼마나 시민에게 권한을 주고 정보를 제공했는지는 따지지 않고 민도(民度)를 문제 삼습니다. “아, 시민의회 해봤는데 참여하는 사람도 없고, 효과도 안 나더라.” 단순히 “시민의 의견을 경청해서 고려해볼게” 이런 것은 시민의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름만 가져가서 남용되는 일이 없도록 잘 단속해야 될 것 같아요. 공개적으로, 이런 것은 절대 안된다는 비판을 확실하게 해야 될 것 같아요.
이지문 제가 김종민 의원의 안에 반대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렇게 할 바엔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학습기간 없이 100명 뽑아서 헌법개정 자문하라고 하면 무슨 수로 합니까? 그런 식이라면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상한 소리만 하네” 이렇게 되기 십상이겠죠. 또 김종민 법안의 시민회의는 자문기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시민의회는 의회 소속입니다. 이 비용도 생각보다 크지 않아요. 지금 몇몇 시민단체가 모여서 시민의회를 하려면 제대로 된 아일랜드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대선 후보들한테 질의도 하고, 알리고 있습니다.
김종철 아일랜드에서도 국회의원들이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지문 점진적으로 만들었죠. 지난번 때는 정치인 33명, 시민 66명으로 1 대 2 비율로 구성했어요. 의장은 중립적 인사로 하고요. 지금은 99명 모두 추첨, 의장만 연방법원 판사입니다. 그리고 1 대 2로 했을 때는 구속력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법률로 만들어버렸어요.
김종철 덴마크 시민합의회의의 결정도 법적으로 구속력이 없답니다. 그렇지만 의회에서 받아들인대요. 민주주의 원칙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안 받아들이기가 어렵겠죠. 그런데 시민의회를 비상설 기구로 사안별로 한다고 할 때에도 이걸 누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결국은 국회에서 동의를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도 어떻게든 국회에서 받아들이도록 만들자면 우선 지식인 사회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시민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나 아일랜드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받아들였느냐, 이게 궁금한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지문 지도자의 결정이더라고요. 지금 그래서 저희들은 대선 후보들이 시민의회를 공약으로 만들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진순 에스토니아도 2013년 정치관계법 개정할 때 그렇게 했어요. 대통령 직속으로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민회를 꾸리고, 거기서 국회의원들이 통과시킬 수 없는 정당법 개혁이라든가 이런 조항들을 15개 모아서, 대통령 재가를 거쳐 국회에 회부해서 그중 7개가 통과되었어요. 시민의회 구성 제안을 우리 국회에서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새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독립기관으로 한시적으로 한다든가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해요. 예전에 진상조사특위 이런 것 했던 것처럼요.
‘사드’문제도 시민의회를 통해서
김종철 결국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이 시민의회를 구상하게 된 동기인데, 막상 시민의회를 성사시키자면 기성 정치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네요. 딜레마라면 딜레마인데, 그렇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가 된다고 판단하면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그걸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그런데 현명한 정치가라면, 국가적 난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시민의회를 도입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사드배치 문제는 누가 차기 대통령이 돼도 굉장히 풀기 어려운 문제잖아요. 그럴 때 시민의회를 소집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결론을 가지고 미국이든 중국이든 그쪽에 설명을 하는 거죠―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국민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시민의회를 통해서 이러한 결론이 났는데, 이걸 내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변경할 수는 없다, 이러면 되잖아요. 정치지도자랍시고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꼭 자신이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늘 엉터리 짓을 하고 문제가 안 풀리는 거예요. 나라의 외교도 민주적 정당성에 의해 뒷받침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잖아요. 그런 민주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장치로서도 시민의회가 제일일 것 같은데요.
오현철 그렇죠. 가장 좋은 방법이죠.
곽노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우리 국민은 몹시 똑똑해야 합니다. 저는 시민의회 방식으로 사드문제 같은 것도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외교·안보·통일 이런 분야는 가장 전문가의 일로 치부되어왔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의 문제잖아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일반시민이 전문가의 조력을 받으면서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습니다. 오히려 전문가의 지식이란 게 종종 어떻게 당파성으로 휘어지는지가 드러나게 될 겁니다.
중국이 저렇게 경제보복에 나선 이상 사드배치는 사실 국민투표 사항이에요.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안에 대해서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거든요. 국민투표에 부치면 언론이 들끓고 정당들이 움직이고 엄청난 국민적 학습이 이루어지겠죠. 그러나 그 사이에 시민의회 방식으로 한번쯤 걸러지면 좋을 것 같아요. 시민의회 같은 틀에서 찬반 양쪽의 주장을 듣고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에요. 그런 공론의 장이 광범위하게 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현철 시민의회가 특히 유용한 경우가 정치권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사안입니다. 사드 같은 경우, 4대강, 미국산 쇠고기 이런 사항은 시민에게 결정권을 넘기면 아주 간편하죠. 또 좋은 사안이 정치인들이 주저하는 것, 세금 올리는 거예요. 텍사스에서는 화력발전이냐 원자력발전이냐 풍력발전이냐, 이렇게 주민들에게 물어봤어요. 상대적으로 원자력발전은 싼데 재생에너지발전은 비쌉니다. 그리고 어느 쪽을 하든 세금은 더 거둬야 합니다. 시민들이 모여서 토론한 다음에 재생에너지로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필요한 세금은 자기들이 기꺼이 내겠다고 했대요. 그렇게 해서 텍사스는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은 주가 된 거예요. 한마디로 시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죠. 시민들은 자긍심이 높아지고, 정치인들은 세금 걷자는 말 안하고 생색낼 수 있고, 대단히 좋은 방법이죠.
김종철 정말 현명한 방식이네요.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도 결국 그래서 생긴 거잖아요. 쓸데없는 국론 분열, 에너지를 낭비하지 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렇게 합리적인 시민의회를 어떻게 성사시킬 것인가가 역시 문제군요. 지금으로서는 열심히 설명·선전을 하고 시민운동 차원으로 확대를 시키는 것 말고는….
오현철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죠. 학자들은 좋은 사례와 자료를 번역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널리 알리는 것은 시민활동가들의 몫이 되겠죠. 이지문 선생님 등이 언론 등에서 활동을 많이 하셔서 학회에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아요.
김종철 학계나 언론계에서도 좀 본격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어요.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어느새 우리나라도 노동운동이 기세가 많이 꺾여버렸지만, 그래도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계속돼왔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결국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시키는 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 에너지를 승화시켜서 이제는 민주주의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운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지문 저는 시작점은 민주주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의 가치로 이해한다면, 저는 우리가 자유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투표할 자유,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 자유를 누리는 것만을 자유로 생각하는데, 원래 자유라는 개념은 자기통치의 자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번갈아가면서 지배를 하고 지배를 받는 것이 자유”라고 했어요. 지금은 일부 사람들만 국회의원 되고 일반 사람들은 항상 피지배자가 됩니다. 선거를 통해서 국회를 구성하는 한 일반시민들이 지배자 서클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가면 갈수록 더 돈 있고 조직 있고 사회적 명망 있고 텔레비전 나와서 얼굴 알려진 사람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죠. 평등하지 않습니다. 국회에 노동자, 농민, 일반 회사원, 하위직 공무원이 없잖습니까. 시민의회 방식은 누구든지 돌아가면서 대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자기통치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합니다. 시민의회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자유·평등에 부합됩니다.
김종철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시민의회는 지금으로서는 정당정치를 대신할 수 없겠지만,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여러 방안 중에서도 이만큼 매력적인 아이디어는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의 실현은 어렵다고 해도 시민의회를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 설정해놓느냐 아니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중요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충분히 정리되지 못했고 미진한 부분도 꽤 있지만, 시의적절한 뜻있는 좌담이 된 것 같습니다.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2017년 3월 31일, 녹색평론사 세미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