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세기 동안 사라졌던 제비뽑기가 오늘날 현실정치의 세계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아이슬란드의 사례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의 경제위기로 거의 파산상태에 빠졌고, 그 후 정부와 정치의 규칙을 바꾸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대규모 항의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2009년 4월에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2012년 3월과 4월에는 직무태만이라는 혐의를 받은 전 총리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2009년에는 추첨으로 뽑힌 1,200명의 사람들과 수백 명의 유자격자들로 구성된 시민의회가 시민단체들의 발의로 구성되었다. 시민의회가 구성된 것은 이 나라가 어떠한 가치 위에 재건되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시민의회라는 실험은 2010년 11월에도 되풀이되었다. 정부의 지원으로 구성된 이때의 시민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 두 번째 시민의회의 과제는, 첫 번째 시민의회의 성과를 이어받아 장래의 아이슬란드 기본법의 주요 원칙들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 후 곧 아이슬란드 국민이 선출한 25명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제헌회의가 출범하였다. 이때 선거에 출마한 523명의 후보자들은 모두 보통의 시민들이었다. 국회의원들은 후보 자격이 인정되지 않았고, 선거운동은 광범하게 불신을 받고 있는 기성 정치가들의 습관적인 방식을 답습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축소되었다.
2011년 봄과 여름 동안, 이 제헌회의는 신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작업을 하였다. 가장 주목할 혁신적인 점은, 국가기관들 사이의 권력균형을 위한 철저한 개혁,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 제고, 참여민주주의 내지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확대, 환경문제에 관한 보다 깊은 고려 등이었다. 헌법 조항들은 그 초안이 작성되는 대로 인터넷에 공개되었고, 시민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혹은 ‘플리커’를 통해서 논평을 하거나 제안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2011년 여름에 신헌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2012년에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되었다.
이 국민투표는 불과 몇년 사이에 아이슬란드에서 행해진 세 번째 국민투표가 된다. 나머지는 2010년 3월과 2011년 4월에 실시한 두 차례에 걸친 국민투표였는데, 이를 통해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은행의 실패로 인한 부채를 정부가 갚기로 한 계획을 거부하였다. 오랫동안 아이슬란드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복지국가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경제모델을 재조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실험은 지금 세계적으로 무작위 선출 방법이 사용되거나 제안되고 있는 수백 혹은 수천의 사례 중 오직 첨단적 예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경우에만 한정해보자. 메츠의 유럽―에콜로지―녹색당(EELV)은 그 지방 입법의회의 후보들을 제비뽑기로 선출했다. 국민운동연합(UMP)과 가까운 ‘정치혁신재단’은 지금부터 지방의회 의원들의 10%는 제비뽑기로 뽑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중도파 몽테뉴연구소는 건강관리시스템을 어떻게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시민합의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당과 제휴관계에 있는 장조레스재단은 ‘시민배심단’을 구성하는 문제에 대해서 숙고 중이다. 에콜로지단체 윌로재단은 제비뽑기에 의해 선출되는 제3의 입법원 창설을 요구하고 있고, 급진좌파에 가까운 아탁(ATTAC)의 집행위원들은 현재의 상원을 없애고 제비뽑기 방식으로 선출된 원(院)을 만드는 문제에 관해 토의하고 있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정치이론가들 사이에 무작위 선출 방식에 대한 논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17세기 혁명들 이후 근대 민주주의에서 어째서 추첨제가 사라져버렸는가? 그것이 어째서 지금 되돌아오고 있는가?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논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근대 민주주의에서 왜 추첨이 사라졌는가
공화주의 및 민주주의의 실천이 단 한 가지 절차에 매달리는 일은 별로 없었고, 오로지 선거에 집착하는 근대적 관행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예외적인 것이다. 베르나르 마냉은 근대혁명들과 더불어 정치의 장에서 제비뽑기가 왜 사라졌는지, 의문을 최초로 제기하였다. 그의 대답은 두 개의 관찰에 근거했다. 첫째, 근대 공화국의 창설자들은 선출된 귀족들이 지배하는 체제를 원했다. 따라서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적 방법이라고 말한 무작위 선출 방식을 거부한 것이다. 둘째, 자연법사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의의 이론’이 너무나 광범하게 퍼져 있어서 공식적으로 시민들에 의해 승인을 받지 않은 정치적 권위는 어떤 것이라도 정당성을 갖는 게 어려워 보였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논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특히 그것들은 급진적인 대의제 주창자들이 어째서, 몽테스키외와 루소가 그 민주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던, 추첨방식을 선호하는 주장을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주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답적인 ‘순수한’ 정치이론의 공간으로부터 내려와서 이러한 아이디어가 실제의 통치 기술, 도구와 장치들 속에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탐색해야 한다. 대표 표본(representative sample)이라는 개념은 21세기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익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행해져온 통계와 여론조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개념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진 것이다. 그 전에는 추첨과 대표성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작위 선출이 통계적으로 구성원 전체와 같은 특성을 가진 표본을 산출해준다는 아이디어는 그때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 표본에 대한 통계학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무렵의 정치평론가들이 거의 누구든 빠뜨리지 않고 지적했듯이, 규모 때문에 고대의 민주주의와 유사한 자치정부를 가지는 게 불가능한 근대 민주주의에서는 추첨제가 왜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그들은 제비뽑기를 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누군가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대표 표본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탓에 대의제의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다른 도구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의를 위한 미니―퍼블릭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많은 세계적 실험들에서 추첨제가 복귀하고 있는 현상은, 이미 여론조사를 통해서 얼마간의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대표 표본이라는 개념이 확산되어온 사실로 주로 설명할 수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전부 참가하여 토의·숙의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 오늘날의 실험들은 추첨제를 사용하여 대표 표본, 즉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일종의 ‘소우주’ 혹은 미니―퍼블릭(mini―public)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은 거기에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의견을 말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게 가능해진다.
원래 무작위 선출이라는 아이디어의 배후에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들 모두가 누구든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쓸모 있는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러한 고전적 이상은 현재의 다양한 사회적 실험들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나 중세 및 르네상스의 피렌체 등 도시들에서는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구성원들은, 통치를 하고 통치를 받는 역할을 번갈아 수행했다. 여기서는 무작위 선출 방법 이외에 공직자의 신속한 교체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방법이 허용하는 자치정부는 오늘날의 국민국가 차원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의민주주의는 이와 다른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미니―퍼블릭에 의존함으로써 선거에 의해 구성된 대표자들의 의견뿐만 아니라 다수 인민의 의견과도 다른, 대안적인 의견이 창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존 애덤스는 대표자들이 ‘다수 인민’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사고하며 행동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숙의민주주의를 제창하는 이론가들은 ‘대표자’들과 ‘다수 인민’ 사이의 통계적 유사성은 단지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미니―퍼블릭을 통한 의사결정에서는 토의·숙의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언제든 의견이 변경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변경 가능성이야말로 수준 높은 숙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가 된다. 이것은 숙의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방법을 창안한 제임스 피시킨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전국적인 선거인 명부로부터 무작위로 사람들을 뽑아 그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이들에게 주의 깊이 균형 잡힌 자료들을 제공하고, 소규모 그룹들로 나누어 집중적인 토론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현안에 관해 충분히 숙지토록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호 경쟁적인 전문가들과 정치가들을 향하여 질문을 할 기회를 준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며칠간에 걸쳐 이처럼 현안들에 대한 토의·숙의를 거친 다음의 참가자들에게 그들의 의견을 상세히 물어본다. 그 결과는 공중(公衆)의 숙고된 판단을 대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숙의공론조사의 목적은 이러한 토의·숙의 과정이 관행적인 여론조사의 배후에 있는 인식론적·정치적 사고와는 차별화된 것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관행적인 여론조사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주장들에 대해서 대부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형성된 막연한 인상을 통계적으로 모아놓은 것”임에 반해서, 숙의공론조사는 “현안이 되어 있는 문제를 보다 충분히 고려할 기회를 가질 때 공중의 생각이 어떠할지”를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정치적 정당화
많은 다양한 조합들이 있지만, 지금 몇몇 추첨제와 숙의민주주의적 방식들이 실험 중이다. 가장 오래된, 1970년대에 독일과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시민배심단’이다. 이것은 배심제 재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제비뽑기로 뽑힌 12명에서 수십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한두 주말 동안 적정한 절차 밑에서 내부적 토론을 행하고, 상충하는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토의·숙의를 하게 하는 장치이다. 전문가들은(때때로 배심단의 협조하에)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들―이들은 회의의 조직자들로부터 독립돼 있어야 한다―에 의해 선정이 된다. 배심단의 목적은 바로 그 회의가 소집된 이유인 공공정책의 현안에 대하여 공민적 권고를 하기 위함이다.
이 시민배심단과 유사한 것이 ‘시민합의회의’이다. 이것은 덴마크에서 1980년대 말에 개발된 것으로, 과학기술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시킨이 1970년대에 시도한 숙의공론조사는 규모가 크다는 점(추첨으로 수백 명의 시민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킨다) 이외에 최종적으로 합의가 아니라 질적으로 높은 토론을 통해 충분히 숙고된 여론을 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다른 한편, 아이슬란드식 시민의회―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2004년에 열렸던 것과 같은―는 숙의공론조사만큼 규모가 클 수 있는데, 현안에 대한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국민투표를 제안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갖는 정당성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제비뽑기에 의해 구성된 미니―퍼블릭이, 그 숫자나 전문적 지식 때문에 정당화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역사적 선례나 철학적 논리를 고려하면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 보다 숙고된 정치
현재의 숙의민주주의적 방법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가정, 즉 ‘보통의’ 시민들이 좋은 조건 속에서 행한 토의 및 숙의는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가정은, 이 문제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외부 관찰자들이 행한 경험적 사회과학 연구로써 폭넓게 확인되고 있다. 미니―퍼블릭의 의견이 대중적 여론보다 더욱 ‘합리적’이라고 판명된다는 사실이 미디어를 통해서 널리 보도가 된다면, 그 의견은 대중적 여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정치제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광범하게 불만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것은 ‘극장정치’와 정치가계급 자기들만의 정치에 대항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가계급이 시민들에게 보다 더 책임을 지도록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시민참여에 의해서 질적으로 높은 토의·숙의뿐만 아니라 정책결정자들과 시민들 사이에 보다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 사회적 경험의 다양성
그 외에 보통의 시민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키는 이러한 숙의적 장치는 인식론적 의미에서 대의제 정부나 ‘현인들의 회의’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 즉, 훌륭한 토의·숙의 과정은 다양한 관점을 포함하며, 그 결과 폭넓은 주장들이 고려되고, 토론이 보다 포괄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보자면 무작위로 뽑힌 미니―퍼블릭은 전문가들만의 위원회나 정치지도자들의 회의보다 사회적으로―따라서 인식론적으로도―훨씬 더 풍부하다는 장점을 갖는다(물론 전문가들이나 정치가들의 회의는 순전히 자발적으로 모인 참가자들이나 이미 조직화된 시민사회 출신 인물로 구성된 회의보다는 더 장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니―퍼블릭의 도입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 급진적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
세 번째 근거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시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의제 정부의 옹호자들은 최선의 정치시스템은 진정하게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임에 틀림없지만, 그러한 시스템은 대규모 대중사회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의제 정부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제도 중에서는 가장 덜 나쁜 것이라고 흔히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덜 나쁜 해결책은 무작위로 뽑힌 미니―퍼블릭으로 급진적 민주주의, 즉 인민자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치야말로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 즉 모든 시민은 누구든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평등한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니―퍼블릭의 사회적 구성은 실제 인민의 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불편부당성
네 번째, 광범한 역사적 경험에 토대를 둔 무작위 선정 미니―퍼블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는 그 불편부당성이다. 선거로 뽑힌 공직자들, 전문가들, 조직화된 이해관계자들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강한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와 반대로, 무작위 선정 방법은 옹호해야 할 어떠한 이해관계도 갖지 않은 비당파적 인물들을 고르게 포함하고 있고, 그들은 토의 및 숙의 절차에 의해서 공공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판단을 내리도록 장려된다. 이 점은 환경문제나 미래세대의 삶의 조건을 보존하는 문제를 포함한 장기적인 현안들을 다룰 때 특히 높은 가치를 갖는다.
숙의민주주의가 처한 어려움
그러나 무작위 선출 방법은 여러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 토의·숙의 능력과 사회적 불평등 문제
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 속에서 의견 발표가 어떻게 평등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발표에 능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문화자본의 유무에 의해 보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주어진 절차 속에서 행해지는 토론이 해당 전문가들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숙의민주주의 절차는 불균형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숙의민주주의의 잠재성을 음미하려면, 우리는 종전에 침묵을 하던 사람들이 소규모 분과별 토의 그룹에서 어떻게 활발히 발표를 하고, 전체회의에 와서는 보다 큰 발표력을 발휘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 토의·숙의가 개인들에게 끼치는 영향
이 미니―퍼블릭에 참가하는 개인들에게 토의·숙의 과정이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게 있을까? 숙의민주주의의 이론가들은 흔히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 조건에서 시민들은 보다 논리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의 힘으로 서로서로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입증하기 어렵다. 토의·숙의 과정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가는 대부분 ‘블랙박스’이다. 심리학자들은 심지어 소규모 토론은 기왕의 의견 차이들을 강화하고 타협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연구실에서의 실험에 근거한 이러한 논리가 실제의 미니―퍼블릭 사례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토의·숙의 과정이 개인들에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는―갈수록 이 문제에 관한 문헌은 증가하고 있지만―아직 입증된 게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 책임의 문제
이 새로운 실험은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분명히 제기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직자로 뽑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선거로 공직자를 선출하는 제도에서도, 선출된 공직자들은 선거 때의 공약을 반드시 존중하지는 않더라도 행정적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 법적 책임을 졌고, 또 재선을 노린다면 유권자들의 요구에 응답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배심원들은 누구에게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져야 하는 것일까?
◆ 토의·숙의와 공개성
숙의공론조사는 공개적으로 행해지지만, 시민배심이나 시민합의회의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는 비록 최종적 판결은 공개적으로 이뤄진다 하더라도, 토의 및 숙의 과정은 전적으로 비공개된 장소에서 열린다. 존 엘스터는 회의가 공개될 때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더 단단히 집착하고 수사(修辭)를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 논리에 대항하여 다른 연구자들은 배심원들이 로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개성이 유용하다고 주장해왔다. 하버마스나 칸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개성은 토론의 강점에 속한다. 왜냐하면 공개성은 발표자들이 일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도록 자극하고, 혹은 적어도 자신들의 주장이 일반적 이해관계와 어떤 점에서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공개성은 폐쇄된 밀실에서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거래’를 방지하게 해준다. 어떤 경우든, 비공개 회의는 일반 공중의 참여를 보다 어렵게 만드는 단점을 갖고 있다.
◆ 미니―퍼블릭에 의한 의견과 대중적 의견
숙의를 위한 미니―퍼블릭은 원래 관행적인 여론에 맞서서 보다 충분한 정보를 근거로, 합리적으로 만족할 만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의견에 도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대중적 의견과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몇몇 핵심적인 실험들에서 배심원단의 권고가 거부된 사실은 이것이 단순히 추리에 끝나는 위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증명한다.
◆ 사회적 변환의 문제
미니―퍼블릭은 어떻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라는 아이디어는 이전 시대의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며, 오늘의 상황에 인위적으로 적용해보려는 아이디어이다. 이러한 실험들은 오늘날 오로지 정치·행정 당국의 의지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이 권력구조를 진정으로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없다. ‘변화’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저항이 막강한 세계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내자면, 소소한 모임들에서의 합리적인 토론 대신에 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불의(不義)와 위험들에 맞선 분노와 대중봉기를 꾀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민주적 대의제의 변화
위와 같은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추첨제 실험들은 민주주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시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2004년의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시민의회를 보자. 그것은 이 캐나다 지역의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제안을 두고 열린 회의였다. 이 시민의회의 조직자들은 이해상충을 방지하려면 선거법 개혁이라는 문제를 정당들 이외의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느꼈다. 1년 동안의 회의 끝에, 시민의회는 종래의 (소수파를 무시하는) 소선거구제를 청산하고 보다 비례적 균형이 맞는 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안된 법률안은 2005년 5월의 국민투표의 재가를 받도록 제출되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수상의 자문역이자 시민의회 발의자인 고든 깁슨은 이 혁신적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우리는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 둘 다에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고 있다.…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이 두 가지 의사결정 방법은 전문가들과 특수 이해관계자들에 의해 고도로 영향을 받고 있거나 혹은 거의 포박되어 있다. 숙의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는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패널들이 시민 전체를 대표하여 공적 이해관계가 토론의 마당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선출하는 전통적인 대표자들은 다수결에 의해 선택되어, 상당 기간 동안 (직업적) 정치가로서 무제한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우리가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대표자들은, 보통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특정된 제한적인 목적을 위해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하기 위해서 무작위로 뽑힌다.
이러한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리는 근대 민주주의가 혼자서 대의제 정부―즉 정기적인 선거를 통한 대표자의 선출, 그리고 선거구민의 이름으로 이들이 갖는 독점적 의사결정권―로 환원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는 또한 독립적인 사법제도, 전문가 위원회들의 활동, 국민투표와 국민발의권 등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들도 병행해서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사회적 네트워크가 활발해지고 대중정당들의 수명이 끝나가고 있는 지금, 민주적 정당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래에는, 역사를 통해서 대부분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적 실천에서 그래왔듯이, 다시금 제비뽑기가 선거와 결부되는 게 바람직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이 혁신적 실험이 진실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법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하며, 지도자들의 정치적 의지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 아이디어는 선거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를 의미 있는 규모로 도입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더 풍부하게 하자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경험은 이 무작위 선출이라는 요소가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잠재적 힘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제도를 그대로 두고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길을 걸어온 그리스의 경우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 세기의 정치제도를 주변적으로만 수정하고 21세기의 정치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금융자본주의에 의한 크나큰 위기와 종래의 생산모델로 인해 우리가 처하게 된 명백한 난국을 고려할 때, 그리고 제도권 정치가 엄청난 불신을 당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생각할 때, 현재와 같은 시스템을 고수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김정현 옮김)
이 글의 출처는 Books and Ideas (2012. 6. 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