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말이 되면 《녹색평론》은 창간 30주년을 맞는다. 《녹색평론》 역시 여느 살아있는 매체와 다름없이 강조점이나 분위기에서 미묘한 변화를 겪어왔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확고한 목표를 견지해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풀뿌리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자연적 토대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을 통해서 소수 기득권층의 배타적인 이익실현을 도모할 뿐인 이른바 ‘세계화’니 ‘경제성장’이니 혹은 ‘선진화’니 ‘진보적 기획’이니 하는 권력엘리트 중심의 논리를 거부하고, 진정으로 인간다운, 지속가능한 공생(共生)과 자치의 논리를 모색하는 데 기여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의도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이 사실이 환영할 만한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기로 하고, 이대로 가면 빙산에 부딪쳐 좌초하고 말 것이라고, 광야의 예언자처럼 홀로 외로이 부르짖을 필요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저 앞에 나타난, 빠른 속도로 형체가 커지고 있는 빙산은 이제 정직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볼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산업자본주의 문명의 파멸적인 영향을 멈추는 일은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과제가 되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행성 위에서 과연 인간다운 미래가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실존적인 문제이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인간다운, 지속가능한 공생과 자치의 원리를 온몸으로 껴안는 대신 지구공학이라는 기술적 ‘해결’에 목매면서 배의 항로를 급선회하는 일에 머뭇거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산업문명체제 자체의 ‘어둠’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좀더 실용적 견지에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사회가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집단적 결정을 내리는 메커니즘인 민주주의가 실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년에 많은 연구자, 활동가들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민의회, 시민배심제, 숙의민주주의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좀더 진실에 가깝게 표현한다면, 필요한 일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아니라 과두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다. 1981년부터 2002년 사이에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1,800건의 정책을 검토한 결과, 보통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흔적은 거의 전무하며 공공정책에 대해서 엘리트들이 (개인적, 집단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사실을 밝힌 2014년의 연구(Martin Gilens & Benjamin I. Page)는, 현대국가의 민중들이 몸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자료일 뿐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과거의 많은 문명이 붕괴한 이유는 실존적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들이 옳은 결정을 내릴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문명의 몰락》(2005)). 그런데 과두체제는 한 사회가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킨다.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 기득권층이 작동불능 상태가 된 낡은 시스템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당사자이므로 사회가 합리적인 경로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명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기술적 수단을 갖고서도 붕괴해버린 역설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탄소문명도 과거의 실패한 사회들이 경험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치명적인 악순환에 갇혀 있다. 게다가 갈수록 줄어드는 자원과 심화되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위기상황에서 과두세력은 화석연료 시대의 기득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고, 그 결과 경제위기와 사회갈등은 고조되고 어쩌면 전쟁까지도 회피하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녹색평론》이 특별한 긴박감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현실인식 때문이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도 에코파시즘의 유혹에 저항하기 어려운 조건이 착실하게 갖추어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전면적인 실존적 위기―빙하들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녹고 있고, 해수 산성화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고, 대양은 플라스틱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고, 생물다양성 역시 놀라운 속도로 축소되고 있고, 기후변화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통과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앞에서 다른 모든 문제는 다만 하찮게 여겨진다.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설득하고 조율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 위기감과 절박함은 진정한 해결책보다 미봉책에 불과할지라도 기술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해법’에 매혹되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큰 것이다. 그러나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을 대가로 포기해도 좋은 인간사회의 가치들이란 어떤 것일까.
생태적 위기가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위기, 2008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세계경제의 붕괴상황에서 진보세력은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이후 연이어 일어난 민중봉기(아랍의봄, 인디그나도스 및 월가점령운동)들이 구체적인 비전을 갖고 세계적 차원의 혁명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한편, 전 세계에서 극우세력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상스러운 가치를 옹호, 선전하면서 개인주의, 각자도생, 폭력, 증오, 인종주의, 여성혐오 등을 유포하고 민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기성체제 대 구원자’라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고, 기성 정치인, 엘리트, 시스템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해줄 영웅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성공적으로 부상했다(미국 트럼프, 프랑스 르펜, 이탈리아 살비니, 헝가리 오르반, 브라질 볼소나로, 필리핀 두테르테). 그러나 파시즘은 그 속성상 바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배반한다. 즉 파시즘은 철학적으로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코 민중의 삶의 개선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태생적으로 기업가·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하고 민중의 삶을 더욱 도탄으로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세계가치설문조사(WVS)에 따르면, 민주주의 정치체제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한국사람들이 1998년에는 대략 17%에 불과했으나 2020년 조사에서는 30%까지 늘어났다. 우리의 현실은 대공황과 파시즘으로 얼룩진 1930년대에 못지않은 긴박한 상황이다. 아니 실은 더 나쁘다. 지구 생태계의 수용력도, 자원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인공지능 등 기술혁신이 인간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위협하는 또하나의 요인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개인적인 행동개선이나 기존의 정치·경제제도 아래에서 부분적인 개량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삼고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지점에 도달했다. 민주주의는 물론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빙산을 보면서도 배의 항로를 바꾸지 못하는 기가 막힌 오늘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원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민주주의밖에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인다. 이 행성 위에서 과연 인간다운 미래가 계속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지 편집실은 《녹색평론》의 한 세대를 결산, 평가한다는 취지로 창간 30주년을 맞는 2021년에는 그동안 《녹색평론》이 중점적으로 논의해온 주제들 중에서 한 가지씩을 선택해서 매호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첫 번째로 민주주의 특집호를 두려운 마음으로 펴낸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