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 지음
《토종씨앗의 역습》(들녘, 2017년)
“왜 토종씨앗 운동을 하나요?” “자유롭게 살려고.” 질문한 사람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답변일지 모른다. 내가 농부가 된 이유다. 자본주의 상품사회에서 ‘나’를 상품으로 포장해서 시장에 팔지 않으려면 돈이 중심이 되지 않는 삶, 생태순환적인 생활과 농사가 답이었다. 순천 할머니들은 농산물을 팔러 장에 갈 때 “돈 사러 간다”고 말한다. 돈도 별다르지 않은 상품으로 생각한다. ‘나’가 주체가 된 어법이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씨앗 수집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수집을 쉰다면? 시간은 할머니들을 붙들지 못해 이분들이 요양원으로 가시거나 돌아가시면 씨앗을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 그들의 씨앗은 사라진다. 매년 토종씨앗 수집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10월 초, 코로나가 주춤하던 틈을 타 경기도 광주와 평택, 전남 담양을 매주 3일, 모텔에서 숙박을 해가며 마을 곳곳을 탐문하여 ‘왜정시대’부터 대물림된 재래종 감자를 비롯해 120품종 800여 점을 수집했다. 십수 년의 경험 덕분에 나는 토종씨앗이 있을 법한 집과 할머니를 얼굴과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는 관상쟁이가 되었다. 항상 그러하듯이 할머니와의 짧은 대화에서 씨앗철학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씨앗은 나누라고 있는 거야”, “씨앗을 많이 퍼트려줘” 하며 많든 적든 잘 갈무리된 씨앗을 아낌없이 내준다. 몸에 체현된 나눔의 철학자들이 건네준 씨앗을 통해 소멸해가는 ‘토종씨앗의 역습’은 진작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는 1대 잡종이 개발되어 종자시장이 커지게 된다. 1973년에 제정된 종묘관리법으로 종자회사들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법으로 종자를 생산, 관리하는 규정을 강화하여 충족시키지 못하는 종자회사는 수입종자의 판매를 할당받지 못하고 단순한 종묘상으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종묘상에서 예전처럼 농가의 우수한 토종 채소를 판매하던 일이 중단되고 1대 잡종을 취급하게 된다. 그러한 1대 잡종은 아직 품종의 수와 양에서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고 종자회사들의 주요 수익은 신품종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것보다 일본에서 채소 씨앗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데서 나왔다.…1980년대 산업화가 진전되고 본격화된 시설재배의 확산은 채소 씨앗의 판매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한다.…1991년 종자시장의 완전 개방으로 채소 씨앗의 수입이 자유화된다. 1995년 종자산업법이 개정되면서 국제적 추세에 따라 신품종을 개발한 주체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전국에서 재배되던 자급 위주의 지역적응이 된 토종의 멸종”이 시작되고 1960년대를 거쳐 “생산량 증대 목적”으로 “벼농사 중심의 단작농업이 확대”되고 “강원도 산간지역의 지역별 식량 위주 정책이 포기”되면서 1,200품종이나 되는 재래종 볍씨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도시 근교의 상업농이 발달하자 육종된 일본 채소 종자가 집에서 심어 먹던 토종 채소 씨앗을 몰아냈다. 198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도시에서는 외식문화가 번창하고 농촌에서는 농사방식과 씨앗이 변했다. 정부의 신품종 보급은 씨앗을 받아 농사를 짓던 농촌의 모습을 일거에 날렸다. “업자가 오이나 당근 씨앗 한 통을 가지고 와서 이걸로 농사지으면 밭떼기로 사가겠다고 했어. 그 돈을 보태 이 집을 살 수 있었어. 돈이 들어오니까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심은 거야.” 도시의 사람들이 매주 주택복권을 사와 일회 홈런을 날리는 꿈을 꾸듯, 농촌도 일회 대박을 기대하며 씨앗을 일회용으로 모조리 바꿨다.
“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옛날 팥이야.” 80~90대 할머니들이 토종 팥을 내어주며 하는 말이다. 친정 엄마들은 부부관계가 찰지라고 찹쌀을, 액을 물리치고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팥을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다. 현재 보급되는 굵고 빤질빤질한 개량 팥에서는 친정 엄마의 소망을 담은 주문(呪文)은 찾아볼 수 없다. 요즘 도시인들이 먹는 오이와 애호박은 늙지도 않고 씨앗도 받을 수 없다. 공장이나 회사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죽도록 일을 하지만 늙기도 전에 용도폐기되는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 대붕의 시야를 가지지 않고 옛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즉자적인 편리와 풍요를 추구해온 결과 뭇 생명의 지속성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토종농사와 기후변화
유전자변형 작물의 개발과 보급은 1차 종자회사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사업이다. 거기에 농민소득을 운운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을 앞세우는 말일 뿐이다.
자연법칙에서는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유전자변형 작물이 식량문제와 기후변화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모두 거짓말이다.” 유전자변형 작물은 세계적으로 재배되어 식품에서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토종씨앗의 역습》 저자는 “유전자변형 식품의 위해성만이 아니라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는 재배방식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유전자변형 종자는 회사의 이윤이 목적이므로 씨앗을 사서 쓰는 것 자체가 유전자조작 종자를 확산시키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농사를 직접 하는 나의 경험으로도 더 크고 더 많은 생산량, 즉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한, 유전자조작 식품의 확산은 막을 수 없다.
2018년엔 극심한 가뭄이 있었고, 2019년에는 작물의 성숙기와 수확기에 잦은 태풍이 있었으며, 2020년에는 봄 같은 겨울이 지속되었고, 6월에는 때아닌 우박이 내렸으며, 8월부터 50일 이상의 잦은 비와 폭우가 있었다. 참깨는 종자조차 거둘 수 없었으며 고추와 콩 가격도 올랐다. 세계적인 기상변이로 인해 식량을 수출하는 국가에서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곡물 수출 금지령을 내렸고,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에서는 식량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식량자급을 소홀히 한다면 당연히 식량위기가 온다. 그래서 식량과 종자 주권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식량과 종자 주권을 하위로 두는 대표적인 국가 중의 하나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팔아서 식량을 사오면 된다는 생각을 해온 지 오래다.
토종농사를 짓는 나로서는 기후변화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토종씨앗의 메주콩은 수백 가지다. 내가 사는 곡성에서는 큰 콩알보다 작은 콩 수확량이 괜찮았고, 고창 회원 농가에서는 작은 콩보다 알이 큰 콩이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푸른 콩류는 고창이든 곡성이든 수확량에는 변함이 없었고, 일조량과 토양에 의한 변형―지역 적응성―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곡성에서는 작은 콩을, 고창에서는 큰 콩을 재배하면 된다. 지역에 맞는 콩을 심으면 된다. 잦은 비와 수확기의 가뭄으로 토란과 생강이 예년보다 수확량이 증가되었다. 토란 값이 뚝 떨어졌다. 예부터 토란은 감자나 고구마와 같은 구황작물로 쓰였다. 토란은 탄수화물이 많아 찌고 굽고 갖가지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다. 올해 종자조차 건지기 어려웠던 참깨는 먹지 않아도 인간의 에너지원에 탈이 없다. 잦은 비와 일조량 부족에도 잘되는 작물이 있고, 가뭄에 잘되는 작물이 있으니 우리는 음식의 변화를 꾀하면 된다. 기후는 변하는데 소비하는 음식을 바꾸지 않으면 기후변화는 인간에게는 ‘위기’다. 자연이 변하면 우리의 몸도 변하고 음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지역과 농가마다 선호하는 종자가 달라 다양성이 보존된 토종씨앗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상업적 종자만을 고집하는 것은 ‘위기’를 초래한다. 기후변화는 현대농업의 관행을 좇아온 농민들에게 토종씨앗의 다양성과 전통적인 농사법을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토종씨앗의 이름만을 보더라도 매우 재미난 것들이 많다. 우리의 식생활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원산지에 가까워 엄청난 다양성을 보이는 콩을 예로 들어보자. 그 색에 따라 흰콩, 노란콩, 밤콩, 검정콩, 푸른콩, 불콩, 먹태가 있고 무늬에 따라 아주까리콩, 선비잡이콩, 눈까매기가 있고 크기에 따라 한아가리콩, 생알콩, 쥐눈이콩, 나물콩, 자갈콩이 있고 농법에 따라 쉰날거리콩, 유월콩, 논두렁콩 등이 있다. 이렇듯 토종 콩의 이름에만도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생태지식이 담겨 있다. 우리가 쓰는 말에도 담겨 있다. 조바심을 낸다는 말은 조의 이삭을 떠는 일의 어려움에서 나온 말이다.
토종씨앗에는 해당 지역과 농부의 언어가 살아있다. 똑같은 모양의 동부를 화성에서는 개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생겼다고 개파리동부, 평택에서는 지저분하게 생겼다고 동냥치동부, 순천에서는 밭 가장자리에 심는다고 밭갓동부라고 한다. 홍천에서는 울타리에 심는 강낭콩을 줄콩, 전북에서는 울콩이라 부른다. 전라도에서는 강낭콩도 동부, 돈부라고 부른다. 토종씨앗에는 획일적인 표준어가 없다. 지역과 농가의 정서가 씨앗 이름에 살아있다. 토종씨앗 할머니들은 교잡을 “벌이 역사한 것이제”라며 자연의 이치를 시적인 감수성으로 표현한다. 멘델의 유전법칙을 배우지 않아도 씨앗을 받다가 퍼렁콩과 검은콩을 섞어 놓은 선비잡이콩 같은 것이 나오면 선발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아 씨앗의 다양화를 꾀하여왔다. “상처에 늙은 호박을 짓이겨 넣었는데 나았어.” “수수 알갱이는 먹고 빗자루를 만들어 쓰제.” 토종 볍씨는 벼 알갱이는 먹고 볏짚으로 오만 가지를 만든다. ‘열일하는’ 토종씨앗을 제쳐두고 이윤의 극대화를 우선으로 한 일만 하도록 개량시킨 것이 현대 종자들이다.
전통적인 농부는 본능적으로 육종가, 과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요리사, 치료사, 공예가, 소목, 대목수이며 시인이자 소리꾼인 예술가이다. 그러나 현대농업은 그들의 본능적인 능력을 분절시켜 엘리트 전문가에게 주고, 오로지 돈에 환장한 다수확 노동자의 역할만 강요한다. 토종씨앗과 전통적인 지혜를 박물관과 도서관에 사장시켜 놓고, 농부들의 살아있는 무한한 상상력을 차단시켰다. 왜 농부들의 다재다능한 능력을 갈가리 찢어 헤쳐 놓았을까?
씨앗에서 시작되는 혁명
식물의 씨앗을 갈무리하여 저장하고 재사용하며 공유하고 개발하는 농민의 관행에 대한 권리를 육종가의 권리와 충돌하는 일 없이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문제이다. 농민의 씨앗과 관련한 관행들은 수천 년에 걸치는 농경활동을 통해 작물의 유전자원을 보존하고 혁신을 이루었던 근간으로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이다. 농부권은 이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다.
종자산업법을 필두로 국가의 농업 관련 법제도는 농부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권력과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전문가’들에게 넘겨주었다. 생태순환적일 수밖에 없는 농부를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만들었다. 된장을 만들고 싶어도 식품허가를 받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다. 국가 농업시스템은 농부로부터 수족을 떼어내고 농가소득을 고민해주는 척한다. 대량생산의 공장노동자처럼 수확량만을 좇도록 하니 종자는 종자회사가 추천하는 종자를 매년 사다 써야 하고, 기계로 밭을 매년 갈고, 과도한 퇴비와 제초제, 농약을 과다 살포하는 환경파괴적인 농업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대규모 농사를 해도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여우가 가져가는 구조다. 국가가 농부권을 보장해줄 리 만무하다. 너무 절망스런 얘기일까? 아니다.
국가가 내동댕이쳐버린 대대손손 토종씨앗을 꼬깃꼬깃한 약봉지에 담아 ‘아오씨’, ‘갓씨’, ‘씨가시’라고 겨우 깨친 한글로 써서 보관하고, 동네에 나눠 주고, 허리가 반쯤 휘어져도 자식에게 주려고 해마다 심어오면서 나눔의 철학을 실천해온 할머니들이 살아있고―때론 할아버지들이 그 역할을 한다―그 씨앗과 지혜를 전달받은 씨앗의 자식들인 우리가 ‘토종씨앗의 역습’을 이미 시작하지 않았는가? 내가 씨앗이지 않은가? 법제도가 없다고 농부권이 사라지지 않는다. 씨앗의 권리를 스스로 실현하면 된다. 농부가 육종가다. 전통적으로 농부가 가졌던 능력을 우리 스스로 회복하면 된다. 현지 보전이란 그런 것이다. 토종씨앗 할머니는 “씨앗이 밑질까 봐” 씨앗을 조금씩 남겨둔다. 만약 밑져버리면 이웃에서 얻어 심는다. 나눔과 공유의 철학은 농부권을 실현하는 일이다. 법제도화를 외면할 순 없지만 우리 스스로 변하면 저절로 농부권이 법제화되리라. 수많은 도시인들 식탁에 자가채종 농산물이 오른다면 어떤 농업인이 외면하겠는가?
농부권은 농부만의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권리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생명을 유지하는 밥상(과 간식)은 씨앗이고, 농부가 다루기 때문이다. 당신이 먹는 밥 한 그릇에 몇 개의 씨앗이 있을까? 쌀 한 톨은 수억만 개를, 우주를 만드는 씨앗임을, 씨앗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밥상머리 교육을 하면 될 일이다. 너무 많이 먹어 병들고 너무 많이 소비해 쓰레기가 넘쳐나는 세상, 지나친 탐욕으로 코로나19의 세상을 맞이한 것이니. 토종씨앗이 소멸한 이유를 알면 토종씨앗과 농부권을 회복하는 길은 간단하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되는 일이다.
기후 및 생태환경 변화, 포스트코로나, 정치사회 등 미세하게 얽혀 맞물려가는 거대한 질서를 막을 수 있는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니 절망이 앞선다. 너무 쉬운 방법이 있다. 내가 변하는 것이다. 씨앗의 본능, 생명의 지속성과 다양성. 각각의 씨앗이 다양한 기후에 적응해서 지상에 퍼져 나가듯이, 내가 먼저 자유의 씨앗이 되면, 바이러스처럼 급속하게 퍼져 세상이 변하리라. 늘 그래왔듯이 ‘나’는 오래된 미래, 토종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