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뉴스가,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까지 휩쓸었다는 뉴스가 연일 들려오는 와중에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에 관해 글을 쓰려니 가닥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머리 한구석이 반짝했다. 신종 전염병을 옮기는 병원체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이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바이러스와 기생충. 둘 다 숙주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켄 로치와 봉준호의 영화 또한 접점이 있었다. 둘 다 신자유주의체제하에서 스러져가는 가족 서사다. 중국 우한―한국 서울―영국 뉴캐슬이 즉각 연결됐다.
5년 전 메르스 사태 때도 그랬지만, 중국 대륙 한복판에서 발생한 감염증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무생물도 마찬가지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문제는 인류를 구원할 저 ‘오래된 미래’가 유독 신종 질병이 나타날 때 부정적으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하고 외출하면서부터 타인들이 잠재적 보균자(무증상 환자)로 보인다. 지하철이나 버스, 시장, 극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가 바이러스 소굴처럼 여겨진다.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던, 아니 인지할 필요조차 없었던 타인들이 지나치게 또렷해진다. 만인이 만인의 연결을 의식하되 서로를 배제하는 이상한 ‘초연결사회’다.
초연결사회라는 말의 기원은 불교 화엄사상(인드라망)까지, 더 멀리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최근 저 단어가 놓이는 자리는 부처님이나 토템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다. 정보통신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이나 학자들이 퍼뜨린 말이다. 냉장고 한 대 값을 상회하는 스마트폰이 전 세계를 ‘공통의 현재’로 만들어 놓았다.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 어디서든 접속하지만 결속은 하려 들지 않는다. 죽어라고 검색은 하지만 사색은 내켜하지 않는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와 봉준호의 〈기생충〉에서도 디지털 단말기가 중요한 매개 역할을 담당한다. 초연결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켄 로치부터 만나보자.
블레이크의 혈연 같은 리키
켄 로치 마니아는 잘 아시겠지만 〈미안해요, 리키〉(2019)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후속작으로 보인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견이다. 반세기 넘게 쉬지 않고 활동해온 켄 로치의 영화세계를 일별하다 보면(그의 영화를 다 보려면 두어 달 다른 일은 제쳐둬야 한다. 1967년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영화는 60편이 넘는다. 1년에 한 편 이상 찍은 셈이다) 분명한 일관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잠깐 연극배우로 활약하다가 1960년대 초 텔레비전 드라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부터 고통 받는 노동자 계층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니 그 초심이 이번 영화까지 이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전기공 출신이었기 때문일까. 성장기 때부터 노동계층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던 켄 로치는 1969년 요크셔 탄광촌에서 매를 키우는 소년의 좌절을 그린 영화 〈케스〉를 연출하면서 영국 좌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우뚝 선다. 하지만 1980년대 영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강력한 엔진을 자처하면서 켄 로치는 잠시 위축된다.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공언한 대처 정권이 검열까지 강화한 것이다. 약자 편에 서서 더 나은 사회를 꿈꾸던 그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200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켄 로치에게 두 번째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말 그대로 ‘사회 같은 것이 없는’ 신자유주의체제에서 극지로 내몰린 약자들이 어떻게 연대하고 인간이 어떻게 시민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지난해 은퇴를 거부하고 완성한 〈미안해요, 리키〉에서 83세 거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절망적이다. 리키는 블레이크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혹한 택배시스템에 대해, 자본의 또다른 숙주인 택배회사 중간관리자에 대해, 학교와 경찰(국가)에 대해, 그리고 신자유주의체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며칠 휴가를 달라고 하소연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만다. 블레이크보다 훨씬 무기력한 가장이자 남성이다. 국민이나 시민은커녕 인간으로서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평생 변혁을 추구해온 노 거장의 안타까운 반어법일까. 아니면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증거일까.
은퇴한 목수 블레이크를 따라가던 카메라에 견주면 이번에 택배기사 리키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드라마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탐사보도)에 가깝다. 블레이크만 해도 다른 극영화에 비해 드라마투르기가 약했는데 이번 리키에서는 아예 신경을 안 쓴 것처럼 보인다(〈기생충〉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배경음악도 없다. 음악의 힘을 빌리지 않는 영화는 거의 없다. 음악으로 현실을 희석시키지 않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처럼 켄 로치 영화는 극사실주의에 가깝다. 다양한 극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 메시지를 직접 전한다. 다른 영화들이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를 적극 활용한다면, 그는 직설법을 선택한다. 우회하지 않고 단도직입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첫 장면부터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검은 화면에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블레이크가 사회복지사(국가) 앞에서 난감해했다면 리키는 택배회사 관리자(기업) 앞에서 당혹해한다. 리키는 건설 현장, 배관, 목공, 무덤 파기 등 그간 안해본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실업수당은 받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런 리키가 가족을 위해 새로 선택한 직업이 택배기사다. 택배란 무엇인가. 대중(대량) 소비사회의 말초신경이다. 택배는 유통 경로의 맨 끝에서 소비자와 대면한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정확히 배달해야 한다. 이 단순한 규칙을 어기면 기업과 소비자 양쪽에서 돌이 날아온다.
리키에겐 아내와 두 자녀가 있다. 아내는 방문 요양보호사이고, 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문제아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착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하다. 이 가족에겐 셋집 탈출이 급선무다. 아이러니하게도 집 없는 부부가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집을 구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리키는 아내의 차를 팔아 택배용 화물차(밴)를 구입하고 일을 시작한다. 아내 애비는 버스를 타고 요양보호를 나간다. 리키가 주문자의 집 문전에서, 애비가 요양보호를 받아야 하는 독거노인의 집 안에서 당하는 수모는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거나 상상하는 그대로다. 리키는 간혹 무례한 소비자에게 대들기도 하지만 아내 리키는 요양보호 대상자들을 가족같이 대한다. 하지만 매일 밤 늪에 빠지는 악몽에 시달린다.
가해자 너머의 가해자
이윽고 시련이 닥친다. 아들이 끊임없이 사고를 친다. 광고판에 낙서(그라피티)를 하고,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급기야 물건을 훔치다 경찰에 체포된다. 아들이 학교에서 정학을 당자자 부자지간에 금이 간다. 리키가 아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아들은 집을 나가버린다. 설상가상으로 리키가 폭행을 당한다.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없어 화물칸에 빈 생수병(오줌통)을 넣고 다닐 지경인데, 어느 날 화물칸 문을 열고 소변을 보는 사이 깡패들이 달겨든다. 리키는 바닥에 쓰러진 채 마구 짓밟힌다. 거기까지만 해도 견디기 힘든 불행인데 깡패 중 한 명이 리키의 오줌을 피범벅이 된 리키 얼굴에 부어버린 것이다. 폭력 중 최악의 폭력이 폭력을 당하는 자로 하여금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차 뒤에서 용변을 보는 행위 자체도 스스로 자괴감이 드는 것인데 난데없는 뭇매질에 자기 오줌까지 뒤집어썼으니, 리키는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거기가 맨 밑바닥이 아니었다. 황급히 아내가 달려오고 부부는 응급실로 향한다. 병원에서 남편이 택배회사와 통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내는 전화기를 낚아챈다. 누구보다 심성이 고운, 그 누구에게도 험한 소리를 하지 않던 아내 애비가 파손된 기계 값을 치러야 한다는 택배회사 관리자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부부는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리키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밴에 오른다. 가족들이 뛰어나와 차를 가로막지만 리키가 정면을 응시하며 택배회사로 출근하는 데서 화면은 멈춘다.
이제 〈기생충〉이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이므로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다. 〈미안해요, 리키〉와 어떤 대목이 같고, 또 어디가 다른지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 영화는 공감과 연민, 연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신자유주의체제의 그늘을 조명한다. 켄 로치와 봉준호 감독의 문제의식에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브레이크 없는 성장제일주의가 낳은 불평등과 양극화에 초점을 맞춘다. 두 영화에 나오는 가족은 이른바 뿌리 뽑힌 존재들이다. 생활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허덕이는, 중심(위)이 아니라 변방(아래)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자들이다. ‘20 대 80’, 아니 ‘1 대 99’ 사회의 99에 해당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자기 집을 갖고 번듯한 직업을 갖기 위한 ‘신분 상승 사다리’가 없다.
뉴캐슬과 서울의 두 가족은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리키네가 셋집에서 벗어나려는 꿈은 기택이네가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안간힘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이 다르다. 리키네는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기택이네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부잣집(박사장네)을 접수한다. 이 과정에서 켄 로치가 유머를 배제했다면, 봉준호는 유머와 반전을 적극 끌어들인다. 당연히 〈기생충〉의 스토리라인은 복잡하고 다양한 극적 장치를 통해 속도감 있는 블랙코미디를 완성한다.
두 영화의 가족은 끊임없이 하강한다. 리키네가 택배회사의 반인간적 요구(규정)에 속수무책으로 몰락한다면 기택이네 가족은 박사장네 지하실에 숨어 살던 가정부 부부에 의해, 또 박사장네 아들을 위한 가든파티에 의해 추락한다. 〈기생충〉은 가진 자를 대변하는 박사장네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이분법 구도를 우회한다. 박사장네와 기택이네, 기택이네와 지하실 가정부 부부는 쉽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지 않는다. 자기 집이면서도 지하실이 있는지 까맣게 몰랐던 박사장네도 피해자일 수 있으며 기택이네 가족 때문에 졸지에 일터를 잃은 가정부 또한 피해자일 수 있다. 피투성이가 된 채 택배 일을 하러 차를 모는 리키처럼, 지하실에 숨어들어 구조 신호를 보내는 기택 역시 피해자다.
리키네의 가해자는 분명하다. 택배회사 관리자가 대변하는 ‘돈의 논리’가 일차 가해자일 것이다. 하지만 〈기생충〉의 가해자는 얼핏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엉킨 관계 너머에 일차 가해자가 숨겨져 있다. 영화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박사장네 집을 설계한 건축가가 진짜 가해자의 대리인일지도 모른다. 집주인 박사장네도 지하실이 있는지 몰랐으니 자기 집을 제대로 소유한 게 아니다. 반지하와 계단과 함께 박사장네 집 구조가 영화의 테마를 강화하는 공간적 서사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비극성이 여기에서도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저 ‘구조’를 알지 못한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구조 안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곤두박질치는 상황 말이다. 그렇다면 저 구조를 만든 누군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함께 오를 ‘거룩한 산’은?
이제 영화 밖으로 나올 때다. 바이러스나 기생충은 숙주가 있어야 살 수 있다. 다른 생명체 안으로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기생충이고 숙주인가. 리키네와 기택이네가 신자유주의체제의 기생충인가. 리키의 택배회사가 중간숙주라면 최종숙주는? 기택이네의 숙주가 박사장네라면 박사장네의 숙주, 또 건축가의 숙주는 누구인가. 범박하게 말해서 그 숙주가 전 세계를 장악하고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킨 신자유주의체제라면 그 체제에는 과연 숙주가 없는 것일까.
지금 북반구 선진국에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는 그 문명이 지구를 숙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새삼스런 지적이지만 신자유주의체제를 떠받치는 개발과 성장 제일주의는 지구 자원이 없으면 단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 지구는 태양에너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태양계는 우주와 교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것이 진정한 ‘초연결’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지식이나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명한 진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미키에게 함부로 ‘미안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기택 가족에게도 쉽게 공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지구적 감수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지구 피부에 빌붙어 사는 생명체라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채 이뤄지는 사회적 변혁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리키네 일가가 집을 구한다 치자, 기택이네 아들딸이 복권에 당첨돼 박사장네 집을 산다고 치자. 그러는 사이 지구 평균온도가 치솟아 대재앙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켄 로치와 봉준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너머에 있다. 우리의 변혁은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환은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나는 리키와 기택의 자녀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본다. 현재 수준의 삶의 방식, 현재 수준의 산업시스템, 현재 수준의 민주주의로는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가. 결국 민주주의다. 우리가 소비자에서 주권자로 거듭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우리가 국민을 넘어 시민으로, 그것도 세계시민으로 성숙하면서 민주주의를 쇄신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로마 평민들이 연대해 거둔 빛나는 성취가 그중 하나다.
로마 공화국 초기, 평민들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끊임없는 징용에 시달렸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삶의 질은 향상되지 않았다. 늘 빚을 지고 살아야 했으며 빚을 갚지 못하면 채무노예가 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민들은 광장에 모여 부채 탕감, 토지 재분배, 참정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지배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민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기원전 494년 ‘총파업’에 돌입한다. 로마에서 5km 떨어진 ‘거룩한 산(몬스 사케르)’으로 올라가 요구 사항이 관철될 때가지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급해진 원로원이 여러 경로를 통해 하산하라고 권유했지만 평민들은 굽히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이 손을 들었다. 채무노예를 해방시키고 부채를 탕감하는 것 말고도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호민관 제도를 신설했다. 이와 같은 비폭력 투쟁을 통해 평민들은 권리를 쟁취했고 로마는 보다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김종철, “몬스 사케르”, 〈경향신문〉, 2016년 9월 1일 자).
지금 우리가 손잡아야 할 ‘평민’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올라갈 ‘몬스 사케르’는 어디인가. 쉽게 희망을 가져도 안되겠지만 쉽게 절망해서도 안된다. 켄 로치와 봉준호의 영화가 우리에게 안겨준 불편함을 놓치지 않는 것이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 리키는 택배회사로 출근해서 어떻게 했을까, 기택의 아들딸은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가 과연 우리가 원한 것인지, 아니라면 우리를 바이러스나 기생충으로 만든 숙주가 대체 누구인지 따져보자. 우리가 누군가의 숙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문자답을 거듭하다 보면 문제의 근원과 마주할 수 있다.
낯익은 사람을 다시 보고 낯선 사람도 다시 보자. 온몸으로 지구의 살갗을 느껴보자.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과 서로 ‘나의 이야기’를 나누자. 이웃과 마주 앉아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마음껏 상상하자. 그래야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전환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는 길, 즉 기생이 공생으로 전환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숙주가 되는(환대하는), 그리하여 지구―숙주와 인간―기생충이 공생공락하는 미래로 가는 길은 그때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