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적인 민주주의란 것에 대해서 나는 좀 회의적이야. 우리가 사이좋게 잘 지내다가도 정치를 해보겠다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여러분, 쟤들 다 형편없는 친구들이니 날 뽑아주시오’라고 말하게 된다고. 그게 민주주의라는 거 아닌가. 이런 민주주의를 하니까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되는 거지. 그런 민주주의가 평화를 가져왔느냐 말이야.”
이것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생애 말기에 어떤 언론인과 가졌던 대담 중에 했던 말이다(《나락 한 알 속의 우주》(2016), 272쪽). 대의제 민주주의의 내재적인 결함을 매우 알아듣기 쉽게,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이 흥미로운 발언은 무위당 특유의 근원적인 평화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선거라는 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겨루는 치열한 싸움일 수밖에 없는 한, 그러한 철저한 배타성의 원리에 의거한 선거를 통해서 공생공존을 겨냥하는 정치질서가 과연 성립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무위당의 메시지는 누구든 잠깐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논리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때때로 그와 유사한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더라도 그것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선거란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고, 그 때문에 선거제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 제기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 돼버린 느낌이 없지 않다. 즉,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선거란 곧 민주주의의 대명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무위당의 말처럼, 실제로 선거를 치르다 보면 멀쩡한 사람들도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품게 마련이다. 언론은 선거 때마다 인신공격이 아니라 정책 대결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올바른’ 주장을 하지만, 그런 주장이 선거 때마다 빠짐없이 되풀이된다는 점이야말로 선거판에서는 그런 교과서적인 주장이 절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외적인 사례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꺾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하는 선거판을 통과하는 동안 자신의 적수에 대해서 평온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매우 특출한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출한’ 인간의 존재를 상정하는 정치가 정상적인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원래 ‘인민의 자기 통치’를 뜻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민주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예외적인 인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과 욕구와 생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생활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삶에 관한 결정권을 상호―주체적으로 행사하면서 공생공존의 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정기적으로 습관처럼 치르는 선거가 과연 이에 합당한 제도냐 하는 것이다.
선거, ‘엘리트들’ 간의 권력 쟁탈 게임
확실히 선거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드는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거의 문제는 그 점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선거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실은 평범한 생활인들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엘리트들’이다. 그 엘리트들끼리의 경쟁을 우리가 선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시장에서 소비자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선택하듯이, 선거판에서 유권자는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선택하여 그에게 표를 준다. 즉,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논리와 하등 다를 게 없는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현대의 선거민주주의인 것이다. 예를 들면, 상품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자본과 기업은 광고를 비롯한 온갖 술책을 쓰듯이, 선거판이라는 정치 시장에서도 후보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여서 소비자―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갖가지 책략을 구사한다. 그런데 선거판에서의 상품가치란 다름 아닌 ‘인지도’라는 것인데, 인지도를 좌우하는 것은 기왕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과 평판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름 없는’ 평범한 생활인―서민들이 선거판에 나선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선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기득권층 내부의 싸움, 즉 사회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들’끼리의 권력 쟁탈 게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기득권층의 영구적 권력 향유를 보장하는 합법적 메커니즘’인 것이다. 사실, 선거(election)라는 말 자체가 원래 엘리트(elite)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일찍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선거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다면, 선거는 벌써 오래전에 (지배층에 의해) 불법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크 트웨인의 말은, 예컨대 차베스나 모랄레스 혹은 호세 무히카 등의 급진적 정치가들이 선거에 의해서 집권을 하는 게 가능했던 남미의 경우를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미의 경우는 매우 특수한 역사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발생했던 현상이었고, 그나마도 차베스 사후 지금은 그들의 집권과 더불어 개시된 급진적 사회개혁이 크게 훼손되고, 후퇴를 강요당하고 있다. 물론 이 현상은 단지 선거라는 요인 하나만으로 해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좀더 크고 복잡한 국제정치 및 세계경제 등 여러 요인들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등, 남미 국가들의 현재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사회개혁의 후퇴도, 따져보면, 선거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촉발된 사태이다. 물론 배후에는 보다 깊은 이념적·경제적 충돌과 갈등이 있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사회에서 선거란 권력의 정당성 여부를 가리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어 있고, 그 때문에 어디서나 선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한국의 언론에서도 4월의 총선을 앞두고 선거 이야기가 압도적이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이런저런 공약들을 내놓지만, 선거가 끝나면 그 공약들이 헛소리가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직도 허다한 사람들이 선거에 대한 기대를 접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기는 선거공약이라는 것은 그냥 이기기 위한 책략으로 제시된 것이니 그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인지 모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약은 지켜지지 않는 게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경제성장’에 대한 공약이다. 실제로 가공할 기후파국이 코앞에 닥친 이 시점에도 선거판에서 횡행하는 전형적인 공약은 여전히, 더 풍요롭고 더 안락하고 더 편리한 생활에 대한 약속, 요컨대 경제성장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약속이다. 만약 이런 약속들이 말 그대로 지켜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식의 선거제도로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총선의 결과로 구성될 다음 국회 역시 임기 만료까지 끊임없는 무의미한 분쟁으로 아까운 시간과 세금만 허비하는 난장판이 될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조짐도 지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국회에서 여야로 갈라져 끝없이 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집권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야당은 차기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일 것이지만, 그러나 (단순한 권력욕망의 충족 이외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집권인지는, 어느 쪽을 보더라도 분명치 않다.
대의제 정당정치에서 진보/보수 혹은 여야 간의 분쟁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다. 실제로 이러한 정치시스템은, 자본주의 산업경제가 계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대로 작동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70년대의 오일쇼크 이후 점차로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한 세계경제는 마침내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를 고비로 사실상 성장 정지 국면으로 들어섰고, 이에 따라 대의제 정당정치도 기능부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우연적이든 필연적이든 자본주의 산업경제의 발달과 보조를 같이해온 정치시스템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불가피한 현상일 것이다.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없는 상황, 즉 빵의 크기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빵의 분배를 둘러싼 다툼은 전례 없이 격렬한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성장시대의 종언’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대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대상황에서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협동과 나눔이라는 (인류사회의 오래된, 그러나 근대 이후 철저히 억압되어온) 윤리적 덕목의 광범위한 실천일 것이다. 그런데 혹심한 경쟁 논리를 전제로 하는 선거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이 협동과 나눔의 윤리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확산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산이라고 하는 영국과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정치 현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난 수년간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사태에 관련하여 의회정치가 완전히 마비되고, 미국에서는 트럼프라는 전대미문의 괴기스러운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 이제는 재선까지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기막힌 현실은 대의제 선거민주주의의 수명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신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금년 11월 버니 샌더스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다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회생하고 세계의 앞날이 밝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문화 풍토에서는 매우 낯선 개념, 즉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샌더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이변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최근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샌더스가 우위를 점하고는 있지만, 전 대통령 오바마와 클린턴 부부를 포함한 민주당 주류파와 〈뉴욕타임스〉를 위시한 ‘진보파’ 언론들의 샌더스에 대한 거부감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되고 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 무엇이건, 그들이 샌더스를 반대하는 이유는 극히 단순하다. 즉, 민주, 공화 양당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엘리트들로서 온갖 특권을 누려온 그들은 사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사회주의자’ 샌더스와는 결코 동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선거제도하에서 샌더스와 같은 혁신적인 비전을 가진 급진파가 정치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거의 모든 나라의 엄중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하지만, 실제로 지금 많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양심적이고 지혜롭고 결단력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대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정파 간의 대립 때문에 중대한 현안들이 아무것도 논의되지도, 결정되지도 못하는 현실상황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이 답답한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예컨대 중국이나 러시아식 권위주의체제 비슷한 것의 도입을 주장하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비상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언론, 표현, 결사의 자유를 제약하는 권위주의체제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극적인 변혁은 격렬한 변란 상황이라면 모를까, 현대 법치국가의 통상적인 절차로는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의 강화만이 길이다
그러니까 길은 하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강화란 ‘인민의 자기 통치’라는 원칙에 충실한 정치체제를 회복하거나 새로이 구축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그것은 ‘중우정치’가 되기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은 자기를 그 ‘어리석은 대중’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대중’은 항상 타인들, 그중에서도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민초들을 가리킬 뿐이다. 하기는 민중의 능력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사고습관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근대 사상가에 한정한다면, 대표적인 예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견해일 것이다. 밀은 19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양심적인 지식인이었으나, 선거에 있어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과 하층민들의 투표가 갖는 효력에 차등을 두어, 가령 지식인의 1표는 교육받지 못한 서민의 2표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산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왜 ‘엘리트들’은 늘 자신들의 판단력은 믿을 수 있고, 서민들의 판단력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까. 실태를 보면, 그들 자신도 끊임없이 그릇된 판단을 하고,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엘리트나 평범한 서민들이나 조금도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소수 엘리트의 고독한 혹은 과두적인 결정이 민초들의 결집된 판단력보다 더 합리적이고 건강하다고 믿을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분야에 따라서는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판단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공직자를 추첨으로 뽑았던 고대 아테네에서도 전쟁 지휘관이나 폴리스의 회계업무 담당자는 선거로 뽑았던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운영이나 사무, 혹은 중대한 정책결정(법률의 개정, 전쟁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등등)에 관한 토론, 그리고 ‘민중법정’의 심판원으로 참가할 권리는 시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졌고, 토론의 장에서는 자유롭고 기탄없는 발언이 권장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적극적인 정치참가가 가능했던 아테네의 시민들은 소수의 귀족과 부자들만이 아니라, 소농, 소상인, 장인, 노(櫓)잡이 등,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근현대의 지식인들 중에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혹은 편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아테네 시민들의 활발한 정치참가는 노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그런 편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노예가 없는 현대사회에서는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보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그냥 주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테네의 시민들은 예외적인 경우(광산노동 등)를 제외하고는 노예들과 함께 생산노동에 종사하고 있었고, 노예들은 정치활동을 빼고는 시민들과 다름없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은 여러 연구에 의해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예컨대 Ellen Meiksins Wood, Peasant―Citizen and Slave: The Foundations of Athenian Democracy, 1988).
그러나 대의제 정당정치로는 이제 더 나아갈 길이 없다고, 그러므로 보다 강화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데는 또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현행의 대의제는 기후변화와 같은 장기적인 배려가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할 능력이 없다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거가 전부인 이 제도에서는 모든 정치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승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시야는 늘 4~5년을 주기로 하는 단기적인 국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국가나 사회의 먼 장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 당장의 문제, 즉 다음 선거에 대비한 계책과 궁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인들의 권력욕망을 비웃거나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권력욕망이란 남들이 비난하고 비웃는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욕망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 무의미한 것이 되도록 정치제도를 개변하거나, 새로이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선거라는 메커니즘에만 의존하는 한,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대응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능력·무책임은 어쩌면 대의제 민주주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정치가 이래서는 안된다. 일찍이 보수주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건전한 정치란 기본적으로 과거세대와 현세대 그리고 미래세대의 조화로운 파트너십이어야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즉, 현실의 정치를 책임지는 현세대는 늘 선조들의 유지를 기억하고, 자손들의 장래를 염두에 두면서 정치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현실의 정치는 언제나 현세대의 이익에만 관심을 집중해왔을 뿐이다. 어쩌면 이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근대적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이기심을 핵심적인 동력으로 삼아 전개돼왔고, 이 시장경제의 에토스를 고스란히 공유해온 것이 바로 대의제 정당정치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 전역에서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뺏지 말라고, 지구가 불타고 있는데 정치가들이 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절규를 하고 있다. 이 기막힌 상황에서, 우리는 막연히 정치가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 개개인의 자질과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가 강조되는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시스템을 보강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예컨대 일곱 세대 이후 자손들에게 미칠 영향을 깊이 고려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토의·숙고하는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아메리카 토착민의 집단적 의사결정 시스템과 유사한 시스템이 지금은 무엇보다 필요한 때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 때문이겠지만, 최근 들어서 세계 곳곳에서 ‘숙의민주주의’ 운동이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수년 동안의 격렬한 운동의 연장선에서 ‘절멸저항’ 활동가들이 요구해온 ‘기후시민의회(Climate Assembly)’가 일부 기성 정치가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의 도움으로 현재 여러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의회’가 당장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파적 대립과 온갖 이해관계에 묶여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기존의 의회 대신에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긴급한 현안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방법을 찾아냈고, 많은 시민들과 일부 정치가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시민의회’란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로 회의체를 구성한 다음, 그 시민 대표들이 거기서 당면한 중대 사안에 대해서 관련된 자료를 철저히 숙지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설명을 충분히 청취한 후에 집중적인 토의와 숙의를 거쳐서 결론을 내리는 집단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물론 이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신과 방법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된 일종의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결함투성이의 대의제 정당정치 대신에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써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민의회’는 비단 기후문제뿐만 아니라, 극심한 경제 불평등을 포함한 (기성의 정치제도 틀 내에서 해결하기가 지난한) 각종 과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극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고, 그 점에서 조만간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의민주주의가 기왕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또, 그게 바람직스러울지도 분명치 않다. 아무리 현행의 대의제 정치제도가 무능력·무책임을 조장하는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직업정치인의 존재를 소거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인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 유보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급진적인 변혁이 현실화되려면 현행의 의회가 동의를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동의를 받아낸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시민의회’ 등, 숙의민주주의 제도는 현행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고려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민의회’로써 현재의 정치시스템을 보완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곧 희망적인 활로가 열릴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그러나 과감한 정치적 개혁과 급진적 사회적 실험을 시도하지 않고, 현행의 제도와 관행만으로 이대로 계속 간다면,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것은 결국 파국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숙의민주주의를 통한 민중의 집단적 의사결정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몇몇 소수 엘리트들이 맘대로 내린 결정을 따르다가 망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은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