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문화예술? 아마도 이 글을 보게 될 많은 이들이 “통상협정과 문화예술이 무슨 상관인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몇몇은 스크린쿼터를 떠올릴 것이고 몇몇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문화산업’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본 만화의 한 장면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디즈니의 만화캐릭터 미니마우스가 데이지덕을 만나 반갑게 술잔을 나눈다. 그러나 이내 무거워지는 분위기. 미니마우스가 푸념을 늘어놓는다. “데이지야 난, 나는 다 끝난 줄 알았다”, 데이지가 말을 받는다. “또 그 얘기구나. 벌써 11번째잖아. 이러다가 보호기간이 영원토록이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이게 노예생활이지 뭐야.”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는가? 좀더 들어보자. “그러게 말이다. 아이구 발이야. 내가 70평생 하이힐 신고 다니느라 골병들었다. 내 팔자야…마스카라 있는 대로 처바르고 눈 치뜨고 애교 떠는 바보여자 역할에도 신물난다. 나도 아트 슈피겔만의《쥐》같은 작품에 출연해보고 싶다고.”
이제 알겠는가? 이 재기 넘치는 촌철살인의 패러디 작품은 “미키마우스 76세, 미니마우스 76세, 데이지덕 72세, 도날드덕 72세, 위니 더 푸우 80세…모두들 더이상 독점당하지 않고 민중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 민중의 저작물에 대한 자본의 해적질에 다름 아닙니다”로 마무리되고 있다.1)
빌어먹을 천국, 미국으로 가는 길
한미 FTA와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협정이 경제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FTA를 단지 통상협상만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포괄적이고 깊이있는 협상”이라는 말에서 한미 FTA 협상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함께 동북아시아의 안보전략 차원에서 제기된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FTA는 안보전략을 포함한 경제통상협정이라는 의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에 충격을 가한다. 이미 IMF에서 경험했듯이 우리의 삶은 더욱더 구조조정의 압박을 받아 강제적인 ‘미국화’로 걸어들어가게 될 것이다. IMF가 강제한 구조조정 시나리오는 지금의 정국을 예비하기 위한 ‘워크숍’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에서 이라크 파병까지, 미국은 한국에서 복잡한 양가감정을 일으키는 애증의 나라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종 파국의 시나리오가 구체적인 실상으로 부딪혀 온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주체할 수 없는 ‘자유’가 포화상태에 이른 곳이다. 단, 단서조항이 하나 붙는다. 충분한 돈이 있을 것! 미국은 천국이되, 빌어먹을 천국이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를 맴돈다. 하층계급들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망률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층계급은 기름에 튀긴 패스트푸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위싱턴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남성은 몇 블록 떨어진 부유층 지역에 사는 여성보다 평균 수명이 40년이나 짧다는 분석결과가 나와있을 정도다.2) 미국에서 파산하는 사람들의 50%는 과다한 의료비 지출이 그 이유다. 맹장염 수술에 1,000만원, 분만료가 700만원, 사랑니 발치에 100만원이 드는 나라가 미국이다. 한미 FTA는 그 환장할 것 같은, 빌어먹을 천국을 한국에 그대로 옮겨놓을 것이다.
정부는 한미 FTA가 양극화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주문인 양 외워대고 있지만, FTA라는 게 무엇인가? FTA를 찬성하는 이들의 주장은 그 수사나 복잡한 정치적 계산들을 걷어내고 보면 단순하다. 잘되는 놈은 밀어주고 안되는 놈은 죽이자는 것이다. 희생이 불가피한 분야가 있지만 그 희생을 바탕으로 다른 분야가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잘되는 놈은 당연히 이미 글로벌화되고 있는 굴지의 기업들이다. 안되는 놈은 노동자·농민을 포함한 대다수의 민중이다.
기업의 이익은 결국 국익 아니냐고? 기업이 잘되면 투자도 늘어나고 고용도 확대되어 서민경제도 혜택을 받는 것 아니냐고? 착각은 금물이다. 삼성이나 현대나 LG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이미 생산기반시설의 해외 설립에 주력하고 있다. 그들은 저렴한 인건비와 원자재, 새로운 소비를 찾아 중국이든, 인도든, 동남아시아든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해외법인을 설립하고 공장을 짓는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목놓아 외쳐왔으며 한미 FTA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며 노동시장의 재편을 시도할 것이다. 한마디로 비정규직이 대폭 양산되며 양극화가 더 극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외자본의 직접투자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운송비용 문제는 미국의 자본이 한국에 생산시설을 짓는 것보다는 기업의 인수합병을 통해 진출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자본의 이해와 민중의 요구가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움직일 따름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미 FTA란 결국 새로운 식민지 개척을 위한 자본의 전략이며 정교하게 계획된 착취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
총체적인, 그러나 분석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것이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밝혔듯 결국 이 협상이 성사된다면 한국은 자연스럽게 미국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은 미국인이 못돼 안달이 난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있는 사회가 아니던가. 한미 FTA 협상 선언이 미국화 선언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FTA가 총체적인 삶의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어느 한 분야의 피해를 강조하거나 협상에서 그 분야를 제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한미 FTA는 우리의 삶을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재편하는 시나리오대로 진행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미 FTA로 인한 분야별 피해를 집계하고 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빌어먹을 천국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파국으로 치닫는 절망의 세계화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해 총체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도 개별 분야의 상황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 분야에 갇히기 위한 인식이 아니라 폭넓은 인식을 위한 확인이 될 것이다. 가령, 한국영화를 이야기한다고 해 보자. 현재 스크린쿼터가 반토막이 나면서 영화인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영화인들만의 문제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가 가져오는 수많은 효과들을 생각해보면 영화는 영화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영화는 투자자의 문제이기도 하고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 노동의 문제이기도 하고 저작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복잡한 연관관계의 고리들을 아무런 기반 없이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미 FTA와 관련해 넘쳐나는 비밀과 거짓말들을 생각해볼 때 이는 더더욱 그렇다. 한미 FTA와 문화예술이란 주제를 이야기하려면 각 분야별 장르의 내부논의와 연결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싸움에는 문화예술인들도 함께 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한미 FTA 협상의 시발점이 됐던 영화인대책위와 함께 미디어공대위, 저작권공대위, 문화예술공대위를 구성해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3)
문화관광부의 비밀과 거짓말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문화예술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의 입장과 태도를 먼저 확인해 보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한미 FTA와 관련한 연구용역들을 은폐하거나 조작했다는 의혹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화관광부 역시 이런 논란에 휘말렸다.
문화관광부 산하의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KCTPI, 원장 송재호)은 정책이슈 리포트 제1·2호인〈한미 FTA와 문화예술-문화다양성 논란에 대한 대비〉와〈한미 FTA와 문화산업 대응방안〉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가 채 일주일이 못되어 글을 삭제했다. 두 리포트의 내용은 한미 FTA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준비가 부족하며 ‘반대여론 완화’를 위해 보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FTA 반대여론을 의식한 정부가 고의로 보고서를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4)
문화관광부는 이미 2005년 11월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등에 의뢰한〈문화산업 대미개방에 따른 영향 분석〉용역의 결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문화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문화산업은 인쇄업을 제외하고는 대미경쟁력이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미 FTA를 체결할 경우 게임, 영화, 방송, 출판, 인쇄, 음반 등 문화산업 전분야에서 대미무역수지가 큰 폭으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한미 FTA 문화산업분야를 제외한 기초예술분야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이는 산업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분야에서 직접적인 영향력이 클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5)
이분법을 넘어서
문화관광부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산업과 연계되지 않는 분야들은 한미 FTA 문제에 대해 조금 시큰둥한 모습까지 보이는데, 이는 지금까지 기초예술분야가 겪어온 어려움에 기인한다. 지금까지도 시장에 기대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앞으로 한미 FTA가 체결되건 말건 뭐 더 나아지고 말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언뜻 보면 이해가 갈 법도 한 생각이다.
그러나 독립영화인들과 영화노동자들을 생각해보면 이 인식이 어디서 어긋나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싸움에는 독립영화인들과 영화노동자들도 함께 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싸움 자체가 주류 영화인들의 밥그릇 지키기라고 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류 영화의 바깥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는 독립영화인들과 저임금 고강도노동에 시달리며 한국영화를 온몸으로 버텨온 영화노동자들이 싸움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치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의 폐단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민족해방을 위해 제국주의에 맞섰다. 물론, 이는 제국주의 자체가 갖는 폭력과 수탈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싸움으로 계급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라는 현실적 시스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민중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도 그렇다. 현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주류 영화계의 문제들을 몰라서 싸움에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그 문제들을 잘 아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헐리우드 영화가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게 될 때 예상되는 문제점들은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온 모든 시도들―영화다양성 확보, 영화노동자 처우 개선―을 손쉽게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물론, 한국영화산업의 치명적 약점과 구조들을 온존시킨 채 자국영화 보호만을 외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기만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미 FTA 반대 전선에서 싸우고 있지만, 영화계는 그런 문제 설정에 부분적으로 실패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계 내부의 건강함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한국영화에 보냈던 신뢰는 회복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영화계가 그런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술은 아니다. 영화인들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을 분명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을 대중화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다.)
문화예술계의 태도는?
이쯤에서 개별 문화예술 장르는 한미 FTA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한미 FTA 저지를 위한 문화예술공대위는 지난 5월 24일 토론회를 갖고 문화예술분야의 FTA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문화예술인들이 FTA 자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토론회는 소중한 자리였다. 토론회 자리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잠시만 따라가 보자.6)
민주노동당의 목수정 정책연구원은〈자유무역의 파고, 문화로 뛰어넘기〉라는 주제의 발제를 통해 한미 FTA에 대한 문화예술 분야의 포괄적인 접근을 보여줬다. 목 연구원은 한미 FTA가 체결되면 △문화다양성 협정의 손실 △공공문화예술 기관의 구조조정을 통한 문화의 공공서비스 상실 △경제논리의 전면화 등이 우려된다고 전망했다.
문화예술분야는 스크린쿼터 외 분야가 이슈화되고 있지 않지만 방송, 언론, 광고 등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목 연구원은 미국측의 요구와 문화관광부의 대응계획을 비교해가며 분석을 진행했다. 미국측은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독점 폐지 △방송쿼터(영화 25%, 애니메이션 45%, 음악 60% 이상 국내 프로그램 의무화)의 철폐·완화 △외국방송 재송신 관련 규제 철폐·완화 △더빙 및 외국방송 광고 재송출 제한 완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수입추천제 및 공연제한 완화 △지적재산권의 자국 기준으로의 강화 등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토론회에서는 각 장르별 현황과 전망도 함께 제시됐다.
공연예술의 경우 우선 국공립 예술단체가 민영화 내지 붕괴될 것이 점쳐지고 있다. 이미 많은 국공립 예술단체들이 직간접적으로 해체압력을 받고 있다. 각 지역별로 있는 합창단이나 관현악단 등 예술단들이 재정자립도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면서 민영화 체제로 내몰릴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의 사례는 이러한 경향을 미리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1999년 재단법인이 설립된 이후 대관료와 입장료가 상승한 것은 물론, 산하예술단은 개별단체별로 생존을 강구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또, 공연예술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다. 이미 국내 공연예술계는 뮤지컬 중심의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미 FTA 체결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켜 자본과 수익성을 바탕으로 한 외국의 예술단체들이 국내 시장을 잠식해 가면서 이미 흥행성이 보장된 안정적인 작품들만이 유통되는 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공연시장이 점차 대형화되면 작은 공연이나 실험적인 작품들이 설 자리는 점점더 좁아질 것이다. 수익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인기 공연예술분야는 통합되거나 축소되는 형태로 명맥만을 유지하거나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분야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이미 IMF 이후 출판시장이 붕괴되다시피 한 만화의 경우 여전히 이렇다 할 출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캐릭터의 경우 외국제품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만화와 캐릭터는 공적인 지원구조 없이는 존립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다. 애니메이션 역시 차세대 문화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들의 잇따른 실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나마 2005년 7월부터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가 현실화되면서 활력을 찾기 시작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란 지상파 전체 방송시간의 1%를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으로 방송하는 것을 의무화한 제도다. 그러나 한미 FTA가 체결되면 공공지원이나 방송총량제를 비관세장벽으로 지목해 철폐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현재 문화관광부(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나 지자체 등의 공적지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생각할 수 없는 출판만화와 캐릭터 분야는 물론이고, 창작 애니메이션 분야에도 상당한 영향이 우려된다.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가 폐지된다면 30분물 26부작 기준으로 총 28편의 작품이 그대로 공중분해되어 버린다. 애니메이션계의 분석에 따르면 26부작 한편에 투입되는 인원이 1년에 약 200명이므로 5,600여명의 일자리가 온데간데 없어진다는 말이다. 매출액으로 환산하면 순제작비 1,000억원과 만화, 캐릭터 등 부가매출액 1조원 정도가 사라진다는 계산이다. 이는 결국 관련인력들이 창작 애니메이션에서 하청작업으로 대거 이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한국은 스스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하청작업의 왕국이 될 것이다.
장르 내부의 논리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학, 시각예술, 음악 등 많은 장르들이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간다. 특히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는 국민을 건강한 문화활동으로부터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문화활동을 위한 공적인 인프라들은 점차 사적인 자금력의 문제로 이동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로 예술교육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에도 이미 국내 예술교육은 대부분 사교육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공교육에서는 입시위주의 교육제도로 예술교육은 거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을 통한 문화예술교육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까지는 부분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교육시장이 개방되는 상황이 오면 현재까지 예술교육을 담당하던 교사나 교수, 대학 등은 설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공교육에서의 예술교육마저 사교육시장으로 재편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싸움의 기술, 문화다양성협약
이것은 그저 생산자들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생산형태의 왜곡은 문화와 관련된 소비행태를 왜곡시키며 문화적 양극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소비의 형태 또한 삶과 일상에 대한 반성과 이완을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변모되어 버리기 쉽다. 이 과정에서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실종될 것이고 삶에 기반한 문화적 정체성은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는 몇몇 예술장르 내부의 예상되는 피해상황이 아니다. 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의 상실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이 될 것이다.
문화는 상품이 아니다. 일견 당연한 듯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게 단정지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은 어떤가. 작품 자체는 상품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작품이 우리에게 읽히는 과정은 결국 책이라는 문화상품을 통해서 진행된다. 소비의 패턴은 각 문화산물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향유되는 문화는 문화상품이라는 외형을 갖기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문화상품은 다른 공산품과 똑같은 속성을 지니는 것인가.
여기에서 ‘문화다양성협약’의 내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협약의 정식명칭은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이다. 문화다양성협약은 2005년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찬성 148, 반대 2, 기권 4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채택됐다. 반대국은 미국과 이스라엘이었다.7) 협약은 각국이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보호?진흥하는 데 필요한 정책과 법안을 유지, 채택, 이행할 권리가 있음을 명문화하고 있다. 특히,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문화산업이 전세계를 미국화하고 있는 지금, 협약의 의미는 매우 크다. 협약은 30개국 이상이 국회비준 절차를 마치면 국제법으로서의 효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국정부―특히 외교통상부―는 협약의 비준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협약의 비준은 문화산업과 기초예술의 보호와 문화다양성 증진을 위해 법과 제도는 물론 재정적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미 FTA 추진으로 인한 시나리오와는 정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다양성협약은 문화예술계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한국정부는 문화다양성협약의 채택에 찬성표를 던지고 난 뒤 채 몇달이 지나지 않아 문화다양성 확보의 제일전선에 위치하고 있던 스크린쿼터의 허리를 분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미 FTA가 체결된 이후 문화예술을 육성하기 위한 한국의 문화정책은 점차 퇴장의 압박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문화다양성협약의 국내비준은 국제법을 근거로 한 문화정책의 보루가 될 것이다.
이중의 과제를 넘어서 삶을 지켜내자
물론, 한국이 칠레와 맺은 FTA에서처럼 ‘문화적 예외’를 폭넓게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의 축소를 끈질기고도 강력하게 요구해 결국 현실화시킨 전미영화협회(MPAA)의 사례에서 보듯 미국의 기업들은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통상대표부(USTR)의 민간 자문위원회 위원들은 타임-워너, 미국음반협회(RIAA), 미국출판사협회(AAP), 전미영화협회(MPAA) 등을 대표하는 기업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협상 자체가 미국 기업인들의 요구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방송과 미디어 저작권, 각 장르별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들 기업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문화예술활동의 획일화를 가져올 공산이 크다. 나아가 이는 우리의 정체성과 감수성마저도 위협하게 될 것이다.
결국, 문화예술계 역시 영화계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고민이 필요하다. FTA로 인한 공공성의 파괴, 문화다양성과 정체성의 훼손에 맞서는 한편으로 내부시스템을 정비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져 있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국공립 예술단의 경우만 해도 현재의 구조가 예술의 공공성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 민영화나 구조조정이 곧 대안은 아니다. 이는 폭력적인 구조조정 방식을 겪은 세종문화회관의 사례가 증명해주고 있다.8)
음악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음악계 내부에서는 일부의 의견이지만 한미 FTA 체결로 음악적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마저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지금까지의 한국 대중음악이 기형적인 세대쏠림과 장르편중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영화계의 이중의 싸움처럼 내부를 재조직화하고 구조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한편으로 한미 FTA라는 공룡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별 분야의 피해를 막기 위한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개별 분야의 이해가 다른 분야와 어떻게 얽혀들어가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계망의 탐색이 필요하다. 앞서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문화상품이 저작권, 방송/미디어, 금융투자, 교육, 복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해당 주체로 하여금 보다 많은 연대의 틀을 고민하게 할 것이다. 삶의 방식의 문제에서 개별 분야로, 개별 분야에서 다시 전체 분야로 수렴하고 확산하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싸움은 보다 폭넓은 인식과 전선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희망보다 환멸을 이야기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가공할 만한 식욕으로 무한증식을 거듭하고 있는 자본의 지배는 더욱 강력해지고 있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사회적 연대는 쪼개지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보수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미 FTA는 새로운 식민지를 게걸스럽게 탐하는 자본의 세계화가 우리의 삶을 재편하려는 노골적인 음모다. 이 흐름에 저항 없이 몸을 내어맡긴다면 우리의 삶, 역사, 정체성이 깃든 유무형의 문화적 자산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며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전선이다. 문화다양성, 공공성, 문화주권, 문화정체성을 지키는 이 싸움은 ‘문화다양성협약’을 기반으로 사회적 연대의 폭을 넓히며 계속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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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미 FTA 지재권 협상, 대량난감 릴레이 만화, http://blog.jinbo.net/nofta_ip
2)〈오마이뉴스〉2004년 9월 21일 “미국인 평균수명 단축은 의료서비스 격차 탓”.
3) 각 분야별 공대위 활동에 대해서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홈페이지(http://www.nofta.com) 참조.
4)〈경향신문〉2006년 5월 8일 “‘문화부문 FTA 준비부족’ 글 삭제 눈총”
5)〈경향신문〉2006년 3월 24일 “‘한미 FTA 문화산업’ 인쇄 제외 큰 피해”
6)〈컬쳐뉴스〉2006년 5월 25일 “한미 FTA에 대처하는 문화예술계의 자세는?” 기사 참조. 토론회 발제문은 민예총 홈페이지(http://www.artdb.org) 자료실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7) 미국은 문화다양성협약을 저지하기 위해 19년 만에 유네스코에 재가입했으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명의의 공문을 통해 협약통과 저지를 당부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한겨레〉2005년 10월 21일 “미 통상압력 제동 근거 마련 ‘비미국의 국제정치적 승리’”.
8) 세종문화회관은 재단법인화 이후 끊임없이 예술단 문제로 몸살을 앓아왔다. 2005년에는 소속 예술단을 해체하려는 계획이 드러나, 한동안 서울시와 노조측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 문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세종문화회관 노동조합 홈페이지(http://www.sejongunion.or.kr/)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