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작가 솔제니친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신의 하나였다. 한때 한국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상당한 인기가 있어서 적지 않은 작품이 번역되어 읽혔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제니친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체제의 실상을 용기있게 폭로하고,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을 증언하기 위해서 비타협적으로 싸운 불굴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솔제니친은 단순한 반공작가가 아니었다. 1974년《수용소 군도》가 국외에서 처음 발간된 직후, 소련당국에 의해서 강제추방된 뒤 미국에서 20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일관되게 보여준 반서구적(反西歐的) 언동은 물론이고, 실제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점이 분명했다. 예를 들어, 비교적 초기에 씌어진 단편소설〈마트료나의 집〉이 특히 그렇다.
혁명 후 러시아 오지(奧地) 풀뿌리 농민들의 삶에 관한 이 뛰어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는 솔제니친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 전승되어온 러시아의 심오한 정신적, 사상적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작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추진한 집단농장화로 인해 러시아의 옛 농민공동체가 어떻게 철저하게 파괴되었는가를 암시하면서, 농민들이 집단농장의 일개 타율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농민으로서의 심리와 정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성마저 잃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다. 하지만,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사나운 늑대가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도, ‘거룩한 바보’의 전통, 즉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철저히 겸허한 정신이 끝끝내 살아있음을 작가는 발견한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지만, 아직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기희생의 습관이 몸에 배인 이러한 ‘거룩한 바보’의 존재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늙고 병든 이 ‘바보’에게 ‘마트료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녀가 만물을 품안에 기르는 어머니-대지(大地)를 표상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트료나는 ‘마티’에서 왔고, 러시아어에서 마티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저작 속에서 러시아 농민이나 농민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농민에 관한 일을 묘사하거나 언급할 때 그의 어조는 매우 날카롭고 강렬하다. 예를 들어,《수용소 군도》는 혁명의 과정과 혁명 후 소련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조리, 잔혹함, 비극적 사건들을 엄청난 치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기록한 방대한 기록이다. 그렇게 기록된 사건의 하나로, 1932년 모스크바 근교 집단농장에서 다섯명의 농민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기막힌 것이었다. 그날 집단농장에서 다른 농민들과 함께 풀베기 공동작업을 다 끝낸 뒤에 이들 다섯명이 농장에 남아서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키우는 말을 위해서 따로 풀을 베어서 갖고 간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솔제니친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드러내는 극도의 분노이다. “만일 스탈린이 이 다섯 농민 이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만으로 그는 극형에 처해졌어야 마땅하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 범죄가 한둘이 아닌데도, 특히 이 농민들의 죽음에 관련해서 솔제니친이 이토록 강경한 태도를 드러낸 것은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러시아 옛 농민공동체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애정이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특히 혁명 전까지 계속되었던 농촌의 협동적 자치조직, 즉 젬스트보(zemstvo)에 관해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지식인들이 흔히 들먹이는 솔제니친의 이른바 ‘슬라브주의’라는 것도 실은 이러한 자치적 협동성의 생활기반 위에 있던 옛 러시아의 농민적 세계를 옹호하고, 가능하다면 부활시키고 싶다는 갈망에 깊이 관계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이와 같은 농민적 세계란 따져보면 인간다운 삶의 토대 중의 토대이다. 개인으로서나 작가로서 솔제니친의 위대성은 그가 평생 유지했던 강인한 정신적 에너지와 무관한 것이 아닐 텐데, 그 에너지는 바로 이 농민적 세계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향수 혹은 갈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충전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단농장의 풀을 개인적 용도를 위해서 베어갔다고 해서 사형을 당한 농민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그 체제는 인간사회의 오랜 관습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인간성에 반하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집단농장만 하더라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집단농장화는 농민의 심리와 정서를 아예 무시하는 폭거였다. 뿐만 아니라, 생산력이라는 견지에서도 소농 중심 경제가 우월하다는 유력한 학문적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견해를 표명한 당대의 저명한 농업경제학자 차야노프 같은 지식인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에서 1933년까지 강행된 집단농장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사회적 갈등과 비극적인 대기근에 따른 엄청난 인명손상이었고, 궁극적인 결과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체의 붕괴였다.
물론,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스탈린의 폭압통치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압제 체제의 근간에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 인식에 있어서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소비에트의 이상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결국 산업화와 생산력 제고를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환원되어버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요체가 생산수단의 국유화였다. 그 결과 농촌은 단지 도시와 공장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공동체는 파괴되고,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유리된 채 집단농장의 한갓 노동자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고 해서 생산력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가 일차적으로 효과적인 산업화 혹은 경제성장의 도구로 인식되는 순간, 국가가 독점적인 자본가가 되고 인민은 전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마는 기형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출현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현대 사회주의 운동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주도해왔던 맑스주의 자체 속에 이미 사회주의의 기형적인 발전을 예고하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우선, 사회주의가 성립하려면 먼저 물질적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자본주의 문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맑스 자신의 생각이 그러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여기에 혁명이 “자유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함”을 겨냥하는 운동으로 왜소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나아가서, 여기에 내포된 역사 발전에 대한 일원론적이며, 단계론적인 관점은 결과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비서구 민중공동체에 대한 공격과 침탈을 정당화하는 매우 위험한 논리로 연결되고 만다.
1857년과 58년에 걸쳐 일어났던 인도민중의 대대적인 봉기에 대해서 영국 식민당국이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을 때, 맑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도의] 이 목가적인 마을공동체들이 ‘동양적 전제주의’의 견고한 토대가 되어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문제는 이러한 아시아의 사회상태에 근원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인류가 그 운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국의 죄악이 무엇이건, 영국은 그런 혁명을 위한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였다.” 이렇게 ‘문명화’라는 개념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맑스의 논리는 “아시아의 ‘근대화’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본에는 아무런 전쟁 책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오늘날 일본 보수파의 논리나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를 미화하는 한국의 뉴라이트 그룹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한일 우익논객들이 뜻밖에도 맑스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있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핵심은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맑스를 단순히 근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얘기가 되겠지만,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맑스에게도 ‘자본주의 근대’는 역사 발전의 불가결한 단계로서 긍정하고 옹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근대’를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근대’를 허용해야 할 잠정적인 기간이 과연 얼마 동안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과연 어떤 수준까지 발전해야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줄 객관적인 척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역사법칙에 의해서 언젠가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렇게 되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토록 강조한 ‘과학’과는 상관없이 혁명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 맥락에서 또 희극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지금 오키나와에서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어떤 글에서 자신이 아는 일본의 한 젊은 맑스주의 운동가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 젊은이는 일본 자본주의가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아직 미숙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혁명적 수준까지 자본주의가 도달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지금까지 하던 운동을 접고, 대기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터무니없는 희극들이 발생하는 것은 서구 자본주의적 산업화,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어온 뿌리깊은 ‘근대적 미신’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생존의 궁극적 테두리인 우주와 자연은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갈 뿐인데도, 서구 근대문명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세워 직선적인 진보를 끝없이 추구·확대해왔고, 그 과정에서 생태적, 사회적, 인간적 한계는 계속 무시되어왔다. 근대문명이란 간단히 말해서 재생 순환적인 태양 에너지 체계의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장구한 세월 동안 땅 속 깊숙이 묻혀있던 석탄, 석유, 우라늄, 기타 지하자원을 파 올려서 마구잡이로 사용하자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에 근거하고 있는 문명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근대문명이 영속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옛날 도쿠가와 막부(幕府) 말기 개국(開國) 초에 일본에 와 있던 영국공사가 당시 일본의 석탄 생산이 비근대적이어서 일본에 기항하는 영국 기선(汽船)들에 원활한 연료공급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해서, 막부의 관리에게 근대적인 석탄채굴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막부의 담당관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일본의 석탄은 우리 1대에만 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전형적인 ‘비근대인’의 세계관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소비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세력 대부분이 지금까지 파행을 거듭해온 것도 결국 이러한 발전사관의 덫에 걸려온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통설에 대체로 굴복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안이 없다”는 구호 밑에 강화되어온 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것보다 어쩌면 더 지독한 전체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감세, 노동유연화, 규제철폐, 민영화, 자유무역 등등 그럴싸한 언어유희 밑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갈수록 벌어지는 사회적 격차, 부와 권력의 극심한 편중, 토지와 물을 포함한 공공재의 가속적인 상품화, 국가기구의 사유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환경파괴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이라고 부를 만큼 거의 노골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이 수탈구조를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정말 이 시점에 ‘대안’이 없다는 게 진실일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볼 때,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고식적인 관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기있게 이 상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회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를 경험해왔고, 그것은 아직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 생활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세계에서 우리들은 현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호부조의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이 두려움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호부조의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려는 노력이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계속적인 굴종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람들은 ‘상호부조의 경제’라는 개념에서 대뜸 ‘가난’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호부조의 경제란 기본적으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성장경제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경제이다. 따라서 이른바 생활수준의 저하는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가난’은 회피할 게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미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철학자 프루동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생활은 원래 가난한 생활이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바탕,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일이다.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20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뛰어난 문예비평가, 사상가, 평화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위해서 헌신적인 생애를 살다가, 1차대전 직후 짧은 순간 존립했던 바이에른 소비에트공화국 혁명정부의 문화담당 각료로 활동하던 중 1919년 49세의 나이로 반동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란다우어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서 언젠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미래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진보’를 믿지도 않았으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철저히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동적 공동체들의 연합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기초는 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였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가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공동체가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는 “하나의 조건,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이자 행동양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즉 우리가 서로서로에 대하여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지금 당장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국가를 폐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게다가 그는 생애의 후반기로 갈수록 땅과 농촌공동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는 토지를 떠난 인민은 자본가에 맞설 수 있는 독립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산업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으로부터 퇴각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들이 만일 ‘협동적 사회주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대도시를 떠나 농촌공동체에서 농업과 소규모 공업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우어의 생각이었다.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사상은 주류 사회주의 사상들에 밀려나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그러나 ‘사회주의’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의미한다는 그의 명료한 메시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들에게 요긴한 지침이 된다. ‘경제’라는 덫에 걸려 사고력이 정지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란다우어와 함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웃들과 더불어 자발적인 협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