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스물다섯 살, 용혜인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시작하면서 평소에 말도 잘 못하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아 걱정이 많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일에도 딱히 재주가 없어서 사실 걱정이 앞섭니다.
지난 4월 16일을 다들 기억하시는지요? 학생인 저는 시험기간을 앞두고 후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오전에 사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단원고라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놀랐지만 이내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접하고 안도하며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 돌아와서 ‘전원 구조’가 사실은 오보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실종되었지만, 처음에는 배 안에 있을 실종자들이 몇 시간 후 ‘짠’ 하고 구조되어서 감동의 장면을 연출할 것 같았습니다. 언론에서는 계속해서 엄청나게 많은 조명탄과 헬기 그리고 구명정을 동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실종자들은 ‘구출’되지 않았고,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보도들만 쏟아져 나왔습니다. 너무나 많은 희생자들을 속수무책 지켜보기만 하면서 국민들의 가슴에는 슬픔 이상으로 무력감이 곧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도 엄청난 감정 소모가 고통스러워 더이상 그 소식을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언론의 보도를 최대한 덜 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4월 19일, 중간고사를 코앞에 둔 주말에 밤늦게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구조작업과 정부의 대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엉망이었다는 것이 지금에야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조명탄 밝기를 보며 정부가 열심히 구조작업을 하고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SNS를 통해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에서 청와대로 올라와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나…’ 그러나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그 뒤에 이어졌습니다. 경찰버스 10여 대의 병력이 실종자 가족들을 막아섰습니다. SNS를 통해서 올라오는 사진에는 빼곡히 많은 경찰들이 유가족들을 막아서고 채증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4월 16일 세월호 사고 이후 가장 유능한 정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을 바닷속에 두고 까맣게 속이 타들어갔을 실종자 가족들을 막아선 그 수많은 노란 경찰들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삼풍백화점 이후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자식을 잃은 것 같다는, 그래서 지금 데모든 봉사활동이든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유가족의 말을 들으며, 나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급하게 대자보도 써서 붙여보고, 노란 리본 나눠주기 캠페인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4월 28일, 친구들 서너 명과 뭐라도 해보자고 모여서, 급하게 침묵행진을 해보자고 해서 29일에 청와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4월 30일에 첫번째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정언명령
세월호 사고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비슷한 죽음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서해훼리호 사고, 올해 초에 있었던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그리고 세월호 사고. 왜 이런 죽음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사고의 원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무리한 증축과 평형수 조절, 과도한 화물 선적 그리고 20년이 넘은 배를 사올 수 있게 했던 규제완화까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저는 이 원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윤’입니다. 저렇게 하는 것이 기업을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더 큰 이익을 창출하는 유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싼값에 배를 들여오기 위해 아무런 추가 안전조치가 없음에도 배의 법적 연한을 늘리고, 더 많은 화물과 승객을 싣기 위해 무리하게 배를 증축하고, 연료비를 절감하기 위해 평형수를 줄이고. 이 모든 것이 ‘비용 절감’이라는 차원에서 당연한 경영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비용’이라는 것이 사실은 사람들의 ‘목숨 값’이었던 것이고, 300명이 죽고 나서야 이 사회는 이것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생명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이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죽음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지난 4월 16일 사고에서 300여 명의 죽음을 만들었던 단 한마디였습니다. 그 한마디는, 세월호 사고만 놓고 봤을 때도 어마어마한 죽음의 원인이 된 한마디였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평생을 내화시키고 살고 있는 세상의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조용히, 시키는 대로, 공부하면서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받고, 대학에 와서도 다른 데에 한눈팔지 말고 가만히 학점 관리하고 ‘스펙’을 쌓을 것을 요구받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나서도 ‘좋은 남자’ 만나서 ‘좋은 집안’에 가만히 시집가는 것까지를 완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속절없는 죽음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이 생명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사회가 생명이 더 중요한 사회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말자’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고 싶었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아직도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안산에서 자식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한밤중에 서울로 올라온 유가족들과 길바닥에서 하룻밤을 지샜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손에 들려 경찰벽을 바라보던 70개가 넘는 영정 사진들, 그리고 청와대 앞에서 경찰들 앞에 무릎 꿇고 (대통령을) 10초만 만나게 해달라고 빌던 유가족들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추웠던 그날 밤, 유가족들은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담요 하나에 의지해서 밤을 지새며 청와대 앞에서, 아니 경찰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국민입니까?” 그리고 같은 시각, 박근혜 대통령은 따뜻한 청와대 안에서 유가족들을 바깥에 세워두고 ‘민생대책회의’를 하며, 소비심리 위축을 걱정했습니다.
결국 그날, 유가족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고, 길바닥에서 밤에는 추위와 낮에는 더위와 싸우다가 KBS 길환영 사장의 사과만 받고서 다음을 기약하며 안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조금 지난 5월 16일, 그제야 박근혜 대통령이 유가족 대표들을 청와대에 불러 면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과했습니다. 유가족들이 만나달라고 청와대 앞까지 왔을 때에는 모른 척하더니,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요구할 때에도 모른 척하더니 결국 유가족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5월 17일,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실종자들의 기원을 바라는 촛불문화제가 있었고, 그날 행진을 하던 중 청와대로 향하던 시민 120여 명을 경찰은 토끼몰이와 폭력을 사용해 인도에서까지 연행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잊지 않겠다’는 시민들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가족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면담하고 슬프다 이야기하지만, 거리로 나선 유족들이 길바닥에 앉아 만나달라고 애원해도 만나주지 않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잊지 않겠다는 시민들에겐 끊임없이 ‘가만히 있으라’ 명령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튿날 5월 18일은, 네 번째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이 있던 날이기도 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3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답에 대해 다시, 또다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대답하기 위해 청와대 방향으로 한 손에는 국화꽃, 한 손에는 피켓을 들고 침묵으로 행진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돌아온 박근혜 정부의 대답은 100여 명의 연행이었습니다. 시민을 200명이 넘게 잡아 이틀 동안 가뒀습니다. 그것도 폭력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연행 과정에서의 인권침해와, 이후 경찰서에서 있었던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들은 일일이 나열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속옷 탈의를 요구한 것과 성동경찰서에서 경찰이 욕설을 했던 일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5월 19일, 저는 유치장 안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TV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5월 8일 그리고 17일, 18일에 제가 거리에서 받았던 박근혜 정부의 대답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철창 안에서 대통령의 눈물을 바라보면서 많은 감정이 들었습니다.
5월 18일,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지만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 오전에 들었던 강연에서, 1980년 5월의 광주가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의 광주를, 그리고 거기서 죽어갔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기억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월호 사고로 인해 희생된 300여 명의 죽음을 단발의 사건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죽음을 그리고 세월호를 끝까지 기억하고 잊지 않아서 ‘역사’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언론에서도 세월호 사고는 점점 덜 보도되고, 1면, 혹은 첫번째 뉴스로 보도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고를 잊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세월호가 저 바닷속에 있고, 수십 명의 실종자가 바다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만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일상을 살지 말자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세월호 이전의 일상’으로는 돌아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4월 말에 무엇이라도 해보자고 친구들 몇 명이 함께 모였을 때, 한 친구가 “산 자의 의무를 우는 것으로 끝내지 말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 한 문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300여 명의 죽음을 해프닝이 아니라 ‘역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이고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번의 침묵행진을 더 하면서 ‘청와대로 가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대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말도 안되는 죽음의 고리는 끊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을 맞이했습니다. 1987년 6월은 제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라 그날의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항쟁은 단순히 ‘직선제’로 제도가 바뀐 것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이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의미 있는 날이라고 배웠습니다.
2014년 6월 10일이 1987년의 그날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라며 저는 시민들께 그날 청와대로 가자는 제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착한 사람이었다”라는 자족만으로 이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힘이 미약하더라도 외면하고 숨지 말고, 이 사람들의 죽음을 끝까지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 죽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진짜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그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리는 70명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우리를 인도에 가두려는 경찰을 밀어내고 한 걸음, 한 걸음 청와대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이 연행되었지만 우리는 총리 공관 15m 앞까지 걸어갔습니다.
저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잔혹했던 4월 그리고 5월과 6월까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함께 이야기했던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잊혀지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는 유가족들의 말이 지워지지 않아서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식이 죽어 국민들을 슬프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유가족들의 말이 너무 슬퍼서, 그리고 마음 아파서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