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지음
녹색평론사, 2016년
어느날 뜻하지 않은 책이 한권 배달되었습니다. 그냥 녹색평론이 올 때가 아닌데 또 왔구나 생각하며 봉투를 뜯으니 거기에 선생님께서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 모음집《나락 한알 속의 우주》가 온 것입니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웃음 띤 선생님을 보고 있는 것이 하도 좋아 도무지 책장 넘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 표지를 넘기니 화보에서도 선생님께서는 매양 웃고 계셨습니다. 댁에서 사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도, 해월의 자손들과도, 원주 대성학교 교정에서도,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반과도, 격려사를 하시면서도, 전시회 때도 웃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늘 그랬습니다. 얼굴을 한쪽으로 약간 기울이신 채 웃으셨습니다. 체구는 작으셨으나 그 웃음속엔 항상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에는 선생님 글은 단 둘뿐이고 나머지는 강연기록과 대담을 옮겨놓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참 세월이 수상할 적에 필적을 남기면 괜히 여러 사람 다친다고 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일기도 쓰지 않게 되어 글을 남기지 않은 탓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결같이 생명공경과 공생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듯 모든 생명은 하나다. 여직까지 산업문명에 있어서 경쟁과 효율을 따지면서 일체가 이용의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살 수가 없고 생명이 존재하기 어렵게 되고 생명이 무시된다. 그래서 모두 하나 되자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또 운동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연대하고 협동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똑같은 얘길 때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풀어놓으시는데 읽어도 읽어도 좋습니다. 또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일상을 아는 것도 꽤 즐겁습니다.
어린시절 우리집엔 할머니가 꽤 많았습니다. 고조모, 증조모, 조모, 종조모에 대고모까지. 할머니가 많으니 옛얘기 들을 기회가 퍽 많았는데 특히 고조모께서는 ‘대호’라는 호랑이 얘길 자주 해주셨습니다. 얘길 어찌나 잘 하셨던지 매일 매달려 얘길 졸랐는데 어제 듣고 오늘 들어도 좋았고 하루에 몇번을 들어도 재미있었습니다. 거의 똑같은 얘기였는데 말입니다. 선생님 말씀이 꼭 ‘대호’ 이야기 같습니다. “맞아, 이렇게 살아야지” 하며 마음이 편해집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무척 싫어했던 정권도 있었고 혁신정당을 만들기도 했으며 옥고를 치르는 정치규제를 당하셨음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선생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신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으로 억울함이 있었을 텐데요. 살아가며 가장 두려운 것은 제 자신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분노할 일이 생겨도 제가 일그러질까봐 겁부터 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제가 헛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만물이 위대한 것입니다. 풀 한포기에 대한 존경심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사라져버리는 그러한 것으로는 곤란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또한 한포기의 풀과 같이 존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래 전부 위대한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이런 생각이 당신을 온전한 영혼으로 보듬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사람에게 번번이 사양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낮술을 드시는 모습이나 풀벌레의 거짓없는 소리에 놀라 평상생활을 되돌아보는 끊임없는 자기성찰하시는 모습에서 물처럼 되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과연 큰 스승이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본에서 온 손님들에게 “저는 명함도 없고 명함을 주고 받는 습관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절대로 내세우시지 않으셨던 선생님을 보며 아무것도 아닌 나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우리를 봅니다. 가정에서 무던히 살림 잘 꾸리고 살아가는 한살림 소비자 위원들에게 명함을 한통씩 만들어드렸습니다. 제 착상이었습니다. 아무개 엄마로 전락된 내 이름을 찾고 한살림 일원이라는 책임감을 갖게 하겠다는 등 의미를 한껏 부여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 생활이 그저 배우고 생각하고 바꿔나가야 할 일뿐입니다.
이 책을 보며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밥이 곧 생명이다, 자본주의의 상품논리에 지배되고 있는 우리 밥상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가 변하기 위해서 가정주부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한살림 소비자교육에도 애를 쓰셨습니다. 한살림이 자리가 잡히는 듯하던 91년. 공동체활동에 익숙치 않은 몇몇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고 질이 저하된 유정란을 계속 공급하던 생산자에게 이기적 판단을 내리자 선생님께서는 무척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11년 서울한살림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병중이셨던 선생님께서는 그때 ‘왜 한살림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답답하셨던지 유난히 질문을 많이 던진 강연이었습니다.
덮어놓고 자꾸 차원을 높이는 건 안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살림에 동참하게 해야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유기농을 하는 분만이 아니라 농약을 쓰고 비료를 쓰고 그러는 농사꾼까지도 안고 가야 한다 말이에요.
누가 주예요? 여러분들이 주님이지. 하느님 아버지가 왜 하느님 아버지인지 알아요? 살려주는 분이고 매일 먹고 살게끔 해주는 분이기 때문에 아버지야. 이 운동이 그런 차원에서 되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한 시기에 엄청난 자기승화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자기승화 없이 자기노력함 없이 어떻게 이 운동을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때도 선생님께서는 웃으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새삼 이 글을 읽으며 몸보다 더 쓰렸을 선생님 마음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뿌린 씨앗이 꽃피울 땐 관여치 않으셨지만 어려움이 닥치자 바로 달려오신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쥐를 위해서 언제나 밥을 남겨놓고 모기가 불쌍해서 등에다 불을 붙이지 않는다는 묵암선사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여름내 팔에 붙은 모기를 때려잡고 알집을 달고 있는 바퀴벌레를 보면 측은한 생각에 망설이다가도 잡아죽이고 맙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뭘 생각하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한살림의 화두는 무엇이며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해하며 제대로 행동으로 옮겨놓고 있는지 늘 고민스럽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밥상을 살리고 농업을 살리겠다는 이 운동이 오히려 생산자만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효리에서 열린 지난 단오잔치 때도 그랬습니다. 많은 생산자들이 오셨는데 반가움과 함께 미안함이 앞섰습니다. 특히 이철희 생산자는 손이 많이 상해 있었고 이호열 생산자는 건강이 좋지 않아 농사를 많이 접고 계셨습니다.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것이 무농약 타령 때문에 오히려 생산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듭니다. 다만 선생님 말씀대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이르면 조금 위안이 됩니다. 처음엔 제 밥상 잘 차리겠다는 생각으로 한살림을 하게 되었지만 이젠 서울 한복판에 앉아 밥을 먹을 때 당진의 정광영 생산자를 생각하고 사과 한 절음 베어물 때 최병수 생산자를 떠올립니다. 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생각이 얼마나 넓어졌는지요. 얼마전 한 이사께서 헐벗고 굶주린 북한동포 걱정을 아주 깊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통일이 되면 북한에 나무부터 심으러 가야할 텐데 누가 묘목은 좀 기르고 있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제 이름보다 한살림 글자를 먼저 깨우쳤던 아들은 이제 11살이 되었는데 보도블럭 사이로 다니는 개미를 보고 다행이라고 합니다. 그 사이로 다니면 사람들이 걸어가도 밟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의 공생사상을 절감합니다.
책을 읽으며 다시 아쉬운 것은 그 넉넉한 웃음을 대하며 선생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다, 쯔무라, 키무라 선생께 먹으로 ‘장난쳐’주신 선물 저도 하나 받았더라면 하는 때 아닌 욕심이 이제사 납니다. 그거라도 보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것도 부질없는 욕심임을 압니다. 한번 보기라도 할까 하고 박재일 선생님 천규석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역시 선생님 뜻과 같이 욕심없이 사시는 분들이라 누구하나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소장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하면 좋겠습니다. 전시회를 통해 김지하 선생님의 시〈말씀〉에서처럼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신” 조한알 선생님을 한번 더 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니어도 좋습니다. 읽고 또 읽을 선생님 말씀이 이제 바로 제 곁에 있으니까요. 이제 저만 그 말씀을 단단히 붙들고 살면 됩니다.
여하튼《오래된 미래》《우리들의 하느님》에 행복해 하던 때에《나락 한알 속의 우주》까지 얻게 되니 복터진 요즈음입니다.
녹색평론 제36호 1997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