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 투쟁에서 한살림운동의 제창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스승으로 알려진 고(故) 무위당 장일순(張壹淳, 1928~1994) 선생의 생전 강연 및 대담을 모아 엮은 책이다. 생전의 인터뷰와 해설을 추가로 수록한 개정증보판은, 선생의 생명사상을 그의 곡진한 육성을 통해 가감 없이 전달해준다.

목차

초판 머리말 / 이현주

글과 강연
삶의 도량에서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화합의 논리, 협동하는 삶
거룩한 밥상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
시(侍)에 대하여
자애와 무위는 하나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
왜 한살림인가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사심 없이 자기부정을 하고 가면

대담

늘 깨어 있는 사람
풀 한 포기도 공경으로
겨레의 가능성은 대중 속에
새로운 문화와 공동체운동
반체제에서 생명운동까지
한살림운동과 공생의 논리
치악산 그늘에 앉아 세상을 본다

해설

무위당의 생명사상과 21세기 민주주의 / 김종철

추천의 말

그것이 놀라워요. 철저하면서도 조금도 철저하지 않은, 그저 일상생활이 되어버리는 이런 인간의 크기 말입니다. 그런 크기를 지니고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있어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지요.
지금이야말로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더욱 심화시켜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생활화해 나가야 할 가장 적절하고도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한마디로 비인간화된 세상을 바로잡는 사상적 전환이 바로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영희(언론인(작고))

 

무위당 선생은 우리더러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거나 무엇을 하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또 선생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당장 어떤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하게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선생은 다만 세상에 살아 있는 존재들과의 근원적인 공감과 대화를 통해서, 개인이 어떻게 참된 행복에 도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자신의 체험에 비추러 부드러운 음성으로 차근차근 말할 뿐이다.
선생의 생명사상의 핵심은, 적어도 내게는, 공경의 사상으로 이해되었다. 사람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목숨 가지고 태어난 것들을 그 어느 것도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기지 않고, 깊이 주의를 기울여 대하는 일관된 마음과 태도, 이것은 이 책 어느 페이지에서든 선생의 곡진한 목소리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면모이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편집인)

저자 소개

장일순(張壹淳, 1928-1994)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고 신용협동조합운동,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며 지역사회운동가로 살아왔다. 원주대성학원을 설립하고, 1983년 도농 직거래 조직 한살림을 창립하면서 생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영면.

소개의 말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정치사상”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는 반독재 투쟁에서 한살림운동의 제창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스승으로 알려진 고(故) 무위당 장일순(張壹淳, 1928~1994) 선생의 생전 강연 및 대담을 모아 엮은 책이다. 1997년에 초판이 출간되고 20년이 된 지금에 와서, 인터뷰와 해설을 추가로 수록하여 다시 개정증보판을 내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그의 생명사상이 지금 우리사회에 적실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위당 선생은 흔히 교육자, 사회운동가, 서예가, 민주화운동과 한살림운동의 숨은 주역, 생명운동의 스승으로 일컬어지지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 차원을 넘어서 진실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이 시대의 탁월한 ‘정치사상’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민주주의가 시급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가능성은 풀뿌리에 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존경할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시각을 거목들에게서 찾으니까 볼 수가 없지. 문명이 쇠락기로 접어들면 보이지 않는 일반 대중 속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 요새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고 무어란 걸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이름도 없고, 가난한 사람 속에 많습니다. 위정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바른 소리를 하면 지금까지 ‘빨갱이’라고 몰아치며 정치를 해왔는데, 그런 게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 간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위대한 가능성이지.”(본문 183쪽)

이 책에는 평생에 걸친 무위당 선생의 일관된 사색과 실천의 결과로서의 ‘생명사상’이 압축되어 있다. 그 핵심은 사람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목숨 가지고 태어난 것들을 그 어느 것도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기지 않고, 깊이 주의를 기울여 대하는 일관된 마음과 태도이다. 철저히 민중의 풀뿌리 삶에 뿌리박고 있었던 그가 지향했던 것은 “적어도 만민이 다 평등하게 다 자유롭게 자기 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협동적인 사회”였다. “적어도 하나의 생명단위로 태양과 지구가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협동적으로 존재할 때만이 생명을 유지한다는 그런 안목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그는 누차 강조했다.

삶의 실천적 원리로서의 동학
장일순 선생은 종교와 고전을 넘나들며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짐승, 벌레, 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완의 관계, 하나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특히 동학 해월 선생을 많은 곳에서 인용한다. 동학사상을 단지 우리에게 잊혔던 지식의 복원 수준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사회에 가장 필요한 삶의 실천적 원리로서 살려냈다는 점에도 장일순 선생의 큰 공로가 있는지 모른다. 선생은 동학의 한울님 사상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계의 모든 이웃들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보장하는 생명사상으로 읽어내고, 이것을 현실의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한살림 공동체운동으로 풀어냈던 것이다.

보듬어 안는 혁명
그리하여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혁명조차도 장일순 선생에게 있어서는 ‘보듬어 안는 것’이었다. 그는 전체가 다 공생해야지, 상대를 없애버리는 해결은 해결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협력(타협)은 아니다. 그는 “용서한다는 것은 같이 공생하려고 할 때의 이야기”라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공생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비협력·비폭력 노선을 취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다만 전심 투구하는 노력 속에서 우리끼리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가졌던 놈들도 다 놓게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서구식 민주주의로는 안된다
“서구적인 민주주의란 것에 대해서 회의가 좀 있어. … 서로 밀어서 도와주면 되잖아. 근데 그렇지가 않아. 서로 자기가 해야 돼. … 서양의 민주주의란 게 산업혁명에 기초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게 뭘 가져왔어? 제국주의 가져오지 않았어? 복지사회란 것도 뭐야. 제3세계 착취해서 초과이윤 가지고 만든 게 아니야. … 그래서 난 서구적인 민주주의, 자본주의, 복지국가 이런 것들에 대해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어.”(본문 272쪽)

“정치에 대한 구조적 변화가 없이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는 서울이든 농촌이든 정경이 유착 안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졸부들이 정치하겠다고 나서지, 정말 건전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정계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보적 정당을 만들어 신선하게 나가려 해도 현재의 선거법과 국회 가지고는 될 수 없어요. 직능별 또는 계층별로 선거법을 고쳐야 한고, 또 그렇게 해서 국회를 구성해 운영해야 합니다.”(본문 184쪽)

“이미 구성돼 있는 시민단체, 농민단체들이 연대해야 돼요. 공신력을 세워야 할 구심점이 있어야 되거든요. 특히 각 단체들이 시민연대를 통해 이 난국을 극복해야 될 겁니다. 다른 데는 믿을 수가 없잖아요.”(본문 185쪽)

요컨대 서구 민주주의로는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서구식 민주주의는 따지고 보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한 착취와 수탈의 산물이고, 따라서 생명공동체 전체의 조화와 공생을 지향해야 하는 21세기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오늘날 선거방식의 문제, 즉 자신을 내세우고 타자를 배제하는 배타성을 원리로 하는 시스템으로는 절대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 역시 일찍부터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일견 나이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런 견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급진적(radical) 사상이며, 적어도 이 정도의 급진성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21세기 우리사회에 가장 긴요한 ‘정치사상’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는 글을 거의 남기지 않은 장일순 선생의 사상을 우리가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통로이다. 구어체의, 말투와 사투리까지 거의 그대로 살린 이 책은 말끔하게 편집, 정리된 문어체의 여타 책과 비교해 반복되는 내용도 있고, 일부 독자에게는 어색하게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무위당 선생의 곡진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까지 아껴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령부득의 책 소개를 선생의 육성을 인용하며 마친다.

“그래서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지 않아요? 어차피 사람은 자기 나름의 사는 즐거움이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하니까. 그러면 내일 망한다 해도 그냥 밀고 가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또 한 가지는, 그렇게 하면 희망이 있다고 믿어요.”(본문 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