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녹색평론사, 2011년
짚 한오라기에는 인간에게 이로운 미생물과 해로운 균이 얼마나 들어있을까 ― 과학적 논리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짚 한오라기가 가지고 있는 성분을 수치로 조목조목 확인하려 든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짚 사용에 따른 우수성, 혹은 얼마나 과학적이었냐는 논리를 들이대 남다른 지혜라고 추켜세우는 글들을 나는 많이도 읽었다. 얼마 전만 해도 메주를 묶거나 계란을 꾸리거나 새끼를 꼬거나 신발을 삼는 등, 땔감 이외에도 빠져서는 안될 생활의 필수품이 바로 짚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짚 한오라기는 수없이 많은 미생물과 병해충의 숙주로서 생명의 창고임이 분명하다. 어디 그뿐인가, 그 옛날 일반 서민주택 건축 재료로서 보온단열의 효과 또한 우수해서 재래 한옥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짚과 흙 속에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짚이 곧 집이 되는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유제품인 나일론과 플라스틱이 나오면서부터 우리 생활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짚은, 이제 공예품의 재료로서 간신히 그 옛날의 맥이 이어지는데 ― 여기서 일단 과학이 만들어낸 그 질기고 값싼 나일론이나 플라스틱의 출현은 가히 생활혁명에 가까웠음을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짚은 아무리 인간에게 이로운 풀이어도 석유제품에 비교하면 한번 쓰면 버려야 하는, 오래 쓰면 삭고 썩어서 버릴 수밖에 없는 한낱 풀일 뿐이었던 것이다.
반세기 만에 무너진 천년 농법
나는 올해 51세로 아직도 태어난 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다. 얼른 쉽게 말하면 반세기의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직간접으로 겪은 장본인이다. 그런 나는 농사란 그저 봄이면 들판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면 되는 줄 알았다. 가을이면 들판이 황금물결로 덮이면 되는 줄 알았다. 그 사이에 농협에서 나온 무상 농약을 뿌리고 화학비료로 밑거름과 이삭거름을 뿌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유기농에 눈을 뜨고 한동안 ‘오리농법’이니 ‘우렁이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어보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내가 왜 생뚱맞게 나이를 들먹거리는가 하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살아온 불과 반세기가 수천년 내려오던 원시 농법에 가까운 이상(理想) 농업의 근간을 무너뜨린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하면서 농사일을 배웠는데, 어른들이 한겨울 내내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치고 그 외 멍석이나 도래방석, 바구니, 망태기 등을 짜고, 나머지 땔감으로 쓴 짚의 재를 봄이면 인분에 재어 논밭으로 나르던 기억이 난다. 거름이라고 해야 기껏 외양깃을 겨우내 모아 내거나 풀을 베어 소 오줌에 잰 녹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땐 화학비료 같은 건 귀했고 농약 따위는 구경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모내기를 하고 애벌, 두벌 김을 매는 풍물패 꼬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군것질을 노리던 나는 목마른 어른들이 일하다가 맑게 고여있는 논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광경을 숱하게 보았던 시절이었다. 경운기가 나오기 전이었으니 논밭을 갈거나 써래질 하는 것은 당연히 소의 몫이었다. 이런 이앙농법이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니 최소한 천년 동안 농법이 크게 달라지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하던 때였다. 그것이 60년대였다.
그리고 70년대에 들어와 경운기가 나왔고, 화학비료가 나왔고, 농약이 나왔고, 신품종(통일벼)이 나왔다. 순식간이었다. 어린 나는 논에 들어있던 거미, 붕어, 참게, 미꾸라지, 개구리, 뱀 등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가을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에서 참게가 버석버석 밟히던 시절을 뒤로하고 자연농법에 가까운 천년 농사법이 무너지는 순간을 아버지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노동의 고통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이었다. 이후 80년대에 들어와 이앙기가 나왔고, 콤바인이 나왔고, 항공방제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농사꾼의 천국이 도래한 것 같았다. 아무나 기계를 부리면 벼가 알곡으로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리고 농민의 수는 격감했고 남은 농민은 소농에서 전업농으로 전환했다.
그러니까 《짚 한오라기의 혁명》의 저자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가 ‘자연농법’에 매진한 햇수가 45년인데, 45번 씨앗을 뿌리고 45번의 추수를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는 미래 농업의 등불을 환하게 켜들었는 데 비해, 내가 산 50여년은 수천년 대물림해온 그나마 친자연적인 우리나라만의 농법을 잃어버린 시간이 되고 만 것이다.
자연농법에 접근하는 마음가짐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벼 보리 땅 갈지 않고 이어 바로 뿌리기’와 무농약·무화학비료·무제초 등과 같은 기술적 차원보다 먼저 짚 한오라기를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었다. 조금 황당해 보여도 유기농의 맛을 본 나로서는 그의 ‘자연농법’이 그저 먼 나라 그림만은 아니었다. 단,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짚 한오라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의 차이가 바로 과학농법과 자연농법과 유기농법의 차이였다. 그러니까 짚 한오라기의 과학적 성분을 들이대며 미생물을 배양한다느니 하며 야단법석을 떨고, 농약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병해충과 잡초로 뒤덮인 논을 바라보다 씁쓸하게 돌아서던 내 실패한 7년여 유기농사는 한마디로 알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손이 자연에 닿는 순간 질서가 무너진다”는 저자의 자연관, 즉 자연을 동양철학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려는 낮은 마음자세와,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검열과 성찰은 거의 수도승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기농법에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자연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농법’ 이전에 겪은 저자의 생에 대한 원초적인 고뇌와 과학문명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회의를 곰곰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낮아질 대로 낮아진 마음가짐으로 어느 날 짚을 뚫고 나오는 벼의 싹을 발견하고 원시적인 자연농법으로 관심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의 한때 우쭐했던 농사꾼으로서의 자긍심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자연(사물)을 보는 그의 시선이 놀라웠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생명의 당위가 그가 생각한 방향으로 동시에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자연의 이법에 거슬림이 없었으므로 순하게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아니, 그 속을 들여다보면 뜨거웠다. 온갖 벌레와 미생물들이 우글거렸다. 스펀지처럼 녹비와 짚이 푹신푹신하게 깔려있는 그의 논은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도 있었지만 내 알량한 유기농사 체험으로 대충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가 과학농업의 대안으로서의 자연농사법을 동양의 무위자연 사상에서 따온 것은 그냥 간과할 대목이 아니다. “이웃나라에서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서로 왕래하는 이가 없었다”는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들고 소농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공동체에 대한 생각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마을공동체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런 관념적일 수 있는 동양사상이 그의 자연농법 실천에 깊게 스며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사상적 기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겸허한 자세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자연 그 자체의 본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머리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자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그는 ‘일체 무용론’을 들고 자연이 하자는 대로 흘러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법을 목표’로 삼고 ‘자연농법’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평농법이라니!
‘땅을 갈지 않고 씨 뿌리기’, ‘비료 쓰지 않기’, ‘농약 쓰지 않기’, ‘제초 하지 않기’ 등 농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일정들이 모두 다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단보당 소출은 일반 과학농법보다 높다고 한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를 믿을까. 그런데 내 경험에 비춰서, 유기농을 시작하던 첫해에 화학비료를 절반으로 줄이고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서도 평년작에 조금 밑돌았던 소출을 생각하면 그리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자연농법은 인간이 씨를 뿌린 벼농사 역사 이래 일대 혁명이다. 그 혁명의 기본이 되는 단위가 바로 짚 한오라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짚 한오라기의 혁명의 구체적인 지침서인 것이다. 혁명의 걸림돌인 도열병, 균핵병, 백엽병 등을 짚을 통해 어떻게 하면 퇴치할 수 있는지, 제초방법, 시비방법 등이 아주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나와있다. 그간의 내 농업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초월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데 그 방법론의 가장 밑바탕에는 다름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법’의 원리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이야기가 무엇을 근거로 어디서 온 것인지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오늘날의 과학을 떠받치고 있는 서양철학의 부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결국 인위를 가치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가치관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일에 인위적인 대책을 세우면 세우는 만큼 오히려 문제는 악화되며 내부로 곪아간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머릿속으로 쏙 들어온다.
자연식이란 무엇인가
“영양소를 다 깎아버려 소화하기 쉬운 백미를 상식(常食)하면 영양부족이 생기게 되므로 우유와 버터 같은 영양식이 필요하게 되지요. 물레방아나 제분공장은 인간의 위장활동을 대신함으로써 위장을 게으름뱅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입니다.”
‘자연식’은 ‘자연농법’의 표리일체로서 가까운 자연에서 얻어진 먹을거리를 무작위로 취하는 식사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말이 무분별식(無分別食)이지, 음식 일체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에 따르는 식사법이다. 그가 그런 동양사상을 토대로 그린 그림, 음양오행에 따른 ‘식품의 만다라’는 퍽이나 인상적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들었던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우리 말처럼 “맛있는 것을 찾지 말고 공복으로 있으면 이 세상은 맛있는 것으로 가득 찬다”는 자연식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로 음식 앞에서의 겸허함을 당부한다. 그리고 그는 “참다운 맛의 추구, 진정한 요리는 자연의 묘미를 체득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봄에 나는 산나물조차 떫은맛을 우려내지 않고서는 먹을 수 없는 현대인은 자연의 맛을 맛볼 수 없다”고 꼬집으면서, 자연에는 만(萬)가지가 있지만, 하나도 남아도는 게 없고 하나 부족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인간의 먹을거리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직간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는데, 감정을 빼버린 식사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인간을 단순히 생물적·기계적·생리적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서양의 식사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농민이 정부와 소비자의 눈치를 보는 농정과 유통시스템에 분개한다. 정부와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번듯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온갖 화학약품으로 목욕을 시킨 그런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에 농민들이 이제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한다. 자연식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먹을거리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음식을 멀리서 구하지 말라, 내가 태어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음식을 구하고 될 수 있으면 자급자족하라, 등 저자의 자연식에 관한 생각에도 역시 자연 순환의 원리 같은 게 녹아있는데, 그러기 위해 그가 제안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농업정책 제안을 여기서 한번 들어보자.
저는 사실 국민 모두가 농부가 되는 국민개농의 세상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국민이 농부입니다. 일본의 농지는 정확히 1인당 1단보입니다. 누구나 1단보씩 소유케 합니다. 5인 가족이라면 5단보를 가진다는 것이죠. 옛날 그대로 5단보 농민의 부활입니다. 5단보까지 가지 않더라도 1단보로 집을 짓고 채소를 재배하고 쌀농사를 지으면 5~6인 가족이 먹고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연농법으로 하면 일요일의 여가 정도 농작업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그것으로 생활의 기반을 세우고 나머지 시간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 제 제안입니다.
실로 이상세계가 따로 있다 할 것인가, 일본 현실에 맞는 이야기라면 우리나라 현실에도 맞는 이야기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국민의 80~90퍼센트가 농민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이야기는 결코 환상이나 허무맹랑한 꿈이 아닌 것이다.
미친 미국 농업
저자의 자연농법에는 세계 농업의 현재와 미래를 한 궤로 꿸 수 있는 무서운 논리가 숨어있다. 그런 그의 자연농법의 대척점에 물량으로서의 농사법에 미쳐있는 미국이 있다. 전세계의 식량 패권을 움켜쥐고 있는 나라 미국, 저자가 짚 한오라기의 생각을 들고 미국에 가서 본 미국식 농업은 곧 죽음이었다. 석유로 짓는 단순·무식의 대농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직접 될 수 있는 대로 조목조목 들이대는 대목에선 미국인마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다. 그의 그런 논리는 자연에 대한 관찰력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감각이 가히 천재적이다. 미국 서부의 사막화와 동부의 황폐함의 원인을 금세 알아낸다. 인디언들이 살았던 미국은 최소한 300년 전만 해도 지상낙원이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개척사는 사막화와 황폐화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육식을 주로 하는 미국인들이 나무를 베고 가축에게 풀을 뜯기며 휩쓸고 간 평원은 석유로 짓는 단순화된 농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땅으로 전락했다. 과학농의 한계는 ‘비가 하늘에서 온다고 믿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이제 미국처럼 식물종이 단순화된 땅에서는 하늘로 돌려줄 수분이 없어 황폐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확대되는 농업의 규모가 석유와 기계문명을 불러들였고 이대로 가면 끝이라고 잘라 말하는 저자는 확신한다. 석유가 떨어지면 미국 농업은 바로 망한다, 겉으로는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짜 자연의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고. 그런 나라 미국이 식량을 무기 삼아 세계 주도권을 휘두르는 일은 머지않아 그 끝이 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음은 유엔에서 그가 연설한 내용이다.
미국의 농민이나 국가는 결론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다. 미국은 실은 가난한 나라다. 먹을거리는 보잘것없고 대지는 척박하고 자원도 아무것도 없다. 없기 때문에 석유를 사들여 그것으로 식량을 생산해서 그 식량을 외국에 수출해 그것을 무기 삼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냐? 당신들의 나라가 정말 풍요로운 혜택에 의한 생명의 샘과 같은 식량을 생산하여 국민 모두가 풍요로운 식생활을 해보라.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다른 나라에 수출할 것이 없을 것이다.
책의 말미를, 미국을 추종하는 그의 조국 일본을 개탄하는 말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농업정책을 입안하고 관리하는 지도자들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법’의 창시자인 그가 ‘위대한 정신’ 인디언들에게 지금이라도 배우라고 미국인들에게 던지는 간곡한 메시지는 핵과 식량을 가지고 세계 주도국이 된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곱씹어야 할 과제이다.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연농법’의 소농의 길뿐임을. 국가든 농업이든 확대를 지향하는 정책은 망할 수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이대로 가면 언젠가 어머니 지구의 젖이 고갈되고 인류는 그 고갈된 젖꼭지를 물어뜯으며 울부짖을 날이 오리라는 생각 끝에, 나는 저 작은 자연인 ‘현대의 노자’에게 누군가가 무심코 뱉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떠올려본다.
“인류가 멸망하는 날 사람들은 이 짚 한오라기를 붙잡고 매달리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