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미 지음
녹색평론사, 2010년
‘숫자’와 자본주의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대학이 타락과 변질의 나락으로 끝없이 굴러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앙대가 회계학을 교양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것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경영대를 다니거나 회계학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학생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회계학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중앙대에서는 시인과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도, 음악과 미술에 인생을 걸고자 하는 사람도, 흙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도 꼼짝없이 회계학이라는 ‘숫자공부’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재벌그룹인 두산의 박용성 회장이 이 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벌어진 일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대학 교양과목들은 필요 없다고 본다. 심신의 교양을 쌓는 건 스스로 해야지 왜 대학에서 해주나.” “기업인들에게 ‘중앙대 애들 뽑아놓으니 숫자는 좀 알더라’는 평가를 받는 게 내 목표다.”
압권은 ‘숫자를 아는’ 학생을 만드는 것이 대학교육의 목표라는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 오늘 우리 대학이 자본주의시스템과 기업의 ‘노예 양성소’로 전락했다는 것을 이처럼 뻔뻔스럽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은 없을 듯싶다. 숫자란 무엇인가? 특히 경제논리와 물질논리로 뒤범벅된 ‘자본주의적’ 숫자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란 것이, 회계학이 가르치듯이 그저 회계장부의 대변과 차변 항목에 기록하는 돈의 액수 정도에서 끝나는 것일까?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숫자야말로 자본주의와 현대 산업물질문명의 본질을 가장 적확하게 표상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맹종하고 있는 경제성장률, GNP, 1인당 국민소득, 주가지수, 환율 따위로 표현되는 각종 통계숫자들을 떠올려보라.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이를테면 오늘날의 세상이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GNP란 대체 무엇인가? GNP는 그저 화폐로 환원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재화와 용역의 총생산량을 양적인 숫자로 계산한 것일 뿐이어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하는가 하는 질적인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GNP에는 인간의 전체 생산활동에서 자연이 담당하는 몫은 포함되지 않는다. 또 출산·양육·가사·간병 등과 같은 이른바 ‘돌봄(보살핌)’노동, 농업·수공업·협동조합경제 등에서 많이 나타나는 자급노동, 물물교환과 상호부조 및 봉사활동 같은 것들도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에 전쟁, 환경사고, 무기 생산, 교도소 건설 등과 같은 파괴적 활동들은 모두 GNP에 포함된다. 인명을 살상하고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인간관계를 훼손하고 범죄자를 양산하는 것이 GNP 상승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이런 활동들이 더 많은 화폐와 임노동과 경제성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목하 이 나라 곳곳에서 자연과 생명에 대한 처참한 학살극을 자행하면서 강행되고 있는 4대강 토목개발 사업이 GNP 상승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 또한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마디로 GNP는 삶과 세계의 진상과는 동떨어진, 아니 도리어 그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숫자 놀음’일 뿐이다.
그렇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들 자체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시장과 자본의 법칙에 예속된 한낱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에 불과하다는 것, 자연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무한정으로 착취하고 변형하고 개발하고 이용해도 된다는 것, 모든 사물은 화폐 단위로 측정하고 환산할 수 있다는 것, 행복은 상품의 소유와 소비를 비롯한 물질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 따위를 자본주의시스템의 핵심 논리로 꼽을 수 있을 터인데, 이것들은 모두 ‘돈’을 중심으로 한 ‘숫자’의 야만적인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 아닌가? 결국 오늘의 지배적인 문명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반복 가능한 것으로 재구성하고 생산 가능한 것으로 체계화하여 언제나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로지 화폐 숭배라는 목적에 복무하는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자본주의의 숫자는 획일적이고 맹목적인 폭력성을 내장할 수밖에 없다. 삶의 구체성과 온기가 소거돼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 미만한 그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오순도순 엮어가는 다채로운 사연과 인연들을,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풍성한 과정과 관계들을, 또한 이런 것들을 둘러싸고 신비스럽게 펼쳐지는 그 수많은 삶과 생명의 이야기들을 GNP나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차디찬 숫자가 담아낼 수 있을까? 생명과 존재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연출하는 역동적인 파노라마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 생의 마디마디마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빚어내는 갖가지 종요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저 물화(物化)된 숫자들이 알고나 있을까?
그러므로 이러한 숫자의 신화와 돈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자본이 사육하는 ‘경제동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계학을 전교생의 교양필수로 강제하는 오늘의 대학이 노리는 바가 바로 이것이리라. 기업이 써먹기에 편리한 효율적인 상품으로서의 노동력과, 자본주의시스템의 운용에 필요한 잘 길들여진 ‘부속품’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대학의 존재이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어느 고려대생이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글로벌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버린” 대학을 거부하고 나선 사건이 의미 있는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사랑으로서의 가난, 가난으로서의 사랑
이런 때에 반가운 책이 나왔다.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가 쓴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가 그것이다. 사실 타락한 것이 어디 대학뿐이랴. 대학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정신적·문화적·지적 생태계 전반이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의 출간을 반기고 기뻐하는 이유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이 어두운 시대와 세상을 향해 이 책이 발하는 순정한 인문정신의 빛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타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그 모든 주류 시스템, 제도,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서는 저항의 깃발. ‘상투성의 세계’를 넘어 사물의 근원과 궁극을 집요하게 탐색하고, 그럼으로써 기어이 현실의 뿌리와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한 지식인의 지적 고투의 열매. 오늘날 극한에 이르고 있는 인간과 삶의 위기, 사회와 공동체의 위기, 생태와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문적 담론 투쟁의 기록. 뭉뚱그리자면 이 책을 이렇게 평해도 큰 무리는 아닐 성싶다.
이 책은 글 모음집이다. 그래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도 다종다양하고, 글의 형식도 본격 에세이, 서평, 역자 해설문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지은이의 일관된 문제의식과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안목이 책 전체에 공통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각 글들이 이질적이라는 느낌은 그리 들지 않는다. 특히 서평이나 역자 해설이라 해도 깊이 있는 사유와 성찰, 그리고 글 자체의 완결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빼어난 독립적 에세이로 읽어도 무방하다. 독자 입장에서는 목차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관심이 가는 글부터 찾아 읽는 것도 하나의 독서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이 가리키듯이 이 책을 관통하는 포괄적인 메시지는 이 추악한 ‘마몬의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한 ‘생명의 논리’다. 이 생명의 논리가 각 글들에서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변주되고 교직되는데, 나의 독후감으로는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열쇳말은 ‘사랑’과 ‘가난’이 아닌가 한다. 이는 첫번째 글에서 소개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 이야기에 대한 예수의 비유를 설명한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널리 알려졌듯이 이 이야기의 내용은, 포도밭 주인이 일꾼을 쓰는데 아침 일찍부터 나와 종일 땀 흘리며 일한 사람이든 오후 늦게 나와 잠시만 일한 사람이든,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은 품삯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통념이나 현대경제학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얘기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의 해석은 독특하다.
지은이는 이렇게 풀이한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경제성장에 근거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와, 제한된 물자와 재화에 근거한 고대 농업경제 사회의 작동원리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은 품삯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끝없는 경제성장이라는 근대적 전제에 근거한 것이다. 재화가 한정된 고대 농경사회에서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가 더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회 전체가 가난과 불편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다시 말해 고르게 가난해야만 공동체의 생존과 ‘함께 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개가 끄덕거려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유한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끝없는 진보와 성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가난할 준비를 갖출 때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결국 민주주의와 성장의 한계 그리고 전 지구적인 생명의 문제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깊은 메시지를 명료하게 밝혀주는 이러한 전복적 통찰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사랑’을 물질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가난’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 그렇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만 행복할 수 있거니와, 결국 이 이야기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새로운 삶의 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야수의 길’과 ‘인간의 길’
이런 입장에 설 때 지금 우리사회와 이 시대가 처한 현실이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명한 일이리라. 우리사회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저버리는 방향으로만 질주해왔다고 가슴 아파하는 지은이는 “사소한 물질적 만족을 위해 자유와 명예를 파는 이기심과 정신적 마비에 의해 우리는 모든 것을 악마화하는 사회질서를 유지, 존속시켜왔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마몬’이 지배하는 극도의 물신사회다. 유념할 것은, 오늘날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성장지상주의와 개발만능주의, 경쟁과 효율과 속도에 대한 무한숭배, 진보와 발전에 대한 맹목의 신화가 망가뜨리는 것은 자연생태계와 사회공동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성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인문주의자로서 지은이가 가장 민감하고도 예리하게 착목하는 지점도 이 대목이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이 얘기하는 것처럼 오직 힘에 대한 긍정만이 무소불위의 원칙으로 군림하고, 밑에서부터 자유로운 질서를 자주적으로 형성하는 민주적 능력이 위축되며, 각 개인은 정신의 독립성을 상실한 채 영문을 알 수 없는 불만족감과 열등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하여 모든 인간경험과 인간관계가 물화되고 사물이나 타인과의 살아있는 교섭이 사라지며 삶을 향유하는 능력을 상실한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며, 사회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이는 살벌한 전쟁터라는 전제를 토대로 하여 굴러가는 자본주의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여전히 살아갈 것인가?
여기서 절박하게 필요해지는 것이 ‘새로운 인간학’이다. 탐욕과 이기심과 경쟁의식에 찌든 ‘야수의 길’이 아니라 진정한 품위와 존엄성으로 무장한 ‘인간의 길’을, 자본과 국가의 논리가 내면화된 ‘노예의 길’이 아니라 존재와 삶을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주인의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지은이가 각별히 강조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대한 감각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책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본래 살아있는 관계란 ‘너’의 자유의 영역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과 타인의 살아있음에 대한 의식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곧,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감각, 나아가 사람이나 권력이나 돈이 손댈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감각,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갖는 경외심의 근거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불경(不敬)과 야만의 세월을 강요하는 오늘의 물신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난에 대한 성찰로도 이어진다. 산업주의적 근대의 모든 천박함과 오만은 인간적 삶의 조건으로서 고난 자체를 제거하고 관리하겠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전문가들은 고통 없는 세계, ‘멋진 신세계’에 대한 판타지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펼쳐보인다. 그러나 그 ‘멋진 신세계’의 도래와 함께 만일 정말로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자유와 자치의 기회를 빼앗기고,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 인간기계, 자동인형이 되어 전문가들의 조작과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노예의 세계이다.” 결국 고통과 결핍과 불편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이 제 발로 서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필수조건인 셈이다. 인간적 상상력, 신비와 무한에 대한 삶의 감수성, 권력이나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의 독립성, 민주주의의 근본정신, 종교와 예술이 구현하고자 하는 생명의 본질 등도 두루 이런 감각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만과 무지와 탐욕에 중독돼 끝도 없이 물신의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있는 오늘의 현대문명에서,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 세상에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과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인간의 길이라는 인식은 매우 긴요하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지 않는 능력’의 중요성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경제성장을 더 밀어붙일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 이제 그만 멈춰 세우는 능력, 핵무기를 더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 거두어들여 폐기하는 능력, 언젠간 인간복제마저도 실현할지 모르지만 생명공학의 폭주에 우리 스스로 제동을 거는 능력, 바로 이런 종류의 능력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청하는 지혜와 용기의 고갱이가 아닐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이에 견주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스스로 절제하고 다스려 그 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능력의 극대화를 맹신적으로 추구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 아름다운 일, 선한 일에만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미 예수가 모범을 보였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돌로 떡을 만드는 기적을 행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마귀’의 시험을 받은 저 광야의 예수는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가 이렇게 마귀를 물리치고 이겼듯이, 우리도 이 시대를 지배하는 ‘마몬’을 이런 식으로 물리치고 이겨야 한다.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내리치는 죽비소리
이 책은 여러 글을 통해 한국 기독교와 교회를 준열하게 질타하고 있다. 매서운 비판과 신랄한 경고, 강도 높은 추궁이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몇대목만 옮겨보자. “특히 보수 개신교를 생각하면 절망적인 생각이 든다. … 차라리 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게 낫겠다는 성마른 생각이 자꾸 든다.” “지금 기독교는 혈관 속속들이 끈적끈적한 기름이 끼어 비대한 살집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잠시 더 버티겠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죽어가고 있으며, 죽어야 한다.” “혹세무민식의 교리와 선전선동이 판을 치고, 돈으로 하는 교회 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이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절을 하고 둘러앉아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예수의 교회’는 ‘마몬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오늘 한국교회는 종교의 탈을 쓰고 민중을 지배하려는 허위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사실 배금주의와 성장주의, 패권주의와 기득권주의, 오만과 독단, 위선과 허위의식 따위로 얼룩진 오늘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높은 안목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건강한 상식과 소양만 갖추고 있어도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를 정상적이라고 여길 사람은 드물다. 정작 이 책이 돋보이는 대목은 비판과 질타를 넘어 진정한 예수정신과 하느님나라란 무엇인가, 참된 ‘믿음’과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궁구, 그리고 새로운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망쳐놓은 ‘가짜 예수’가 아니라 맨 얼굴의 ‘진짜 예수’를 만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런 만남을 통해 비단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기독교와 무관한 독자들도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모색의 길로 안내해준다.
흔히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일컫는 예수의 잔치 이야기가 있다. 익히 알려졌듯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이 함께 나누어 먹고도 열두광주리나 남았다는 내용이다. 지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가난한 민중이 예수와 함께 경험한 공동체적 삶의 넉넉함과 기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예수와 민중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소유와 삶과 마음을 함께 나누며 경험한 자치의 환희, 자급의 감격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밑바닥 풀뿌리 민중이 함께 이루어가는 ‘공생공락의 가난’, 곧 상호협동과 호혜를 바탕으로 일구어나가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의 이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전체제, 그리고 헤롯의 통치하에서 고통받던 예수 당시의 갈릴리사회를 설명하면서, 지역 촌락공동체의 갱신과 재활성화, 그리고 가족과 전통적 삶의 부활이 예수가 벌인 하느님나라 운동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즉, 예수운동은 로마제국과 통치자 헤롯의 도시화정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와해되고 공동체적 삶의 토대였던 가정과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 민중들이 공동체와 삶을 회복하기 위해 벌인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예수가 벌였던 밥상공동체 운동과 치유, 축귀(逐鬼) 행위 등은 전통적인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민중적 삶의 지혜를 부활시키는 행위로 번역된다.
한편으로 책은 예수의 사랑과 희생에 담긴 심원하고도 오묘한 의미를 전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진술들이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신앙 일반, 나아가 보편적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한 천착으로 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묻는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이것은 여러 동서양 종교들 사이의 차이점과 관련한 아주 고전적인 질문인데, 이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답한다. “정말로 종교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있는 종교경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기보다 ‘이것도, 저것도’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발언은 지은이의 신학적·종교(학)적 사유의 성숙한 깊이와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여기서 드러나는 균형 잡힌 시각과 열린 자세는 지독히도 편협하고 배타적인 오늘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요컨대, 살아있는 인간만이 살아있는 종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와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하는 대목은 또 어떤가. 책은,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세상의 중심, 곧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 리 호이나키의 “중심은 어둡고 천하고 낮은 곳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빛을 초월하는 ‘빛’에 감촉될 수 있다”라는 발언을 전하면서,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라고 강조한다. 하느님이 지상의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민중으로 살다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올림을 받았다는 것, 바로 이 성육신의 사건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수를 죽이는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가 곧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가 되고, 세상의 가장 낮고 비참한 곳이 곧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우리가 절망과 고난 속에서도 삶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책은 시야를 넓혀 하느님나라에 대해서도 논한다. 강자들이 독과점하고 있는 돈과 권력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만드는 우정과 환대의 그물망이야말로, 민중의 사랑과 희망으로 열어나가는 바로 그러한 동무들의 나라, 친구들의 나라야말로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보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수천명이 보리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마리로 배불리 먹었다는 등의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그들을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우정과 연대를 나누는 인간으로 다시 탄생시켰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런 하느님나라가 어찌 기독교와 교회만이 독점하는 나라이겠는가. 이런 예수가 어찌 기독교와 교회만의 울타리 안에 갇히겠는가. 하느님나라는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동시에 나의 마음 안에 건설해야 할 우리 모두의 나라, 민중의 사랑과 우정이 만발하는 나라다. 예수 또한 기독교의 예배당 안에만 존재하는 화석화된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어깨동무하여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하느님나라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민중의 동무, 광장의 친구다. 아마 ‘구원’이라는 것도, 이러한 예수와 더불어 이러한 하느님나라를 열어나가는 과정에서 가닿게 되는 그 ‘무엇’ 혹은 그 ‘어디’일 것이다.
참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글 서두에서 오늘 우리 대학이 처한 현실을 잠깐 살펴보았거니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지은이도 그런 대학에서 꽤나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다. 책의 머리말 격인 글에서 지은이는 진솔하게 고백한다. “논문이라는 형태의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행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 미련하게 표절이 들통나게 논문을 쓰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것도 표절이라 본다면 내가 쓴 논문 중 베끼지 않은 논문은 없고, 표절 아닌 논문도 없다. … 극소수의 천재들이나 아니면 사기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현재의 학술시스템은 강요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겪으면서 지은이는 “‘진보냐 보수냐’라는 판에 박힌 틀이나 이념이 아니라 피상적인 현실 근저에서 맥박 치고 있는 ‘살아있는 세계’에 입각해서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요컨대 ‘상투성의 세계’를 넘어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절박함만이 진정으로 새롭고 진실한 말과 글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고 한다.
책에서 이런 얘기는 글쓰기에 대한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확장되고 심화된 ‘지식인론’으로 나아간다. 내가 읽기로, ‘자유로운 인간정신’이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가장 중핵적인 속성이자 덕목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견해가 아닌가 싶다. “물질과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과 주체를 잃은 상태에서는 창조성이 나올 수 없고, 결과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도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성과 경쟁력은 굴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정신에서 나오고, 거기서 문화적 품위가 생겨난다”는 지은이의 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이 자유로운 인간정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그것은 지배적 현실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옹골찬 직립의 주체성으로 기성의 모든 제도와 권력과 고정관념에 일단 ‘딴죽’을 걸어보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딴죽’은 의심과 불화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 요구될 것이다. 지은이가 지식인의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삶으로부터 도피한 이탈이 아니라 ‘자유’의 심리학적 근거로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주류 세계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사유의 세계로부터 힘을 받아 세계 자체를 문제삼고, 다시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만드는 역동적인 이탈이다”라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탈을 통해, 다시 말해 이러한 ‘자유로운 걸음걸이’로 체제 밖으로 걸어 나간 후 무엇을 만나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것은 바로 민중이라고 말한다.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보자. “참된 문화란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지나 괴로움과 시련을 뚫고 나온 민중들의 삶의 생생한 기록이고, 과거와 현재 지식인들이 외로운 ‘거리두기’ 끝에 얻은 절실한 깨달음의 표현이자 기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란 자기비판의 전통이고, 그 비판의 주요 내용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지금 지구상에서 신음소리 하나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리 없이 사멸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자기 밖에 있는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자기가 속한 곳에 예부터 전해내려온 마음의 습관에 대한 속깊은 존중, 이런 것들이 예술가나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지식이 사고파는 상행위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대학과 학문이 자본과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익숙한 얘기다. 이런 현실에 무감각하게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나아가 이런 타락하고 부패한 메커니즘을 아파하고 슬퍼하고 치욕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는, 이 책의 주장이 무척이나 낯설고 불편하리라. 그러나 대학과 학문과 지식인이 자신의 본래 자리를 되찾고, 그리하여 시대와 민중이 필요로 하는 참된 ‘빛과 소금’이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전하는 목소리에 공감과 연대의 악수를 청하리라. 마침 이 책에는 함석헌, 리영희, 톨스토이, 리 호이나키, 웬델 베리 등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동시에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을 상징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이 다수 실려있다. 지은이가 자신의 관점에 따라 풀어놓은 이들의 삶과 사상, 그리고 실천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식인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지금의 질문과 관련해서도 되새길 바가 적지 않다.
언어의 타락과 대한민국의 자화상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을 얘기해두어야겠다. 지은이가 언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남다른 감수성이 그것이다. 책의 곳곳에서 지은이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언어’라는 프리즘을 통해 관찰하고 파악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취한다. 그러면서 언어의 혼란과 타락이 그 현상이나 사건에 내포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중대한 구실을 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강조한다.
예컨대,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 어느 글의 한대목을 보자. “… 이 과정에서 검찰, 경찰, 감사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이 이명박 일개인의 정치도구화됐을 뿐만 아니라, 헌법의 기본정신과 민주주의가 깊은 상처를 입었고, 언어가 훼손됐다. 임기가 남은 공영방송 사장을 내쫓고 자기 측근을 사장 자리에 앉혀놓고는 그걸 ‘방송 정상화’라고 부른다.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합법’이고, 헌법이 보장한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법치’다. 다른 모든 탈법행위들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언어 혼란’의 죄 하나만으로도 100년쯤 감옥을 살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 혼란’은 아이들 교육에 정말 안 좋기 때문이다.” 또 황우석 사태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에서 당시 ‘난자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여인들’, ‘난치병 환자의 희망’, ‘국익’ 따위의 말들이 횡행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꼬집는다. “돈과 실용적인 목적이 과학과 학술을 접수했을 때 생기는 이런 종류의 언어의 혼란 내지는 언어의 남용은 견디기 힘들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언어와 실제의 불일치, 언어 문란은 우리사회 지배집단의 정신적 파탄 상태, 자의식의 부재를 드러낸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예민하고도 날카로운 감각과 문제의식은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매우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문학자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고, 요한복음 1장에도 말씀이 곧 하느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식과 실천의 뿌리에는 언어가 자리잡고 있다. 역사를 보더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과 언어부터 망가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독재권력과 파시스트들의 공통적인 속성이자 통치전략이었다. 어찌 보면 ‘싸움’에서도 궁극적으로 승패를 가르는 것은 결국 언어 투쟁, 담론 투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안 그래도 오늘날 우리는 언어 타락과 혼란의 극치를 뼈저리게 목도하는 중이다. 이명박 정권이 강행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이 그 대표 사례다. 저들은 수십년을 이어온 유기농단지를 깡그리 갈아엎으면서 세계유기농대회를 열겠단다. 그렇게 유기농을 파괴하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멸종 위기종들과 이들의 서식처를 마구잡이로 결딴내면서 그 자리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따위로 치장한 ‘생태공원’을 만들겠단다. 조상 대대로 강변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어온 수많은 농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고 그들의 생존권을 유린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겠단다. 하천의 자연적인 흐름을 복원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객관적 사실에는 애써 눈을 감은 채, 포클레인과 불도저 따위의 쇳덩이를 총동원해 멀쩡한 강을 콘크리트로 처바른 인공수로로 만들면서 ‘물 관리 글로벌 리더’가 되겠단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연과 사람과 문화와 역사를 난폭하게 ‘죽이는’ 것이 4대강 사업의 실체임에도 이것을 4대강 ‘살리기’라고 강변한다. 국토 생태계의 골간이자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젖줄인 강의 숨통을 끊어버리면서도, 이러한 야수적인 막개발과 건설의 난장판에다 ‘녹색’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언어가, 말과 글이 이처럼 극도로 타락하고 변질되고 거꾸로 선 곳에서 어떤 존재라도 제 운명이 온전하기를 기대할 순 없다. 언어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적·윤리적 기초, 곧 공동체의 정신과 문화와 지성이 허물어졌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읽으며 ‘맑은’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언어를 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즐거움을 핑계 삼아 한가지 희망사항만 밝혀두자. 앞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다양한 내용과 형태의 글을 모은 것이다. 책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그래서 앞으로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것이든, ‘새로운 인간학’에 대한 것이든, 문화와 정신에 대한 것이든, 학문과 지식인에 대한 것이든, 어떤 주제를 좀더 집중적으로 파고듦으로써 지은이의 ‘내공’이 한층더 본격적이고 심층적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후속 저작을 만나고 싶다. 이것은 지은이가 비판한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로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터, 그럼으로써 이 지리멸렬한 ‘마몬의 시대’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 ‘생명의 논리’가 더욱 풍성하게 채워지고 날카롭게 벼려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만약 그런 책이 나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 책의 첫번째 독자가 될 의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