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자 박경미 교수가 종교, 사회, 인문교양에 관하여 형식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사색하고 탐구한 결과물이다.
오늘의 이 물신주의, 마몬의 세상과 불화하고, 스스로 외톨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풍부한 기독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근원적으로 시대와 사회를 진단하고, 우리 시대의 양심들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는 이 책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고, 희망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1부 살아있음의 신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도덕적 경제
함석헌, 살아있는 의 이야기
진리를 향한 순례자, 톨스토이
‘진보’와‘희망’에 대하여 . 리영희 선생에 대하여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리 호이나키‘깊이읽기’
‘살아있음’의 신비, ‘알지 못함’의 인식론 . 웬델 베리와 에드워드 윌슨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해설

2부 작가와 현실
운명에 맞서서, 운명과 더불어 . 바흐만 고바디 영화론
작가와 현실 . 조지 오웰과 전체주의
갈릴리의 농민과 예수 .R. 호슬리의 예수 이해
‘경쟁’과‘품위’ . 박노자의 《우승열패의 신화》를 읽고
‘죽음 수밖에 없음’의 의미 . 과학기술과 윤리
살아있는 종교 . 종교의 틀과 인간 삶의 역동성에 대하여

3부 어떻게 살 것인가
당신들의 법, 우리들의 정의
이른바‘실용주의’의 내면성에 대하여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지식인과 염치
어떻게 살 것인가
희생 지율과 예수
사람됨과 교육
‘국가의 마법’과 지식인의 상상력

저자소개

저자 소개

박경미

1959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저서로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 《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등이 있고, 역서 《삶은 기적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생태학적 치유》 등이 있다.

소개의 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경미 교수 자신의 말대로, ‘참된 학문’은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붙들고 고민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야말로 비록 에세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한국사회의 한 기독교학자가 현실에 발 딛고 성실하게 고민한 결과, 진정한 학문적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진보냐, 보수냐’라는 판에 박힌 틀이나 이념이 아니라 현실 근저에서 맥박 치고‘살아있는 세계’에 입각해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절박함만이 진정으로 새롭고 진실한 말과 글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간디, 톨스토이, 함석헌, 리영희, 웬델 베리, 리 호이나키 등 저자가 마음에 가까이 두고 공부한 우리 시대의 양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비범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평범하고 진실하게 생각했으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즉 삶의 단순한 부름에로 돌아가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들은 민중의 자발성과 자치,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삶의 지혜를 신뢰하며 스스로 ‘거룩한 바보’가 되려고 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수치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근대와 근대적 정신이 지배하는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세계에서, 기독교의 탈을 쓴 마몬을 섬기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저자는 예수와 예수운동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저자가 이해하는 예수가 벌였던 밥상공동체운동과 치유, 축귀 행위 등은 공동체적 삶의 양식과 민중적 삶의 지혜를 부활시키는 행위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바닥에서 솟아나온 자생적인 공동체운동으로서, 자발적인 삶의 회복 운동이었다. 국가, 경제, 학교, 교회 등의 제도와 세계화, 자본주의, 경제성장, 복지라는 추상적 개념에 갇혀, 인간 생존의 근거지는 땅(흙)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점점 더 무력하고 노예적이며, ‘품위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하느님은, 교회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개인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사회를 저마다 이익을 좇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장으로 보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대전제를 저자는 근본적으로 “불경(不敬)스럽다”고 정의한다. 저자는 경제문제를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보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또 자신이 살아가는 자연의 터전에 대해 책임을 회복하는 일이 경제행위에서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말한다. 포도원 품꾼(마태 20:1.16) 비유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경제의 치명적인 결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행동은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공정하며, 자비로운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원리는 경제성장인데, 그것은 즉 무한한 재화, 무한한 자원, 무한한 수요라는 가능하지 않은 전제에 근거해있다는 뜻이다. 지구라는 분명한 한계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제한된 물자와 재화, 자연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라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 원리를 인정할 때, 더불어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고르게 가난한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못난 꼴찌도 공동체에 필요한 인간으로서 불러주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가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내용이다.
자본과 과학이 공모하여 만들어낸 발전이라는 이 시대의 신(神)은, 일체의 문제가 해결되고 괴로움도 없는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런 미래는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객관적 한계와 윤리적 요구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설적으로 무엇이든 가능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지향의 실현 가능성이나 윤리성은 차치하고라도 현대 과학과 기술이 떠받치고 있는 현대 산업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신비한 기적으로서의 삶’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고, 이 한계 의식이야말로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경쟁과 발전이라는 이 시대의 정언명령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호소한다.

“현실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상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실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 지금 이 사회는 다 같이 미친 듯이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고, 그 방향은 인간다움과 인간적 가치를 뿌리로부터 손상시키는 물신주의의방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인문학자들이 해야 할 말은“폭주를 멈추라!”라는 경고이다. … 그리고 기존의 경쟁시스템을 바꾸어나갈 사람을 단련해내는 급진적 진지가 되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사람 하나하나를 붙들고 작고 소박하게,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