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호이나키 지음
녹색평론사, 2007년
이반 일리치의 오랜 친구인 저자 리 호이나키가 자신의 경험과 특유의 통찰력으로, 현대사회의 다양한 면을 날카롭게 분석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어찌 보면《녹색평론》에서 자주 보았음직한 이야기, 하지만 ‘비틀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나아간’ 리 호이나키의 삶은 내게 많은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삶 자체가 비틀거림의 연속이었던 것은 리 호이나키와 비슷하되, 나는 제자리에서 머뭇거리기만 했기 때문일까. 이미 앞서 나아간 리 호이나키는 좌고우면, 머물러 있는 나를 채근하며 이렇게 질책한다. 이라크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제국주의 탓이라고? 천만에, 바로 네 탓이야. 반생태적인 개발과 투기가 난무하고 비인간적인 경쟁과 성장주의가 난무하는 것은 탐욕에 넘치는 정치인이나 장사꾼들 탓? 웃기지 마라, 그것도 네 탓이다. 우리사회에 한미FTA가 대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거짓말 잘하는 이가 국토 파괴를 공약으로 내세우고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것도 네 탓이야…. ‘문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 오직 내 자신,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비틀거리고 머뭇거리기만 했던 스스로의 삶을 다시 돌아본 것도 리 호이나키의 이런 질책 때문이다.
몇년 전《녹색평론》에 먼저 소개된 이 책의 한 장〈‘아니오’의 아름다움〉을 읽고 내친 김에 인터넷서점 아마존으로 원서까지 주문해 떠듬떠듬 읽을 즈음, 나는 일년째 채식중이었다. 어쩌다 고기 먹는 일의 반생태성을 알고 난 뒤, 지금 여기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은 결과였다. 그렇다고 영양을 고려해서 식단을 따로 만들어 실천한 채식은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중에 고기나 생선, 계란, 우유 따위는 안 먹고 곡류나 채소로 된 것만 먹는 식이었다. 육식을 그리 좋아하는 체질이 아니어서 어려움은 없었으나 문제가 없진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하루 세끼 모두 식당에서 해결하는 이는 잘 알겠지만, 식당 메뉴의 대부분에는 고기나 생선이나 계란이 섞여 있지 않은가. 특히 일주일에 서너 차례 정도는 있었던 술자리 안주의 대부분은 육류나 해물이었다. 그러니 막걸리를 마시든, 소주, 맥주, 양주, 폭탄주를 마시든 내가 먹는 안주는 주 메뉴에 딸려 나오는 김치나 나물, 두부 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땐 이런 것조차 없어 맨 술만 마신 것도 여러 차례였다.
삶의 방식을 온전히 바꾸지 않은 채 질투하고, 경쟁하고, 소비하고, 술 마시며, 채식으로 시늉만 내는 생태주의의 실천이 실패로 끝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2년 겨울인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산에 다녀온 뒤 종아리가 근질거려 긁었더니 진물이 나면서 부스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쌀알만하던 부스럼은 점점 커져갔지만 그렇다고 냉큼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워낙 병원을 싫어하기도 했지만, 많은《녹색평론》독자들처럼 나 또한 현대 의료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부스럼을 낫게 할 생태적인 치료법을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뭔가 몸에 면역이 부족해서 부스럼 같은 것도 생겼을 것, 그러면 어지러운 생활을 추슬러 면역력을 길러주는 것이 급선무일 터였다. 문제는 그게 머리로는 쉽지만 몸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직장인에게 부쩍 심해진 스트레스와 과로에, 매일 한 갑씩 피워대는 담배, 하루가 멀다 하고 마시는 술, 게다가 주말이면 몸을 혹사하다시피 하는 먼 산골의 농사일까지 겹치다 보니 그나마 견디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몸이 더 나빠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종아리의 부스럼은 갈수록 악화하는데, 몇달 뒤엔 설상가상으로 양손 검지에 습진 같은 게 생겨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점점 커져 양손 검지가 제 모습을 잃고 손톱까지 모두 빠져버리자 주변에서는 병원에 가라고 난리였다. 손톱이 없는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 치기도 어려워지자 이젠 내 고집도 한계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예상했던 대로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영양실조요. 재발하지 않으려면 잘 먹으시오.”
손가락의 습진과 다리의 부스럼은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른 지 일주일 만에 간단하게 나았다. 그 뒤 어느 날 술자리에서 고기를 먹기 시작한 이후 슬금슬금 채식을 중단했더니 부스럼이며 습진이 다시 생기지도 않았다. 채식을 시작한 지 2년도 채 못 됐을 때였다.
몸과 마음은 그대로 유지한 채 머리로만 온전한 삶을 추종하며 10년 가까이 망설임만 거듭하고 있는 게 또하나 있다. 바로 귀농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언젠가 농사를 짓겠다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강원도 산골의 값싼 밭을 구입한 게 2001년 가을이었다. 그 이듬해부터 빠짐없이 농사를 지었으니, 올해로 6년째 농사를 지은 셈이다. 그 사이 직장에서 6개월 휴직을 얻어 산골에 머무는 참에, 구들방이 있는 오두막도 하나 지었다. 산골 주말 농사는 참 힘들었지만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오죽하면 지난 6년간 해마다 3~11월까지 주말의 90% 이상과 그동안 얻었던 모든 휴가를 그곳에서 보냈을까.
그럼에도 아직까지 귀농을 단행하지 못하는 핑계는 많다. 머잖아 아이가 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가야 하는데 산골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가뜩이나 먹고살기가 쉽지 않아 강퍅해진 농촌 인심이 2~3년 전 투기광풍이 몰아치면서 서울보다 더 살벌해졌지 않은가, 가난은 그럭저럭 감수한다 하더라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본격 발효하면 그곳에서 최소한의 생존은 가능할까…. 선이골 김용희 씨, 서울에서 약사를 하다 화천 산골로 내려가 남편과 함께 ‘하늘학교’를 열고 자연 속에서 다섯 아이를 기르던 이가 40대 아까운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도 충격이었다. 이런 가운데 얼마 전엔 그 산골에서 홀로 10여년 농사를 지으며 가족처럼 지내던 할머니가 여든이 다 된 연세에 누군가에 의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흉사도 겹쳤다.
신변 이야기가 길었다. 이렇게 길 떠나지 못해 다양한 구실을 마련하는 와중에도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에 완전히 눈을 감거나 진정한 삶에 대한 꿈이 사라지지 않은 건 끊임없이 리 호이나키 같은 이들이 잦아들어가는 내 의식을 일깨워주기 때문이었다. 리 호이나키는 현대인을 이렇게 본다. 교만이나 분노, 탐욕이나 정욕에 유혹 당하면서도, 선택은 스스로 할 수 있었던 예전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조건 반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역사상 가장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다고. 다른 이가 투기를 해서 돈을 벌면 나도 질투하며 질세라 투기에 뛰어들어야 하고, 누군가 새 자동차를 사거나 해외로 관광을 떠나면 나도 조건반사적으로 자동차를 사거나 해외로 떠나야 한다. 결국 인간을 노예화하는, 그런 조건반사적인 소비가 없으면 현대 자본주의 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내가 지금 여기서’ 탈출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지 않고도, ‘힘든 노동의 삶’을 살지 않고도,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몸소 집 없는 사람과 거리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고도” 말로는 일관된 논리를 가진, 위대한 이론가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바르다고 믿는 삶을 힘들여 좇지 않으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나 한 사람이 비참한 존재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이 시대의 반인간적인 경제주의, 물질주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까지 있다고 리 호이나키는 강조한다. 그가 자신의 삶에서 ‘비틀거리는’ 가운데도 스스로 최선이라고 믿는 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 것도 이런 신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제국주의에 항의해 단행한 베네수엘라로의 자발적 망명이든, 정년보장 교수를 그만두고 전기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든, 시골에서 대학 식당의 부엌 일꾼으로 취업해 거기서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든….
이쯤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용기’다. 이와 관련해 리 호이나키가 책의 마지막에 길게 언급한 아나키스트, 우리 시대의 ‘자발적인 바보’이자 ‘거룩한 바보’ 애먼 헤나시의 삶은 특별한 감동을 준다. 소로우의 사상을 몸으로 살며 국가에 대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대해, 일관되게 ‘아니오’ 하며 맞서던 헤나시는 살인범에 대한 사형선고에 항의해 단식과 피켓시위를 벌이다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리 호이나키가 스스로 비틀거리며 끝없이 나아간 이야기를 쓴 이 책에서, 이 ‘거룩한 바보’ 헤나시를 길게 이야기한 것은, 이 책의 독자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싶어서일까. 그는 말한다. 이제 온 삶으로, 길 떠나라고. 지금껏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도 줄곧 망설이기만 하던 내가 마침내 길 떠날 수 있다면 그건 리 호이나키 같은 이가 끊임없이 용기를 주며 채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