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호이나키 지음
녹색평론사, 2007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아침, 지금 춘천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일종의 축복처럼. 그리고 나는 방금 축복으로 치면 ‘춘천에 오는 눈’과 거의 다르지 않을《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다 읽고 난 터다.
나는 사실, 리 호이나키의 이 글에 대한 서평 원고를 지난 말일까지 줘야만 했다. 그러나, 내 책읽기의 속도가 원체 늦은 데다가 이 책은 또 그렇게 후다닥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원고가 좀 늦어지더라도 천천히, 진정한 의미에서 저작(咀嚼)하듯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었다. 책 말미에 이 책을 번역한 김종철 선생이, 그 책이 발간된 직후였음에도 내가 왜 좀더 일찍 이 책을 만나지 못했을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쓴 것처럼, 나 또한 그렇다. 나는 그리고 뒤늦게나마 이제야 제대로 된 스승을 한분 만난 기분이다. ‘正義의 길로’, 어떻게 가느냐 하면, ‘비틀거리며’ 가는 자발적(거룩한) 바보라니.
11장, ‘멕시코의 별’ 편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지난해 10월에 다녀온 터키에서의 일들이 생각났다. 나는 비록 비행기로 다녀왔지만. 터키 카이세리 예르지에스대학에서 한․터 문학교류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멀리 이즈미르라는 곳에서 열두 시간을 걸려 버스를 타고 온 알리 선생님. 돌아갈 때에도 또 버스를 타고 가는 노인은 천진하게 말했다. 올 때에는 잠을 자 버려서 못 봤던 풍경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부디 잠이 들지 말기를 바랄 뿐이라고. 나는 늘 그런 선생님이 그리웠다. 퇴직한 학교의 아이들을 보러 하루가 꼬박 걸리는 길도 마다않고 오는 선생님. 그리고 그 길을 오가며, 그 길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통과하며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사람. 그리고 리 호이나키처럼 박사학위에 대학교수임에도 화장실 청소를 할 수도 있는, 화장실 청소를 업으로 삼을 수도 있는 그런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 “중심은 어둡고, 천한, 낮은 곳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빛을 초월하는 ‘빛’을 감촉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선생님. 그리고 그렇게 말해주는 선생님은 지금 바로 그곳에 있다! 가장 낮고 천하다고 말해지고 어두운 바로 그곳에.
이 책의 일부가 그동안《녹색평론》에 소개되었다는데 왜 나는 그를, 이렇게까지 가슴 벅차게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이렇게 책으로 엮이고 나니, 이제 모든 것이 좀더 확실해졌다. 나는 사실 이 책을 많은 부끄러움 속에, 가슴 절절하게 읽었다. 그리고 조금의 반발심이 이는 것도 지그시 눌러가면서.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예란, ‘진보’와 ‘연대’에 관해서 말할 때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그 감동에 젖어, 그동안 내가 지니고 키워왔던, ‘진보’와 ‘연대’가 좋은 가치라고 여겼던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꼭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지금 조금 불편하다. 불편하면서도 좀더 깊어질 수 있는 끈 하나를 붙잡은 것은 확실해서 기분은 좋다.
단언하건대, 이 세상은 참으로 야만이다. 야만의 세상을 그래도 덜 야만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 혹은 장치가, 나는 진보를 향해 가는 연대라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호이나키는 ‘아동기(兒童期)라는 중독현상’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려면 “타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이데올로그들이 만들어낸 공허한 환상에 불과한” 연대도 하지 말고, 짐승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가려는(이것이 ‘진보’에 대한 필자의 소박한 생각이다) 일체의 몸짓이란 것도 사실은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의 노예”가 되고 마는 길이므로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이렇게 묻고는 있지만,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실은 ‘품위’에 관한 것임을 알고 있다. 사실 우리는 그가 지적하고 있지 않아도, 폭력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횡행하는 세상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져 있는 꼴이다. “기껏해야 소비자, 혹은 관광객으로서의 삶이라는 극히 천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 우리사회 사람들은 그들의 자식들을 일로부터 박탈된 “불구화”된 사람으로 만드는 폭력을 거침없이 휘두르고 있다.
이 책은 미국사람이 쓴 것이지만, 나는 이 책의 글 한편 한편을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와 대조해 보며 읽었다. 그리고 그의 글은 나와 내가 사는 사회의 사람들과 우리사회를 돌아보는 데 더없이 유용한 생의 지침서가 될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호이나키가 지적했듯이 요즘 내가 보는 많은 사람들은 어른이면서도 너무 어리다. 어린아이들이 감정조절 없이 내키는 대로 거친 언행을 보이듯이 오늘날 이 사회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이 쓰는 말에서 ‘시적 언어’에 대한 고려는 찾아볼 수 없다. 시적 언어에 대해 일말의 재고도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보험과 증권과 아파트와 사교육이다. 보험과 증권과 아파트와 사교육이라는 천박한 폭력의 기호들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 홀연 호이나키 같은 사람들이 나타난다면…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언어가 이 거칠기 짝이 없는 사회에 조용히 스며든다면…. 그러나 호이나키의 거룩함이 스며들기에는 우리사회의 표면이 너무 딱딱하다.
지난 12월의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나는 너무 다쳤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의 태도와 말에 다쳤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간에 오간 거친 언동에 다쳤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사실대로도 아니라, 더 거칠게 윤색해서 보도한 신문기사들에 다쳤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다치고 있다. 우리사회에 감도는 이 탐욕과 적의의 기운 때문에 도대체 어디다 몸과 마음을 둬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와중에 나는 호이나키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바보같이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그러나 누구보다 밑바닥으로 밑바닥으로, 어쩌면 기어가고 있는 한 영혼의 편린을.
나는 사실 어른인 내가 다치면서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타! 그리고 호이나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어쩌면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어른들이 불안해서(그들이 아직 아이라서) 그 아이들을 끝없이 더 아이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
나는 언젠가 서울대학교 학보사 기자라는 한 대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올해 대학 신입생들이 읽어야 할(?)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는 그런 전화였다. 나는 그 전화가 순간적으로 역겨웠다! 아니, 스무살이 넘은 대학생들한테 내가 무슨 책을 추천한단 말인가. 나는 물론 아무 책도 추천하지 않았고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어떤 부아를 간신히 누르며 전화를 끊었다. 신문에도 종종 나오는 소위 ‘대학입학 설명회’라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곳은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 학생들보다 그들 부모들을 위한 자리인 것처럼 학부모들로 만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경우에는 언제 한번이라도 내 부모들이 내 장래를 위해 뭔가를 나서서 해줘본 적이 없었다. 내 부모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또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부모들은 근대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소비주의적 생활양식’에 물들지 않은 생활을 해오던 분들이었다. 내 아버지는 자신과 가족이 살 집을 손수 지을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내 어머니는 가족이 입을 옷을 손수 지어낸 분이었고, 두 분은 가족이 먹을 식량을 손수 지어냈다. 덕분에 나는 내 원체험의 저장고 속에 ‘화폐경제 시스템’ 밖의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저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생활방식이 참으로 품위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여태껏 ‘기관’과 ‘제도’에 의존하는 품위없는 생활방식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호이나키의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다. 나는 기꺼이, 그가 살아가는 족족 사유했던 바로 그 길을 따라가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물의 맨 밑바닥으로 고요히 흐르는 이 매력적인 바보의 영혼의 뒤를 자박자박 따라가보는 것만으로 내 눈은 한층더 맑아지리라. 리 호이나키의 글들은 일종의 ‘시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