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베크 지음
녹색평론사, 2005년
영적 세계는 광대하다. 영계(靈界)는 물질세계를 넘어선 다른 영역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힘은 물질세계와 상호침투하며, 또 물질세계를 전적으로 지탱하고 있다.
― 마크 헤드슬《비밀의 역사》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아담을 기다리며》의 서평을 쓰게 된 나는, 마치 이같은 난처한 상황에 처한 느낌이었다.
깊이 압도되고 감동된 채,《아담을 기다리며》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내 온몸을 가득 채운 것은 마사 베크가 들었다는 너무나 맑고 아름다운 수많은 종소리 같은 것이었다. 성스러운 영역에서 흘러나온 듯, 우리를 무한히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달콤한 종소리. 그렇게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신성한 어떤 경험을 하는 것과도 같았다.
우리네 삶의 그 모든 명백한 괴로움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다 괜찮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보호의 손길 아래 있으니, 너무 그렇게 괴로워하며 살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 부드럽지만 힘과 용기를 주는 어떤 천상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할까. 사실이지 우리에겐 뉴에이지 계열의 ‘영적 도서’를 비롯해서 ‘깨달음’에 관한 훌륭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들이 차고 넘친다. 그렇지만 이토록 진솔한 감동과 영적 고양감을 주는 책은 정말 만나보기 힘들다. 이 책이 주는 감동의 큰 이유는,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저자가,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스승이나, 피나는 영적 수련을 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욕망과 출세와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줄달음치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겪었던 이야기이기에, 그들이 아담이라는 아기의 출생과 더불어 삶의 진정한 가치에 눈뜨게 되고 삶이 변화되는 과정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던 것인지 모른다.《아담을 기다리며》는,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우리 일상 속에 얼마나 놀라운 경이와 신비가 숨어 있는지를, 우리 삶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사랑과 보호하에 얼마나 신비롭게 인도되고 있는지를,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값진 지혜로,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진지하고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야기를 하는 저자의 말투는 담담하고도 진솔하지만, 사실 거기에 담겨있는 내용은 우리가 이해하고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인 마사와 남편 존 베크는 그 어렵기로 악명높은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학생 부부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하버드의 문화가 그렇게 몰아가는 탓도 있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온 에너지를 바쳐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중이었다. 베크 부부는 일반적인 하버드생들이 그렇듯이, 하버드의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내면에서는 언제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로 늘 긴장하면서도, 적어도 겉으로는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명석하고 합리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표준 하버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마사가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되면서 이 비범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사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기쁨을 느끼는데, 그 기쁨은 당시 그들 부부가 아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또 검사 결과 그들의 아기가 불행히도 다운증후군이라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베크 부부는 “아기를 지우라”는 주위 사람들의 간절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기를 낳기를 고집하게 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이 장애아를 낙태시킨다는 행위에 대해 나름의 윤리적이고 위대한 결단을 내린 때문이 아니었다. 베크 부부는 아기를 갖게 된 순간부터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신비로운 현상들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말하자면 아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몰고 갔던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마사는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 초음파 사진으로 아기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되는데, 그때 마사는 아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전에 본 적이 있다는 느낌, 낯익은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 마치도 사랑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듯한 강렬한 기쁨을 느끼며, 저절로 “아! 아담이구나”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아기의 이름은 왠지 당연히 아담인 것이고 다른 이름은 가능하지 않다는 듯이. 사실 나중에 마사는 남편 존과 마치 퍼즐조각처럼 맞아 들어가는 각자 경험했던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아담이라는 이름은 아기가 가르쳐준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남편 존도 음식점에서, 마사에게 아기를 지우는 것이 아기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설득하던 중에,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에게 “존, 아기를 버리지 말아”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런저런 식으로 마사 뱃속의 아기는, 그 선천성 장애로 인해 분명 출생 후에 베크 부부에게 큰 고통과 번민을 안겨줄 것임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하고 신비로운 힘에 의해 인도된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 왔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담 같은 특별한 경우는 아니라도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이, 실은 그 자체가 이미 우리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무언가 신비로운 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왜 태어나는지, 우리가 어떤 아기를 낳을지, 그 아이가 왜 하필 나를 부모로 택해 태어나는지, 왜 우리는 부부와 부모의 연으로 만나는지는 우리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비밀은 영원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알 수도 없고 어쩌면 알아서는 안되는 미지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존재의 비밀과 신비의 영역을 탐구하는 신비학에서는 그것을 ‘카르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그렇게 오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선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로, 부모로, 친구로, 각양각색의 형태로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는 각자의 카르마를 해소하고 서로의 영적 성장을 꾀하게 된다고 한다. 마사가 아기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런 신비의 영역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꼭 마사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우린 누구나 자식을 낳는 경험을 통해 존재의 크나큰 신비와 경이로움에 직면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애초부터 임신과 출산이라는 경험이 없고 그래서 생명의 소중함과 아픔을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세상에 가득한 그 아름답고 훌륭한 생각과 말들은 모두 쓸모없는 껍데기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조작이니 뭐니 하는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풀 한포기에 담겨 있는 신비를 풀지 못할 만큼, 생명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비 중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근원적인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저 생명의 흐름과 파도를 타고 인연에 따라 아주 잠깐 살다 가는 우리는, 내게 맡겨진 생명을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의무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지우라”고 충고하는 베크 부부의 주위 사람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각기 일종의 ‘투시’를 하게 된다. 남편 존은 하버드대의 고명한 고우트스트록 교수와 면담을 할 때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데, 출세와 업적에 방해가 될 뿐인 아기를 지우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교수에게서, 그때까지는 학문과 권위의 휘광에 둘러싸여 보지 못했던 교수의 초라하고 가련한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존 자신도 그에 못지않게 출세와 명성을 위한 삶을 추구해 왔었지만, 그 껍질뿐인 삶, 진짜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전도된 기막힌 삶의 진면목을 통찰한 순간, 마치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미련없이 그런 가치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내 마사도 병원에서 장애를 가진 아기를 지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의사 그렌델과 부딪치게 되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의사가 마사에게 낙태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실상 마사와 아기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냉정하고 자신만만한 외양 뒤에는 환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과 실패, 부적격이라는 낙인을 받을까 봐 극도로 겁먹고 있는 어린 소년이 숨어있다는 것을 섬광처럼 통찰하게 되는 것이다.
마사 자신이 말하듯이 직관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확한 것인데, 우린 직관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늘 무시하거나 놓치며 살다가, 완전한 좌절에 내몰리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아담이라는 존재는 마치 투시를 하게 해주는 신비로운 렌즈나 안경처럼, 베크 부부로 하여금 그때까지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살던 모든 가치의 핵심을 들여다보게 만들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에 속하는 것인지를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아담은 자신이 부모로 택한 베크 부부로 하여금 불필요한 삶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삶이 주는 풍요로운 경험과 예기치 않은 경이로움을 맛보며, 삶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도록 만든다. 출세, 명예, 성공, 업적 ⋯ 이 모든 것들이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그것을 추구하는 자세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으려면, 남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면,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해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가치는 그렇게 탁월한 업적을 이루거나 성공을 하거나 출세를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똑똑하든 우둔하든, 항상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서 얻게 될 그 무한한 위안”을 우리는 언제나 제대로 알게 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천재이며 괴짜교수이고 탁월한 지력의 소유자인 마사의 아버지가, 다섯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울 때, 마사는 “평생 단 한순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보지 않은 한 노인”의 모습을 본다. 그토록 탁월한 노인이 아이처럼 우는 장면은 감동적이지만, 자기가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건 너무나 놀랍도록 거대한 위안일 것이기에, 세상의 조건적인 사랑에 길들여진 우린 도무지 그걸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막힌 고통과 비참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지탱해가는 힘은, 바로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때로는 깨어나기도 하는 그런 조건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마사의 임신과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베크 부부의 놀라운 체험들은 어쩌면 ‘저 세상’에서 계획된 신성한 어떤 섭리의 일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마치도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이 시점에서 꼭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베크 부부가 선택된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사가 아담을 임신하고부터 낳기까지, 끊임없이 마사를 도와주고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그 신비로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야말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된 사람들이, 속물적인 가치를 전력을 다해 추구하고, 그것이 정말로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시대 최고 엘리트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아담으로 인해 겪게 되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경험들로 인해, 끝내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해 극적으로 ‘회심’하게 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우리들이야말로, 그로 인해 “사람은 정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베크 부부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 같다. 마사가 우연히 영매인 로스 부인을 통해 “마음을 열라”는 아담의 메시지를 들은 후에도 버틸 만큼 버티다가, 5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뉴에이지 점장이로 오해받거나 이성주의자로서의 신용을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이야기를 진실로 하게 된 것도, 이 얘기가 사라지지 않고 세상을 향해 전해져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열라”는 아담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지만, 오감으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무시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영적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마사와 존이 겪었던 수많은 신비한 체험은 이미 그 자체로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적 세계라는 것이 우리 삶과 무관한, 이 세상을 무한히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속에 이미 깊숙히 들어와 있으며 이 세계를 지탱해주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 실은 우리가 이미 영적인 존재라는 것,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이 모든 것이 영적인 사건이라는 것,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교류하는 생명의 무대라는 것 ⋯ 이런 것들이 아담을 통해 새삼스럽게 이 세계에 전해진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아담이 일곱살이었을 때, 마사는 사촌에게 이끌려 심령술사를 찾게 된다. 심령술사는 마사에게 아담이 ‘천사’라고 말해준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가끔 천사가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 간다는 것이다. 사실 신비학에서는 인간이 아닌 천사가 인간으로 화신해 오는 문제에 관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지만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신의 섭리와 뜻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인 듯,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 가는 천사들은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그 신비로운 존재는 인간 중에서도 하필 중증의 장애를 가진 몸으로 태어나, 베크 부부를 통해 이 세상에 놀라운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사물의 핵심을 보는 것,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장미뿐만 아니라 관목들까지 냄새를 맡아보는 것,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친밀감을 가지고 평범한 생명을 대하는 주의집중”의 자세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는 것, 현재에 집중하라는 것, 일상에 녹아있는 신비를 느끼며 살라는 것 ⋯ 이런 아담의 메시지는 어찌 그리도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들의 말씀과 비슷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