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남 지음
녹색평론사, 2009년
환경과 도시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꾸리찌바’는 더이상 낯선 지명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곳을 다녀왔고, 거기에서 찍어온 시각자료들을 곁들여 그 도시의 삶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들도 종종 마련되었다. 그리고 텔레비젼에서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취재하여 방영한 바 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면 박용남 선생의《꿈의 도시 꾸리찌바》라는 책의 출간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어쩌면 별로 새롭게 다가가지 않을지 모른다. 나 역시 신문에서 이 책에 관한 기사를 읽었을 때 굳이 사서 읽으리라고 마음먹지는 않았다. 꾸리찌바에 대해 여러 차례 듣고 (영상자료를) 보아서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착각이었는가를 크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편화된 정보들이 저마다 선정적인 이미지와 아이템으로 떠돌아다니고 그 지식의 망망대해에서 하염없이 표류 ― ‘웹 서핑’이라는 말은 정보사회의 단면을 매우 잘 함축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아니런가. 그 결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느것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부실하고 허망한 지적 토양에서 엉거주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박용남 선생의 이번 책은 우리에게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던 꾸리찌바의 리얼리티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낱낱이 존재하는 듯한 여러 영역들 사이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포착하는 종합적 안목이 돋보이는 저술이다. 그러한 관점은 저자가 오랫동안 행정 현장에 몸담아 오면서 겪은 고민, 그리고 지금은 민간 영역에서 생태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듯 글쓴이의 선 자리와 문제의식이 명확한 컨텍스트로 세워진 위에 꾸리찌바를 해석하고 있기에, 두서없이 단편적인 정보들을 두리뭉실하게 모자이크하기가 일쑤인 ‘해외 사례’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꾸리찌바시에 ‘꿈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그리고 부제는 ‘재미와 장난이 만든 생태도시 이야기’라고 되어있다. 우리에게 보통 ‘도시’라는 단어는 칙칙한 이미지로 채색된다. 비정하고 숨막히는 공간, 그래서 벗어나고 싶지만, 문명의 분비물이 자아내는 자극들에 이미 중독된 우리들은 여가를 통한 일시적인 탈출 이상의 모험을 감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꾸리찌바는 그런 도시에 대한 통념을 근원적으로 바꿔놓는다. 도시 그 자체가 삶의 안온한 보금자리요, 낭만이라고 치부되는 소망들이 실현될 수 있는 자리임을 보여준다. 길을 걷는 즐거움, 대중교통의 안락함, 풍족하게 조성된 녹지공원,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문화유적들, 약자들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복지체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시민들끼리 교감하면서 자부심을 북돋울 수 있는 광장 ⋯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하여
브라질 남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꾸리찌바시는 4백30여㎢로 인구가 1백40만명 이상(광역권을 포함하면 2백30만 정도) 되는 도시다. 1950년대부터 급속한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도시 환경문제가 악화되면서 행정당국은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자동차가 급증하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도시의 풍경과 역사유산이 사라져갔다. 그런데 1962년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꾸리찌바를 만드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자이메 레르네르의 출현과 함께 도시계획의 기본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는 71년부터 9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시장을 역임하면서 꾸리찌바의 골격을 짜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론 그 뒤에는 그와 비젼을 함께 하면서 성실하게 호흡을 맞춰준 공무원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그들의 도시 만들기는 막연한 희망과 맹목적인 열정만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시계획을 지속가능한 사회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도구의 하나로 활용하고, 삶의 질을 추구하는 철학을 막연한 추상화로서가 아니라 경제 · 사회적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한 기틀 위에 지난 30여년 동안 꾸리찌바의 디자인은 ‘도시계획 연구소’라는 싱크 탱크에서 실행되었다. 이 연구소는 집행단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많은 전문가들을 키워내는 훈련장으로서 기능해왔다. 형식적인 보고서만 양산하는 우리의 관변 연구소들과 대조를 이루는 이들의 생산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레르네르 시장은 전문가와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지식이 많아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면 삐딱한 자세로 그것이 왜 실행되기 어려운지 부정적인 요소들만 생각해내는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문적인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여러 전문화된 영역들로 분화된 칸막이 안에 안주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내놓는 결과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꾸리찌바의 공무원들과 전문가들은 정태적인 마스터 플랜이 역동적인 도시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에서 무엇이 구체적 문제로 떠오르는가를 직접 현장에서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들을 함께 모색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섬세한 촉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도시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또한 그때 그때 떠오르는 사안들에 민첩하게 대응하면서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현재의 위상을 점검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미시적인 현장과 거시적인 구조, 순발력 있는 적응과 원대한 목표 사이의 긴장 위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전문성과 지식이라는 것의 존재방식에 대해 새삼 반성하게 된다.
도시행정을 문화적 차원으로
꾸리찌바 프로젝트에서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점은 하나의 도시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능 및 사회적 요구들을 탁월하게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라고 하면 ppm, 데시벨 등 전문적이고 딱딱한 통계수치들이 떠오르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전문가나 정책 담당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로 독점되어 있다.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구차스러운 실천사항들이 주를 이루는 듯하다. 그리고 그 실천은 다분히 당위적인 의식을 가지고 금욕주의적인 생활태도를 견지하는 것으로 성격지워진다. 그런데 꾸리찌바에서는 그러한 행동 프로그램을 문화적인 차원으로 ‘버전업’시키고 있는 것이다. ‘재미와 장난’이라는 의미도 바로 거기에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꾸리찌바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보행환경과 대중교통 시스템이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 이렇게 어느 정도 완성된 다음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 실행단계에서는 적지않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초반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꾸리찌바의 한 도심부에 시민광장의 형식으로 ‘보행자 천국’을 만들려고 했을 때, 당장 거기에서 영업하고 있던 상인들의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것을 무릅쓰고 레르네르 시장은 48시간 만에 포장을 뜯어내고 전격적으로 광장을 완성했다. 그러자 사흘 후 월요일, 상점주들은 시장을 상대로 법적인 행동에 들어가겠다고 협박했고, 주말에는 자동차 클럽 회원들이 도로를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시위를 추진했다. 그런데 시장은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경찰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청 직원들에게 지시하여 보행자 광장에 길다란 종이를 깔아놓도록 했다. 자동차 클럽 회원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린아이들 수십명이 거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은 승리를 통해 꾸리찌바는 보행자가 자동차에 우선시되는 문화혁명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종의 해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지혜는 폐기물 관리를 통해 순환형 사회를 성취하는 문화전략으로도 드러난다. 꾸리찌바에서 분리수거되는 재활용품은 ‘사회교육통합재단’이라는 공공기관이 세세하게 분류하고 처리한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작업에 웬 교육재단?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연관성을 이 도시 당국의 환경행정은 찾아내고 있다. 그 재단에서는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고용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알콜 중독자와 장애인과 극빈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시키려 한다.
또 한가지 독특한 것은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장난감 공장이다. 이 아이디어는 약 6백여명의 산업 디자인 연수과정 학생들이 여러 모양의 인형을 개발했던 ‘꾸리찌바 창조 센터’의 1일 작업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모형은 빈민지역에 입지한 장난감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지금은 어린이 환경 탁아소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면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시도는 재활용 버스를 이용한 이동교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용 연한이 지난 버스를 개조해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목공, 공예, 전기기술, 인쇄, 전화교환, 워드프로세서와 기초회계, 컴퓨터 교습 등 다양한 교과목으로 강의가 제공된다.
문화의 힘을 살린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꾸리찌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50여개 빈민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지혜의 등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학습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빈민들에게 지식에 대한 접근을 도모하는, ‘지혜의 길로 안내하는 도서관’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도서관과 함께 있었다고 전해지는 ‘파로스 등대’에서 힌트를 얻어 세워진 이 공간에는 대개 5-7천권의 책들이 비치되어 주민들에게 대출된다. 이 공간이 생겨나고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곳의 3층 꼭대기에는 경찰관이 밤에 근무할 수 있는 망루와 비상전화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지식의 빛을 비추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밤이 되면 지역사회에 아름다움과 안전을 제공하는 ‘치안의 등대’로 변하는 것이다.” 삼엄한 감시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경직시키는 치안이라는 기능을 이렇게 친근한 이미지로 리모델링해낸 것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주환경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온 성과는 시내외를 주행하는 버스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가용을 억제하면서 효율적인 대중수송 체계를 확보하기 위해 꾸리찌바에서는 철저하게 버스 위주로 교통을 재편했다. 기다란 버스들은 전용도로로만 다니기 때문에 아무리 정체된 상황에서도 문제가 없다. 버스를 ‘땅위의 지하철’로 삼는다는 개념으로 건설된 이 시스템을 통해 신뢰성, 신속성, 통합성을 저비용으로 달성하게 된 것이다. 지하철이라는 비유는 환승장치에서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 꾸리찌바시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원통형 정류장이 그것이다. 정류장이 하나의 작은 건축물처럼 되어있어 이 안에 들어올 때 한번만 요금을 내면 몇번을 갈아탈 수 있다. 그러니까 버스와 정류장이라는 각각의 폐쇄공간이 연속적으로 통합되어 있어 지하철에서처럼 일단 승차하면 개찰구를 통과하지 않고 여러번 환승할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다. 원통형 정류장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교통을 장난감의 세계로 바라보는 탁월한 유머 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합리성과 감수성, 기능과 재미 등 얼핏 모순되는 듯한 요소들을 끌어안고 통합하는 지혜는 행정의 창조력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가운데 생성되고, 그것은 또한 행정에 활력을 불어넣는 힘이 되는 순환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경쾌한 에토스는 시민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가꾸면서 꾸리찌바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북돋아준다. 그래서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은 자연환경이나 역사적인 유물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생하고 역동적인 삶의 모습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제반 시스템에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외부인들의 시선을 끌어들여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관광이나 이벤트 전략이,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상의 요구와 모순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꾸리찌바의 실험이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심대하다.
변화에 대한 희망
이 책 전반에 흐르는 강조점 가운데 하나는 꾸리찌바의 시민들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생각해보자. 버스를 타기 위해서 정류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고 승차하고 나서도 넘어질까 가까스로 손잡이들을 잡아가면서 자리에 앉아야 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인격은 짐짝처럼 취급된다. 이는 특히 약자들에게 심각하다. 반면에 꾸리찌바시는 시민들의 삶이 놓인 자리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위배되지 않도록 무척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마주하는 공간들 속에서 시간의 여운을 감지할 수 있고 생명의 숨결을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행정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의욕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에서 공동작업의 형식으로 이뤄져왔다. 빈민지역의 주택을 보급하는 과정에서도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집을 짓게 한 결과 훨씬 값싸고 안전하고 인간적인 거주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는 콘크리트로 대규모 수용시설처럼 집을 지어온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보다 경제수준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얕잡아보던 나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빈부의 차가 존재하지만 가난이 인격의 퇴화를 유발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복지, 다양한 협동행위를 통해 삶의 보람을 창출하고 그것을 도시의 활력으로 끊임없이 재생시켜가는 행정.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리더십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표밭을 의식해서 기념식장에 위세를 과시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담아 듣기 위해 마을을 찾아다니는 공직자와 정치가들의 모습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레르네르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큰 이슈를 위해서만 일한다면 당신은 사람들과 멀어진다. 그리고 당신이 일상적인 필요에 따라서만 일한다면 아무것도 근본적인 것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당신은 사람들의 희망, 즉 변화에 대한 그들의 희망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당신의 도시가 변화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희망을 버릴 것이다.”
물론 꾸리찌바가 유토피아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생태적인 건강함과 삶의 문화적 풍요로움이 얼마만큼 깊이있는 친화력을 갖는지, 그리고 그것을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행정과 경제가 얼마만큼 효율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문제는 결국 사람인 듯하다. 도시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가지고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게 일을 꾸려가는 일꾼을 계속 육성해가는 꾸리찌바가 부럽기 그지없다. 돈이 있어도 아이디어가 엉뚱해서 일을 망치고, 제대로 된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것을 충실하게 실행할 힘이 딸려서 흐지부지되고 마는 경우가 우리에게 너무 많기에 꾸리찌바는 더욱 값지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사람과 능력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완전히 고갈되어버렸는가? 아직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만 그런 가능성들이 흩어져 있고 두절되어 있어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만나야 한다. 우리의 꿈이 한갓 허망한 몽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튼튼한 그물망들을 만들어 기운을 소통하면서 서로를 붙들어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꿈의 도시 꾸리찌바》는 그러한 생동의 인연들을 맺어가는 길에서 좋은 나침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