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 생태주의 논의를 선구적으로 제기한 격월간 인문교양지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교수의 저서. 저자는 생태적·문화적 위기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저한 사유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인간다운 삶, 지속가능한 비폭력의 문화를 위한 논리와 비전을 제시한다.
〈문화일보〉 북리뷰 팀 선정 1999년 ‘올해의 책’.
목차
책머리에
1부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간디의 물레
환경위기의 내면구조
생태적 위기에 맞서는 새로운 논리와 실천
녹색운동과 농업문화
개발 이데올로기의 극복을 위하여
자주적 공생의 논리
한살림 공동체운동
2부
‘국제화’의 재앙
마을문화를 되찾아서
IMF체제를 맞으며
‘보살핌의 경제’를 위하여
지역통화 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
‘거대기계’의 욕망
광우병과 폭력의 논리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
컴퓨터기술 구원인가 저주인가
Y2K 위기 앞에서
3부
나락 한알 속의 우주
걸어다니기―공경의 문화를 위하여
상인의 논리를 넘어서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
不敢爲天下先
히말라야의 나무
과라니의 아이들
경쟁의 논리를 넘어서
자유학원
어머니의 이기심
“인간에 대한 모욕”
밥과 하늘과 사회참여
고무신 두 켤레
사라지는 제비, 어리석은 권력욕망
생태적 건강회복이 선결문제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
본문 중에서
[머리말]
이 책은 지난 8년간 격월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동안 틈틈이 쓰거나 말했던 기록들을 모아서 묶어낸 것이다. 이 기막힌 생태적 위기의 시대에 아까운 나무들을 대규모로 희생시키는 출판행위를 줄여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온 잡지의 발행·편집자로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낸다는 게 마음 편한 일일 수는 없다. 더욱이 여기에 실린 글들이나 강연기록들은 그때그때의 임시적인 필요에 의해 발표된 것들이어서 책 전체에 걸쳐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내용이 되풀이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이 갖추고 있어야 할 균형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기는 이러한 약점이 형식적인 것이라 한다면, 그 형식적인 약점을 뛰어넘을 만한 실속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 실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 딴에는 꽤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왔지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란 결국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게 아니다. 이번에 책을 만들기 위해 교정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그동안의 내 생각이란 게 늘 피상적으로 겉돌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도 염치없이 세상에 책을 내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는 모를 일이다. 이미 2년 전에 《녹색평론》의 지면을 통하여 이 책의 출판을 예고한 뒤에도 또 한참의 뜸들임의 기간을 거쳐 비로소 이 책을 내기는 하지만, 과연 얼마나 쓸모 있는 책이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다.
지금 되돌아볼 때, 그래도 내 삶에서 뜻있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생물 선생님의 극성스러운 채근으로 친구들과 함께 학교 근처 개천 옆에 여러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가끔 고향에 갔다가 그 근처로 지나면서 나는 이제는 그것들이 키가 크고 그늘이 짙은 나무들이 되어있음을 보곤 한다. 그 나무들을 보는 순간은 내게 순수한 기쁨의 시간이다. 그것은 그 나무들을 보면 내 소년시절이 회상되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나무들은 땅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우리의 존재의 근거를 환기시켜준다는 좀더 근원적인 맥락이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 그루의 큰 나무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체를 그 품에서 기르고 보살피지만, 사람에게는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큰 배움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최초로 시적, 철학적 존재로서의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은 키큰 나무의 가지 끝에서 하늘을 지각하는 경험을 통해서일 것이다. 미당 서정주는 젊은 날의 시〈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에게 무의식 중의 큰 스승은 언제나 말없이 서 있는 나무들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한 나무들을 지키고, 섬기는 일보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자기주장을 위해서, 또는 자기표현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밑에서 쉴 새 없이 나무들을 파괴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인간생존의 생물학적, 사회적 기초 자체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옛 습관을 되풀이하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8년 전 학교의 연구실에서 뛰쳐나와 팔자에도 없는 잡지를 엮어내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나 자신의 당혹감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이 산업기술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단자살체제를 만들어놓고 오히려 그 체제를 즐긴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까운 종이를 소모하면서 보잘것없는 잡문들을 굳이 책으로 묶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강화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내 변덕에 시달리면서도 헌신적으로 일해온 《녹색평론》 편집실 일꾼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을 위한 원고정리와 교정 및 편집 등 까다로운 일에 정성을 다해준 김경숙, 변홍철 두 사람에게 감사한다.
1999년 6월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