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저작 《大地의 상상력》은 1970~80년대에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던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 김종철이 《시와 역사적 상상력》, 《시적 인간, 생태적 인간》 이후 20년 만에 펴내는 본격적인 문학평론집이다.
김종철은 그 특유의 집요함으로, 윌리엄 블레이크, 찰스 디킨스, 매슈 아놀드, F. R. 리비스, 프란츠 파농, 리처드 라이트 그리고 이시무레 미치코에 이르기까지 18세기부터 21세기를 관통하면서 세계의 대문호, 비평가들을 엘리트주의와 산업문명에 맞서서 ‘삶-생명’을 옹호해온 작가, 사상가, 예언자라는 관점으로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사회적 격차와 권력의 독과점은 날로 심화되고, 교육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덕성과 자질을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물신주의의 일방적인 위세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인간관계, 그에 따른 인간성의 황폐화” 등 ‘근대의 어둠’이 짙게 깔린 오늘날, 김종철은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내어놓고 있는 듯하다.
목차
책머리에
블레이크의 급진적 상상력과 민중문화
디킨스의 민중성과 그 한계
인문적 상상력의 효용―매슈 아놀드의 교양 개념에 대하여
리비스의 비평과 공동체 이념
식민주의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프란츠 파농에 대하여
리처드 라이트와 제3세계 문학의 가능성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미나마타의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주석
색인
본문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맑스의 사상이나 그 밖의 다른 사상가·철학자에 대한 학습의 경험이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판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 경우에는 내가 지난 30년 남짓 동안 생태주의적 세계관에 의지하여 작업을 해온 것은 젊은 시절의 문학공부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일정한 사고습관과 감수성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블레이크는 산업혁명 초기의 사회적 격변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온몸으로 체험했고, 그 체험에 의거하여 후세의 어떠한 변혁사상가들보다 더 일찍 그러한 시대변화의 심층적 의미를 가장 통렬하게 투시하고 포착했던 시인이자 예술가, 민중사상가였다. 그 점에서 그는 산업문명의 발흥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대문명의 의미를 천착해온 숱한 급진적 사상가들에게 길을 열어준 선구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한번 블레이크의 문학에 경도되기 시작한 나는 그 이후에도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인, 작가, 평론가들을 차례로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근대’의 어둠에 맞서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문학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나는 이른바 압축적인 산업화로 인해 온갖 인간적인 비극과 재난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인류사회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해온 곤경의 일부로 보는 사고습관에 다소간 익숙해질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사고습관이 길러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녹색평론》의 발간작업에 열중하는 일도 없었을 것임은 거의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 김종철, 〈책머리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