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단 하나의 오해, 한 치의 계산착오가 인류 절멸의 핵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전 세계에 있는 440여 개의 잠재적 핵폭탄(원자력발전소)과 13,000여 개의 핵무기를 도발이라도 하듯이 우크라이나를 비롯해서 미얀마,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예멘, 에티오피아, 콩고, 사헬, 아이티, 파키스탄, 대만,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거나 무력충돌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기후변화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 인류가 지혜를 모아야 할 이때에 여전히 배타적인 국익논리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이 기후변화에 가공할 부담을 지운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트기, 전차, 미사일, 병력 수송 등 전장에서의 화석연료 사용과 그로 인한 직접적인 온실가스 배출은 말할 것도 없고, 파괴된 우크라니아 도시, 산업, 기반시설과 인간적·환경적 복구에 들어가게 될 천문학적 비용은 또 그에 상응하는 탄소배출을 예고하고 있다(1991년 걸프전은 그해 온실가스 방출에 2% 이상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이른바 골든타임이라고 일컬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인류사회가 전례없는 실존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써야 할 시간과 자본, 능력을 다른 데 빼앗기고 있다는 문제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면서 유럽을 필두로 해서 전 세계에서 에너지 전환을 위한 노력이 속도와 내용 모두 굉장히 후퇴했다. 불타고 있는 지구 위에서 화력발전소가 200개, 원자력발전소가 55개 새로 건설되고 있다. 기후대응을 우선으로 하겠다고 공언한 미국 바이든 정부는 알래스카 유전 개발에 돌입했고, 전략비축유 1억 8,000만 배럴을 시장에 풀어놓았으며, 그동안 환경과 건강상의 우려 때문에 금지했던 질 낮은 석유 사용을 허가했다. 독성 화학물질의 사용, 독성 폐기물의 임시방편식 처리, 광범위한 불법적 벌목 등 온갖 에코사이드 행위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 앞에서 기후대응은 언제까지나 뒷전으로 미루어도 좋은 것일까. 현재 기후과학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일은 온난화로 인해서 영구동토층과 심해에 묻혀 있는 메탄이 대기 중으로 풀려나서 지구온난화가 손쓸 수 없이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 위험을 전 세계 440여 기 원전에서 멜트다운이 일어나는 일에 비견하는 전문가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많은 지역, 특히 남반구에서 전쟁의 참화와 하등 다를 것 없는 재난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인류, 특히 북반구 선진국 주민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무기를 들지 않고도 일상적으로 전쟁에 가담해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적 관계 한가운데에 기후변화와 군국주의가 맞물린 위기가 놓여 있는 것이다.
전쟁은 근대 산업문명 구조에 내재된 것이다. 근대문명의 역사는 값싼 화석연료와, 인간에게 자연을 마음 내키는 대로 착취할 권리가 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해서 (자연을 포함한) ‘타자들’을 정복, 약탈해온 과정이다. 선두주자들에게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면서, 다양한 가치와 문화를 가지고 자족적 삶을 누리고 있었던 후발주자들은 갈수록 균질화되고 의존적으로 변해갔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이행되기 위해서는 토착사회들의 다양한 전통, 이념, 관념, 사고습관, 언어, 문화들을 공격해서 무너뜨려야 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문화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나 금기가 실종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종교가 힘을 잃은 현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말해주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할 때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었던 종교는 이제 사사로운 영적 취향으로 축소 규정되고 있다. 지금 이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종교는 과학기술이다. 그리고 이 종교가 섬기는 신은 맘몬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이 영원히 관대하고 영원히 이용 가능하며 영원히 풍부하다는 치명적인 오류에 토대를 둔 세계관이다. 끝없이 경제가 성장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생태적 비용을 계속해서 외부화하는 일이 가능하려면 지구생태계는 무한히 확장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현대 과학기술이 해온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기술은 인간조건(세계)을 계속해서 확대해왔다. 그것은 자원이 고갈되고 지구의 생태적 수용력이 한계에 이른 것이 명백해진 오늘날 과학기술이 유전공학, 가상현실, 인공지능, 우주에 집착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미련스럽게 기술적·산업적 해법에 기대어 생태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헛된 시도를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 모습도 산업자본주의 문명과 기술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술은 기껏해야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뿐이다. 산업경제의 필연적 종착점인 자원 고갈, 지구생태계의 쇠락,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증가, 갈수록 증폭되는 사회적·정치적 갈등을 회피하게 해줄 능력은 없다.
200년 이상 외부비용에 눈을 감고 전가해온 결과로 마침내 경제는 침체되고 사회는 분열되어 전체주의로 기울고 있으며, 생물권은 더는 인간의 욕망을 수용해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장 둔한 인간도 알아챌 수 있도록 혹심한 기후현상을 통해 호소하고 있다. 이제 경제성장은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가능하지 않다. 경제가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인 자원들(토양, 석유 등)이 급속도로 소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경제는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끝없는 이윤추구(자본축적)라는 단 하나의 동기밖에 없기 때문에, 투자수익이 성장의 비용을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곧장 무너지게 되어 있다. 역사학자 존 M. 그리어에 따르면, 세계경제는 이미 장기침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파생상품이나 금융(카지노경제)부문을 제외한다면 2009년 이후 세계경제는 마이너스 혹은 제로 성장을 하고 있다.
지난여름 수도권에 쏟아진 100여 년 만의 폭우나 올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대형 산불, 근년에 유럽, 아메리카, 호주에서 나타난 기록적인 고온현상과 홍수, 재작년 필리핀과 남동아프리카를 휩쓸었던 태풍, 중국과 몽골의 고질병이 된 모래폭풍은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후재앙의 단편들이다. 한편 생물종 멸종, 야생지 파괴, 토질 저하, 물 부족, 질병, 기근도, 세계적으로 빈곤이 심화되고 경제가 정체되고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목숨을 건 난민 행렬이 이어지고, 테러와 전쟁이 빈발하는 현상도 기후재앙의 다른 모습이다. 2050년에 이르면 전 세계 저지대 주민 12억 명 이상이 유랑민이 되고,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는 추가로 1억 명 이상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시리아, 예멘, 남수단, 리비아 내전은 기후변화가 유혈사태로 치달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20년간 추적 조사해보았더니 연간 평균기온이 섭씨 1도 높아질 때마다 분쟁이 50% 더 많이 일어났다. 기후변화가 전쟁을 낳고 전쟁이 다시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일부 논자들은 기후재앙은 이제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한 전면적인 사회붕괴가 금세기 안에 현실화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심층적응》(2018)이라는 논문으로 전 세계에서 100만 명 이상의 독자를 얻은 영국 컴브리아대학의 젬 벤델 교수이다. 이런 관점은 과학의 외피를 쓰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구명보트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둔 생존주의로 사회적 논의를 축소하고 무력감을 부추길 위험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이 확실하게 밝혀낸 한 가지가 있다면,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변수를 대입해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작성해보는 것뿐이다. 급진적으로 지속적으로 탄소배출을 중단하거나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러나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자연세계와 맺어온 관계로부터 초래된 최신 증상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파열을 두려워하며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제한하려고 골몰하는 태도는 다시 한번 인간조건을 부정하면서 근본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산업문명의 존재방식을 철저히 묻고, 전면적으로 생태문명의 기초를 쌓아가는 것 말고 대안은 없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세계 정치와 기후담론은 ‘1.5도’에 갇혀 있다. 탄소중립이 목표가 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탄소중립은 탄소 배출량과 흡수량이 균형을 이루게 해서(net zero) 대기 중 온실가스 양이 증가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 이 개념을 근거로 해서 탄소포집저장, 지구공학 등, 최첨단 기술처럼 오인되고 있지만 실상은 내세우고 있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극히 위험하기까지 한 허구의 기술공학 연구들에 공적 자산이 엄청나게 투입되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탄소중립은 탄소거래를 통해서 이익을 내는 시장을 만들어서 기업들에게 또하나의 투자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탄소감축의 부담은 면해주는 구실 외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위장술 내지 지연술에 불과한 이 ‘해법’들로 인해서,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지구생태계가 더욱 위험한 수준으로 교란되고 있고, 야생지와 토착민들의 삶터와 생계가 속수무책으로 파괴되고, 실제로 지구온난화 경감에 도움이 될 노력들은 부유(浮遊)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탄소중립이라는 환상에 매달려 있는 한 대기의 온실가스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바뀌지 않는 것일까? 핵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인류사회에 처음 온실효과를 경고한 것은 1959년이다. 기후과학자 제임스 핸슨이 지구온난화의 책임은 인간활동에 있다고 규정하고, 이번 세기 안에 지구가 금성처럼 뜨거워져서 거주 불가능한 곳이 될 수 있다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1988년이다. 1992년 리우선언 이후 해마다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 회의가 열리고 있지만 그 세월 동안 대기 중의 온실가스는 꾸준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탓한다. 벤델은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장논리로는 근본적으로 정책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나오미 클라인은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최대의 장애물로 지목했다. 요컨대 화석연료의 이권이 말할 수 없이 막대하기 때문에 거대한 에너지 카르텔(대부분의 산업과 자본이 연루되어 있는)이 정치에 입김을 넣고 언론과 대중문화를 주무르면서 변화에 완강하게 저항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기업의 탐욕을 넘어서 권력구조 문제로 눈을 돌린 사람이 있었다. 맑스주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은 영어 단어 ‘power’의 두 가지 뜻에 주목했다. 그는 자연의 힘인 ‘에너지’를 뜻하는 말이 인간사회의 지배구조 관계를 나타내는 ‘권력’의 뜻을 함께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화석연료는 처음부터 지배계급의 권력을 강화하는 인간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추론했다. 그리고 《화석자본》(2016)에서 19세기 영국에서 결국 수차(水車)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석탄(화석연료)을 태우는 증기기관이 승리한 배경에는 비용문제나 에너지 효율, 생산량 같은 기술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동기가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했다. 화석연료는 노동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추출하여 권력자들이 독점적으로 힘과 재산을 불리는 데 적합한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다. 화석에너지가 불가사의한 생명력을 가지고 200년 넘도록 세계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경제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현재에도 재생에너지가 (상당하게 비중이 늘긴 했지만) 지배적 에너지원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현상도 조금 설명이 된다. 햇빛이나 바람은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에 재생에너지는 태생적으로 분산적·민주적 구조와 어울리지만, 에너지밀도가 높은 화석에너지는 권력집중적 속성을 갖는다. 걸프만 국가들이 왕정을 고수하고 있고, 이란의 이슬람절대주의, 러시아·이라크 민족주의, 베네수엘라 권위주의 정권에서 보듯이 산유국들이 거의 예외 없이 전체주의체제를 구축해서 사실상 탄소자본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지 모른다. 화석자본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민주주의국가들―아이슬란드, 코스타리카, 핀란드, 스웨덴은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이라는 사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기후변화에 관하여 오래전부터 그 누구보다 방대한 연구를 쌓아온 곳은 펜타곤이다. 인도양과 태평양 연안의 미군기지들은 기후위기의 직접적 영향과 맞닥뜨리고 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뉴욕, 보스턴, 마이애미,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들도 침수될 것이다. 미국 서부지역은 사막이 된다. 이런 엄중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미국 국방부는 전략(戰略)을 짜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병력의 주된 역할은 기후붕괴 사태(자연재난, 자원을 둘러싼 갈등, 난민, 테러, 민중봉기 등)에 대응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대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평시에도 단일 영역으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내뿜는 지구온난화의 주역이지만, 따져보면 현상의 지배구조(화석경제)를 지구 종말의 날까지 지키는 것은 본연의 사명이다. 세계 최대 탄소 배출국들이 군사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나라들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우리는 전 세계가 석유에 깊이 중독되어 있으며, 현대 산업사회는 화석연료 없이는 한순간도 지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의 극단적 상황에서 세계 열강은 무력을 휘두르며 노골적으로 새로운 지정학적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 아니 그 길에 이미 들어섰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만약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군사력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의 방식으로 맞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대전 이후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과테말라가 하나같이 폭압정치, 내전, 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때 코스타리카만 예외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1948년에 군대를 폐지했기 때문이었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지혜롭게도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안보를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고 애국주의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사람을 공격해서 해치는 일이 손쉽게 될 리 없다. 아마도 군사훈련의 핵심은 바로 이런 마음의 장벽을 없애는 것일 것이다. 그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동원된 병사들에게 탈영기금을 지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기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태업하여 불량품만 잔뜩 만들어내거나 조업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전 세계 석유노동자들이 동시에 파업을 해서 전투기나 탱크가 연료를 얻을 수 없게 된다면?
간디 이후 비폭력 불복종 저항에 대한 연구는 상당하게 축적되어, 이제 철학적·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가장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비폭력 행동을 옹호하는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산업자본주의가 인류문명을 인질로 삼아 지구 위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 ―천지자연, 제3세계, 민중, 여성, 약자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에 맞서기 위한 전략으로도 비폭력 불복종 노선을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산업문명에 대한 불복종 저항은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시장(기업)에 대한 의존성을 줄여나가는 일이다. 인류학자들 덕분에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경제조차도 자급적 노동(그림자노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능부전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시야에서 감춰져 있는 자급경제를 (임금경제로 전환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전체 경제에서 더 큰 부분이 되도록 키워야 한다. 임금노동에 매이지 않고 생계를 도모할 길을 찾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가능한 대로 텃밭농사를 짓고, 생협에 가입해서 단 하나의 농가라도 시장에 종속되지 않도록 돕고, 가공식품을 사 먹는 대신에 손수 요리를 하고, 이웃과 함께 아이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보살피고, 그 밖에도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배움이든 돌봄이든 필요한 서비스를 서로 도와서 해소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급은 고립된 채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호부조는 자급·자립과 떼어놓을 수 없는, 건강한 공동체의 견고한 원리이다.
자급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는 것을 말하지만, 최소한의 기본적 필요만 충족하면서 살아간다는 뜻도 된다. 자발적 가난은 유한한 세계 속에서 모두 함께 인간다운 삶을 꾸리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미덕이지만, 다른 모든 형태의 야만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된 수단이기도 하다. 자급·자립은 개별적이고 소극적인 공동체운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생존기반을 망가뜨리고 가장 비인간적인 빈곤을 만들어내면서, 그저 끝없이 소유하기 위해서 다투는 경주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아진다면, 지금의 사회·경제 구조와 정치를 발본적으로 다시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질지도 모른다.
산업적 경제성장으로 문명생활과 인간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은 뿌리 깊은 근대적 미신이다. 산업화의 결과로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아무리 크게 잡아도 세계 인구의 25%를 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허락된 ‘자유’는 욕망의 노예가 될 자유 이상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삶터에서 주어진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모조리 잃어버린 뒤에, 자신의 노동력을 가능한 한 싸게 팔아서 생계를 도모하는 것을 과거에는 노예제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제 근대화의 최종 결과로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사람살이의 근본토대인 호혜적 네트워크가 망실되고, 삶에 대한 책임감과 에너지가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을 때 전쟁이 빈발하고 파쇼통치가 부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자연세계와 인간성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 위에 구축된 신기루에 평화는 깃들 수 없다.
저항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에 의해 평가되는 것일 것이다. 이제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산업문명이 지구의 생체조직을 할퀴어온 결과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체제에 복종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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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을 갖고 복간을 기다려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녹색평론》이 부족한 대로, 30년 이후의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은 오롯이 회원 여러분의 한결같은 성원 덕분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의 협력으로 완성된 책을 들고 보니 아쉬움이 크다. 아마도 휴간기간 동안 《녹색평론》이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꾹꾹 쌓인 탓인지, 정보전달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서 다소 건조한 책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녹색평론》은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용기와 위로, 번민을 나누기 위한 장(場)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고, 앞으로도 틀림없이 비틀거리고 허둥댈 편집실에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열의를 다해 글을 써주신 필자들과 이번호를 읽으며 공감, 걱정, 질책을 해주실 독자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느낀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