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말에 창간호를 낸 이래 두 달에 한번씩 책을 내다보니까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100호라고 해서 특별히 감상적인 기분에 잠길 이유는 없지만, 어떻든 한번도 결호(缺號) 없이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는 게 우리 스스로도 약간 믿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는《녹색평론》이 몇년 정도만 계속될 수 있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소임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녹색평론》을 통해서 우리가 하려는 작업은―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좀더 지혜롭고 용기있는 사람들에 의해 승계되어, 좀더 효과적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답답한 심정으로 잡지를 시작했지만, 우리 자신은 이 작업을 지속시킬 만한 실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행운인지 불운인지,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여러번의 위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더이상 잡지를 계속한다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간단히 말해서, 한번 올라탄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호 잡지가 나오기를 기다려주는 열성적인 독자들 때문에 우리는 늘 잡지를 계속하는 것보다 그만두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에게는《녹색평론》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 마느냐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창간 초기부터 우리는 그동안 이 사회의 저변(底邊)에 결코 무시 못할 어떤 정신적 갈증이 잠재되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갈증을 느껴온 사람들은《녹색평론》에서 불충분하게나마 위안을 얻고,《녹색평론》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적 동지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었다. 창간 몇년 후부터 전국 여러 지역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녹색평론 독자모임’은 완전히 독자들 자신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이러한 독자들은 처음부터《녹색평론》이 단순한 ‘환경잡지’가 아니라는 것을 대뜸 이해했던 것이다.
사실, 창간 이후《녹색평론》이 줄곧 말해온 ‘고르게 가난한 사회’ 혹은 ‘공생공락의 가난’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생산력의 증대 혹은 경제성장이라는 것을 인간의 역사적?사회적 진화의 불가결한 전제조건으로 파악하는 한, 전통적 의미에서 좌우의 정치적 이념은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진영’의 근본문제는 경제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지배세력에 맞서서 충분히 철저한 대안논리를 구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사회적 공평성과 복지의 전제조건으로 성장논리를 시인(是認)할 수밖에 없는 이상, 가혹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는 지배세력의 논리에 굴복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경제’를 위해서 인간적 가치와 환경은 언제까지나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이대로는 안된다고 할지라도, ‘대안’이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 암울한 상황을 벗어날 출구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녹색평론》이 계속 말해온 ‘공생공락의 가난’은 결코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적 논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들은 본질적으로 보다 많은 자본, 기술혁신, 생산성 제고 따위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관계의 발본적인 변혁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공존공영’이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무릇 모든 형태의 물질적 ‘번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생의 논리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근본적 인식의 공유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광범위하게 뿌리깊이 퍼져있는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방이 결코 쉬운 것일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국가와 자본이 일체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고, 국가와 자본은 본성상 끝없는 경쟁논리와 자기확대의 욕망으로 움직이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므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말한다는 것은 자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국익’을 포함한 일체의 근대 국가적 가치에 대한 반역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찍이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무책임하고, 미숙하고, 미쳤다”는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가난’을 옹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있고, 성숙하고,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이 시대를 주도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녹색평론》을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무책임하고, 미숙하고, 미친” 사람들과 함께 한층더 우리의 입장을 비타협적으로 견지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100호 기념호를 펴낸다.
그동안 도와주신 필자, 편집자문위원, 후원회원, 그리고 열심히 책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