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지음
《시베리아의 향수 ― 근대 한국과 러시아문학》(이숲, 2017년)
러시아문학과 식민지 조선
이광수의 소설 《유정》(1933)에서 주인공인 교육자 최석은 죽은 친구의 딸과 불미스런 관계를 맺었다는 안팎의 오해에 시달리던 끝에 벗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 없는 삼림지대로 한정 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하는 곳에서 이 모습을 마치고 싶소.” 편지를 쓸 당시 그는 시베리아에 가본 적이 없는 상태였지만, 편지를 쓰고 나서 실제로 시베리아로 향하고 거기서 편지 내용과 비슷하게 삶을 마감한다. 시베리아는 그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함과 동시에 가족과 세상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게 한 경솔한 처신과 관련해 자기를 처벌하고 죄를 씻기 위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최석은 어떻게 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 시베리아를 속죄와 갱생의 공간으로 떠올리게 된 것일까. 러시아문학자 김진영 교수의 저서 《시베리아의 향수》는 아마도 이 질문에서부터 출발했을 듯하다.
최석의 시베리아행과 관련한 수수께끼를 풀 일차적 실마리는 톨스토이 소설 《부활》에 있다. 여주인공 카추샤가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며, 그런 카추샤를 남자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따라나선다는 줄거리를 지닌 《부활》은 일본을 거쳐 수입된 신파극 형태로 191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이광수 자신 《부활》을 평생 동안 매우 높이 평가해 마지않았거니와, 자신의 소설 주인공으로 하여금 시베리아행을 꿈꾸고 결국 실행에 옮기게 한 배경에는 이처럼 강렬한 《부활》 독서체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향수》가 단순히 《유정》과 《부활》 그리고 시베리아에 관한 책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베리아로 상징되는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이 식민지 조선에 끼친 영향을 다룬 연구서다. 지은이 김진영 교수는 조선 최초의 러시아 여행기인 민영환의 《해천추범》(1896)에서부터 해방 이듬해 이태준의 소련 여행 경험을 담은 《소련기행》(1947)까지 반세기에 걸친 자료를 바탕 삼아 이 흥미로운 영향관계를 더듬는다. 그것이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이 조선사회에서 지닌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향수》 본문 중 이런 대목을 보자.
최남선의 톨스토이 우화 번역을 시초로 하여 김억, 이광수, 홍명희, 현진건, 나도향, 손진태, 현철, 홍난파, 이하윤, 오천석, 박영희, 조명희, 오장환, 백석, 변영로, 김상용, 이태준, 이효석 등의 무수한 작가들이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가운데 창작의 동력을 얻었고, 그중에서도 이광수, 백석은 독학으로 공부해 러시아어를 구사했으며, 홍명희, 오장환, 이효석도 최소한의 기초 러시아어 지식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설야, 이기영, 김남천, 임화를 대표로 하는 카프 계열 작가들에게 소비에트 문학이론이 그룹 운동의 기본원칙이자 모델이었음은 물론이다.(168쪽)
과장하자면 식민 조선의 문인 및 지식인 거의 모두가 러시아 문학작품을 번역하거나 러시아문학으로부터 문학적 자양분을 얻었다. 영·독·불문학을 비롯한 다른 어느 외국 문학도 러시아문학만큼의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다(물론 식민 모국인 일본문학은 예외였을 수도 있겠다). 당시 러시아문학의 객관적 위상이 실제로 모든 외국 문학 가운데 넘버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식민 조선에서 러시아문학에 대한 경사는 유독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속 표현대로 “20세기 초반의 조선 지식인 모두가 러시아문학도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때는 위대한 러시아문학의 시대였고, 그들은 러시아문학을 읽었다.”(170쪽)
물론 식민지라는 특성상 당시 조선의 러시아 바람은 식민 모국인 일본 그리고 전통적으로 조선과 밀접한 문화적 연결망을 지니고 있었던 중국 내의 러시아문학 수용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선에 앞서 일본과 중국에서 먼저 러시아 바람이 일었고 조선의 러시아 바람은 일본과 중국을 거쳐온 이차적 성격을 지닌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일본과 중국을 거쳐온 러시아 바람의 성격은 역시 당시 조선의 상황이 요구하는 내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책 속의 이런 대목을 보라.
일본 지식인 계층이 수용한 러시아문학의 요체는 사회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한다. 삶의 비애와 고통을 직시하는 가운데 가난한 자, 약한 자를 향한 연민이 생기면, 그 연민의 감정은 한편으로는 부정과 우수의 감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에 찬 혁명의식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다. “압박받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고통, 그들의 투쟁을 열어 보여주었다”라고 중국의 노신(魯迅)은 러시아문학을 평가했다. 세기말 모더니즘의 초현실적 퇴폐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러시아문학이 보여준 이 비판적 사실주의 정신의 힘과 깊이야말로 동양에서의 러시아문학 붐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136쪽)
요컨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 문학을 선도한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의 실험정신보다는 러시아문학의 다소 ‘촌스러운’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 동양 삼국 특히 식민통치에 허덕이는 조선의 상황에 부합했다는 뜻이겠다. 문학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으로도 조선과 서양 사이에는 제법 아득한 ‘거리’가 있었고 러시아는 그 거리를 메꿀 일종의 완충지대로 구실했던 셈이다. 러시아는 서양이면서도 동양적 특성(‘후진성’을 포함한)을 지닌, 서양 속의 동양이요 동양에 가까운 서양이었기 때문이다. 《해천추범》에 관한 서술에서 김진영 교수가 당시 조선(인)에게 비친 러시아를 두고 ‘대리 서양’, ‘유사 서양’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조선과 러시아(문학)의 만남이 이상적·모범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가령 《부활》을 중심으로 한 이광수의 톨스토이 수용만 하더라도, 《유정》에서 짐작되듯, 이광수가 《부활》에서 본 것은 카추샤의 시베리아 유형을 통한 속죄와 갱생에 국한되었다. 또다른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고뇌와 결단,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운명을 둘러싼 러시아사회 전체의 모순과 구원 가능성에는 시야가 미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이광수 개인만의 한계는 아니었고, 당시 조선의 톨스토이 및 《부활》 수용의 전반적 문제이긴 했다. 이 책에도 인용된바 역저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김윤식 교수는 이광수의 한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춘원의 톨스토이 이해의 수준은 식민통치 기간 내내 카추샤의 눈물을 뛰어넘지 못했다. (…) 그에게는 톨스토이의 모순과 고민을 살필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이어지는 러시아문학의 유산
카추샤를 필두로 나타샤, 소냐 같은 러시아 여성 이름이 일대 유행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조선의 러시아(문학) 수용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카추샤의 인기는 엔카(演歌)의 원조로 꼽히는 주제곡 〈카추샤의 노래〉를 앞세운 일본 신파극 〈부활〉과 그 조선판인 〈카츄샤〉의 흥행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무겁고 진지한 소설 《부활》을 한갓 남녀 간 연애와 정절의 문제로 축소·왜곡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파극 〈부활〉과 〈카츄샤〉를 통해 낯선 어감을 지닌 러시아 여성의 이름은 조선에서 커다란 유행을 일으켰다. 그 유행은 식민 시기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어서, 1960년대의 영화 〈카츄샤〉의 주제곡 〈카츄샤의 노래〉 그리고 2000년대의 정통 악극 〈카츄샤의 노래〉로도 이어진다.
‘나타샤’의 등장과 전파는 카추샤의 경우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나탈리아’의 애칭인 나타샤는 러시아에서는 비교적 흔한 이름이지만, 그것이 조선문학이라는 호적에 처음 등재된 것은 백석의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와 더불어서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는 나타샤가 모두 다섯 번 나온다.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에서 보듯, 세상과 절연한 채 나와 나타샤 둘만의 불가능한 도피행을 꿈꾸는 이 도저한 낭만주의 시에서 나타샤라는 이국 여성의 이름은 주제의식 전체를 감당하는 무게를 지닌다. 시의 화자가 사랑하는 여성의 국적이 러시아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나타샤는 절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대상으로서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지위를 지닌다. 《시베리아의 향수》에도 인용된바, 평론가 유종호가 이 시를 가리켜 “나타샤라는 이름을 마음껏 써보기 위해서 씌어진 이를테면 기호의 선율”(《시란 무엇인가》)이라 표현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백석의 시를 통해 ‘호적’을 얻은 나타샤는 1940년 한 해에만 김광균과 오장환의 시, 그리고 유진오의 단편소설에 바쁘게 등장한다. “서울의 어느 어두운 뒷거리에서/이 밤내 조그만 그림자 우에 눈이 나린다(…)나타―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그 우를 지나간다”(김광균, 〈눈 오는 밤의 시〉), “잠자는 약을 먹고서/나타샤는 고이 잠들고/나만 살았다.//나타샤는 마우재, 쫓긴 이의 딸”(오장환, 〈고향이 있어서〉) 같은 시가 백석 시의 진한 영향을 보인다면, 만주국을 무대로 한 유진오의 단편 〈신경〉에는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창춘(長春))의 카바레 댄서가 백계 러시아 여성 나타샤로 나온다. 당시 조선의 좁은 문단 사정을 감안할 때, 유진오 역시 백석 시에 나오는 나타샤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고, 그렇다는 것은 카추샤의 문학적 부친이 톨스토이였던 데 비해 나타샤의 그것은 백석이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나타샤의 아버지 백석’의 인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서 백석의 시 제목(〈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과 같은 제목을 단 창작뮤지컬이 1월 말까지 서울 종로에서 공연 중이기도 하다).
‘소냐’의 경우도 흥미롭다. 소냐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아무래도 도스토옙스키 소설 《죄와 벌》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익숙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식민지 조선의 문인과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큰 영향을 끼쳤는데, 톨스토이의 여성이 카추샤였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여성은 역시 소냐였다. 두 여성 주인공은 특히 조선의 남성 문인·지식인들 사이에 엄청난 ‘팬덤’을 형성했는데, 김진영 교수의 지적처럼 “아름다우면서 열정적이고, 강인하면서도 온순하고 순종적이었”(287쪽)던 그들의 매력 포인트는 당시 조선 남성들의 자기본위적 성 관념의 소산인 셈이었다. 안석주와 안회남 같은 문인들의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 설문에도 단골로 등장한 소냐는 정지용의 산문시 〈황마차〉(“가엾은 소―니야의 신세”)와 이찬의 시 〈해후〉(“쏘―냐야 어찌 알았으랴/내 여기서 너를 만날 줄!”)에도 도스토옙스키 소설 주인공과 비슷한 의미망을 지닌 채 나온다. 임화의 시 〈네거리의 순이〉의 여주인공 순이가 소냐와 발음이 유사할 뿐 아니라 맥락과 의미 역시 밀접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지은이의 관찰은 날카롭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백수’들이 숨 쉬고 있다. 1980년대 소설에 ‘투사’가, 1990년대 소설에 ‘댄디’가 있었다면, 최근 소설에는 단연 백수가 있다.
정혜경 교수는 2000년대 문학을 다룬 평론집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에서 21세기 한국 소설의 커다란 특징으로 백수의 존재를 들었다. 80년대의 투사와 90년대의 ‘댄디’에 필적하는 21세기 소설의 히어로 백수 역시 러시아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노동자와 흰 손〉이 그 진원지다. 감옥에 수감된 노동자와 인텔리 혁명가의 대화로 시작되는 이 시는 진학문의 번역으로 1920년 노동운동 잡지 《공제》 창간호를 통해 ‘노동자와 손흰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첫 소개 때부터 시 본문에서는 백수인(白手人)으로 표현되었고, 1933년 김상용 번역에서는 제목 자체가 ‘노동자와 백수인’으로 바뀌었다. 염상섭의 유명한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에도 ‘뼈만 남은 흰 손(白手)’이라는 대목이 있지만, 백수라는 말이 쓰인 가장 유명한 작품은 김기진의 시 〈백수의 탄식〉(1924)일 것이다. “카페 의자에 걸터앉아서/희고 흰 팔을 뽐내어가며/브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눈앞에 있다//Cafe Chair Revolutio―nist,/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노동의 치열한 현실과는 안락한 거리를 둔 채 입으로만 노동자·농민과 혁명을 부르짖는 공상적 혁명가를 꼬집는 이 시는 정지용 시 〈카페 프란스〉(1926)(“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와 함께 흰 손, 그러니까 백수를 우리 문학에 확고하게 등재시킨 작품으로 꼽힌다. 1920년대 문인·지식인들의 자조 어린 작품에 단골로 등장했던 백수가 21세기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아이러니하다.
외국 문학을 공부하는 이유
《시베리아의 향수》는 이 밖에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둘러싼 논쟁, 이광수의 친일과 톨스토이 사상의 관련성, 연애와 여성관에서 보이는 남성 작가들의 보수성, 주을온천 백계 러시아인 마을에 대한 조선 문인들의 묘사와 평가 등에 관한 장을 거쳐 이태준이 1946년 8~10월 9주간 소련을 방문한 뒤 이듬해에 쓴 《소련기행》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사회주의 소련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로 일관하고 있는 이 책에서는 이태준의 사상적 변모와 함께 미학적 방향전환을 엿볼 수 있다.
소련 여행을 다녀온 뒤 이 책을 내기 전, 소련 여행의 감회를 담아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발표한 그의 편지글을 두고 김진영 교수는 “문학에서 혁명으로, 유심에서 유물로의 중심 이동”을 담은 “이태준의 전향서”(389쪽)라 평가한다. 그 뒤 이태준을 비롯한 월북 문인들의 운명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이태준이 그토록 찬탄했던 소련 역시 그로부터 반세기여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반세기 남짓한 시차를 두고 나타난 러시아 여행기 《해천추범》(1896)과 《소련기행》(1947)에 대한 지은이의 관찰은 여전히 유효한 바가 있다.
그들(해방기 조선의 지식인들―인용자)의 입장에서 소련은 무엇보다 ‘조선의 해방자이며 진정한 우호적 원조자’였다. 이태준이 출국하던 시점의 평양은 해방 첫돌 기념 준비로 들떠 있었고, 소련도 세계대전에서의 승리와 복구작업의 흥분에 빠져 있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해방기 여행자들의 소련 인상기는 구한말 첫 러시아방문기인 《해천추범》과 겹쳐지는 면이 있다. (…) 표트르대제와 스탈린은 각각 두 시대의 혁명적 발전을 이끈 영웅이었고, 러시아제국은 ‘우월한 서양’의 모델로서, 소련은 ‘우월한 사회주의국가’의 모델로서 각각 학습과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에 걸친 조선 사절단의 여행에서 이념적이고 사대적인 흔적을 지우기는 어렵다.(423쪽)
《시베리아의 향수》 머리말에서 김진영 교수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나의 목표는 근대 한국의 시대사를 러시아문학의 프리즘으로 투시해 재연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러시아학 연구자로서 기여할 몫이라고 생각했다.”(10쪽) 이 말은 한국에서 외국 문학을 연구한다는 것과 관련해 중요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거창하게 연구랄 것은 없지만, 영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1년간 교양영어 강의를 했을 때의 일화가 이 문장을 보면서 떠올랐다. 당시 학부 신입생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의 첫 텍스트로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룬 백낙청 교수의 한국어 논문을 택하면서 학교 당국과 작은 마찰을 빚었던 일이 있었다. 아직 20대 중·후반 어린 나이였던 당시 내 생각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배워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영국 말이라서가 아니라 미국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영어공부에 앞서 미국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백 교수의 논문을 강의 텍스트로 삼은 취지였다. 나 자신 영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외국 문학 공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회의를 떨치기 어려웠고, 그것이 결국 학문을 그만두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것을 외국 문학 전공자의 딜레마라 한다면, 《시베리아의 향수》는 그런 딜레마를 해소할 매우 긴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다른 외국 문학계 쪽에서 이 책에 필적할 작업을 한 사례는 많지 않은 듯하다(식민 모국이었고 러시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였던 일본문학은 별개로 치자). 러시아문학에 비해 우리와 관계의 밀도는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외국 문학 연구자들 역시 이 책과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주체적’ 외국 문학 연구에 나서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