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이름이 되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프란치스코로 불리겠습니다.” 2013년 3월 13일 바티칸, 교황으로 선출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은 가톨릭 역사상 최초로 ‘프란치스코’를 자기 이름으로 선택했다. 그는 브라질의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세요”라고 당부하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떠올랐다고 했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길잡이와 영감으로 삼아 교황직을 수행하다 올해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며 교회 밖에서도 가난과 평화, 비인간 존재와 누린 친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 〈찬미받으소서(LS)〉에서 지구를 가리켜 사용한 ‘공동의 집’이라는 말은 프란치스코가 해와 바람과 불을 ‘형제’로, 달과 별과 물과 땅을 ‘누이’로 부른 〈피조물의 찬가〉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치스코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모두 한 집안의 가족으로 품는 보편적 형제애를 보여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공동의 집이 울부짖고 있다고 호소하며 생태위기에 놓인 오늘 세계에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러냈다(LS, 1―2항).
프란치스코, 삶의 방향을 바꾸다
프란치스코는 1181년경 이탈리아반도 움브리아 지방의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포목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였고 어머니는 프로방스의 귀족 집안 출신 도미나 피카였다. 프란치스코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온유했고 동정심이 많았다. 한편,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귀족 집안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호화로운 연회를 즐겼고 당시 많은 청년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기사로 이름을 떨치길 원했다.
1202년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와 페루자의 전투에 참여했는데 아시시가 패하는 바람에 페루자로 끌려가 1년 남짓 포로로 지냈다. 원래 몸이 허약했던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 2년가량 병을 크게 앓았다. 병에서 회복된 그는 1205년 초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쪽 군대에 들어가려고 아시시를 떠났다. 바로 그날 저녁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그는 일종의 신비체험을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너는 어째서 주인을 버리고 종에게 달려가느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곧바로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어느 한 동굴에서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고민하며 지냈다. 그는 차츰 예전의 친구들과 어울리던 사치스러운 삶에 흥미를 잃었고 예수의 삶에 끌리게 되었다. 그즈음 그는 길에서 만난 한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그의 목에 입맞추었다. 전에는 나병 환자를 멀리서 보는 것도 힘들어했던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이 예수로 인해 일어났다고 여겼다.
얼마 후 ‘성 다미아노’라는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 기도하던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가서 쓰러져가는 내 교회를 고쳐라”라는 말을 듣고 성당 수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재정문제로 아버지와 크게 충돌하자 그는 주교 앞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입고 있던 옷마저 아버지의 것이라며 벗어버렸다. 이로써 그는 아버지와 재물과 결정적으로 결별했다.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삶이 공개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새로운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1208년 그가 아시시 인근의 포르치운클라 성당의 미사에서 들은 복음에서 드러났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오복음 10장).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복음 선포의 삶을 시작했다. 가난하면서도 기쁘게 지냈던 그는 가난한 사람, ‘일 포베렐로(il Poverello)’로 불렸다.
프란치스코, ‘가난’으로 돌아서다
회심(회개)은 어원상 돌아섬(μετνοια)을 뜻한다. 프란치스코의 회심은 부에서 가난으로 돌아섬, 가난의 선택이었다. 일찍이 그는 부를 즐기며 세상의 명예를 좇았으나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부를 포기하고 가난을 택했다. 그가 다미아노 성당에서 만난 하느님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었고 끝내는 벌거벗겨져 십자가에 달린 가난한 예수였다.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을 환대하며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예수를 자신의 삶에서 재현하길 원했던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예수를 닮은 인물로 회자하며 ‘제2의 그리스도’라고도 불린다.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는 핵심어 ‘가난’은 다의적이다. 먼저 가난은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의 결핍 상태를 뜻한다. 이 가난은 생명 유지와 성장을 저해하며 비인간화와 죽음을 초래한다. 있어서는 안될, 극복해야 할 일종의 ‘악’이다. 이 가난의 반대는 생명을 지속하고 사회를 재생산하는 풍요다. 한편, 이 가난은 대개 착취와 수탈의 사회적 관계에서 생겨난다. 누군가 부유해지려면 누군가 그만큼 가난해져야 한다. 부를 위해 가난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가난의 반대는 정의다.
이러한 부정적인 가난과 대조되는 가난도 있다. 먼저 물질의 소유욕에서 해방되려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가난이 있다. 청빈이라고도 부르는 이 가난은 물질적인 차원도 있지만, 소유에 관한 내적 태도를 중시한다. 소유의 대상은 물질뿐 아니라 사람과 힘과 시간 등 모든 것을 아우른다. 이 가난은 일종의 ‘덕’이며 그 반대는 탐욕이다. 가난하거나(혹은 가난하게 만들어진) 이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가난도 있다. 이 가난은 연대와 사랑의 행위이며 그 반대는 이기심과 무관심이다. 예수의 삶을 재현하려 했던 프란치스코의 삶은 청빈과 연대의 자발적 가난을 모두 포함한다.
‘부’는 어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힘과 연결된다. 특히, 자본주의체제에서 우리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상품을 사는 것은 상품에 투입된 누군가의 노동과 자연물(원료)을 소유하는 것이다. 곧 돈은 타인의 노동과 자연물을 청구하는 힘이다. 돈이 많을수록 타자에게 더 많은 것을 청구할 수 있다. 부자는 힘이 세다. 돈이 없을수록 청구할 게 없어진다. 가난한 사람은 힘이 없다. 부는 힘을 부여하고 가난은 힘을 박탈한다. 이와 달리 자발적 가난은 힘을 포기한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때는 예수를 급진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운동의 시대인 동시에 인구와 경제가 급격히 팽창하며 신흥 중산층 계급이 생겨나던 사회적 격변의 시대였다. 신흥계급의 부유한 상인 아들이었던 프란치스코는 기사로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루려는 꿈이 있었지만, 한번 회심한 후로는 죽을 때까지 당시 시대 흐름과 자신의 꿈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돈과 힘을 모두 포기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낸 그는 기존의 익숙한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것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형제자매가 되는 세계였다. 그는 ‘큰 자(maiores)’들의 사회를 떠나 ‘작은 자(minor)’가 되기를 원했다(레오나르도 보프, 《정 그리고 힘》).
프란치스코, 보편적 형제애를 살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직접 지은 〈피조물의 찬가〉에서 회심 후 변화한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시어로 보여준다. ‘태양 형제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이 찬가는 그가 몸이 몹시 쇠약해지고 눈병으로 거의 앞을 보지 못하던 말년에 쓴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가장 감미로운 노래가 태어났다. 죽음을 얼마간 내다보며 지은 이 노래는 창조주 하느님과 창조세계에 대한 그의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다.
힘과 소유를 포기하는 자발적 가난의 삶은 겸손한 삶이다. 힘과 소유를 포기한, 가난하고 겸손한 프란치스코는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장벽을 허물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는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다가갔다. 그는 자발적 가난으로 “출신, 국적, 인종, 종교에 따른 격차를 뛰어넘는 마음”, 모든 사람에 열린 형제애를 누렸다(《모든 형제들(FT)》, 1항과 3항). 그는 출생지와 거주지에 상관없이 세상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불렀고 그 자신도 ‘작은 형제’로 불렸다. 프란치스코는 열린 형제애로 가장 낮은 곳까지(나병 환자) 내려갔고 가장 먼 곳까지(술탄) 나아갔다. 이전에는 혐오감으로 멀리서 보는 것도 힘들었던 나병 환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돌봤다. 두려움을 떨치고 당시 가톨릭교회와 적대관계에 있던 이집트 술탄 말리크 알 카밀을 만나러 갔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이 비인간 존재에 쌓아놓은 벽도 허물어뜨렸다. 그의 열린 형제애는 인간을 넘어 우주 전체로 확장됐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의 집’이다(LS 1항). 모든 피조물을 한 집안의 구성원으로 여긴 그는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날씨와 불을 형제로, 달과 별과 물을 자매로, 땅을 자매이자 어머니로 불렀다.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쓴 작은형제회 수도자 토마스 첼라노는 그의 보편적 형제애가 드러나는 몇 가지 일화를 전해준다. 프란치스코는 꽃, 들판과 포도밭, 바윗돌과 수풀, 개울물, 과일, 땅과 불, 공기와 바람을 마치 그것들이 이성을 가진 듯 대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피조물의 찬가〉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권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노래했다. 그는 길가의 벌레가 행인에게 밟히지 않도록 옮겨 놓았다. 겨울이면 꿀벌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지 않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는 나무에 새싹이 날 수 있도록 나무 뿌리께를 자르지 못하게 했다. 정원의 한 부분은 아무런 풀이나 자랄 수 있게 사람의 손이 가지 않도록 했다. 세계를 보편적 형제애로 관상했던 프란치스코는 비인간 존재 자체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아봤다. 자발적 가난으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이룬 일체감은 우주적 일체감으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보편적 형제애는 그에게서 우주적 화해와 우주적 민주주의를 이루었다(《정 그리고 힘》).
〈피조물의 찬가〉의 마지막 두 연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다. ‘용서와 병고와 평화’의 연은 당시 분쟁을 벌였던 아시시의 주교와 시장의 화해를 바라며 썼고, ‘자매 죽음’의 연은 자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썼다. 처음에 쓴 부분이 우주적 질서에 관한 것이라면, 덧붙여진 부분은 우주의 일부인 인간세계의 질서를 이야기한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삶에 분열과 대립과 싸움, 병고와 두려움과 죽음이 들어 있음을 직시했다. 보편적 형제애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갈등과 분쟁은 가난으로 자기를 비운 프란치스코 앞에서 누그러졌다. 가는 곳마다 겸손하게 평화를 일구려 애쓴 그는 ‘평화의 사도’로 불렸다. 그는 자기가 겪는 고통도 ‘형제’로 불렀다. 의사에게서 살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죽음을 환영한다고 말하며 〈피조물의 찬가〉에 ‘죽음 자매’의 연을 추가했다. 자기비움의 가난과 겸손이 인간의 유한한 실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누그러뜨렸다. 1226년 10월 3일 해질 무렵 그는 알몸으로 땅에 누운 채 죽음을 맞았다. 가장 가난한 모습이었다. 죽은 지 2년도 지나지 않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프란치스코, 장벽을 허물고 다리를 세우다
우리는 초연결되었으나 파편화된 세계에 산다. 우리는 “마음속에도 땅 위에도 벽을 세우고 싶은 유혹”에 끌리는 “장벽의 문화”를 만들었다(FT, 27항). 분리에 익숙해진 우리는 장벽 안을 더 안락하게 여기게 되었고 연결감각을 잃어버렸다. 근대에 들어 세계는 정신과 자연으로 분리되고(이원론), 몸을 포함한 자연은 물질로 환원됐다(물질주의). 세계를 물질로 이루어진 기계로 여기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우리 내면을 차지했다. 경쟁과 효율의 세상에서 나와 분리된 타자는 이용 대상일 뿐이다. 그 결과 이웃과 자연은 사라지고 노동력과 자원만 남았다. 안이 황량해지니 밖이 황폐해진다(LS, 217항). 오늘 우리가 겪는 위기는 근본적으로 내면의 위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상을 가르는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돌이켜보면 프란치스코는 이미 800년 전에 장벽을 허물고 다리를 세우는 데 헌신했다. 그가 세운 다리 이름은 보편적 형제애였다. 〈피조물의 찬가〉가 보여주듯이 그의 가난과 겸손은 인간 사이의 벽,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벽, 인간과 죽음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다. 가난으로 돌아선 그에게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든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는 ‘생태적 회심’이 일어난 것이다(LS, 217항). 그는 생태적 회심에서 비롯한 보편적 형제애로 온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우주적 연대를 실천했다. 부와 권력을 좇던 당시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간 그는 오늘 우리에게도 ‘또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보편적 형제애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 다른 존재와 관계맺는 또다른 방식, 우주적 공생공락(conviviality)의 삶을 제안한다(이반 일리치). 보편적 형제애는 오늘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123 불법 비상계엄으로 열린 광장에서 우리는 함께 ‘다시 만날 세계’를 이야기했다. 광장에 모인 모두가 존중과 경청, 공감과 연대, 차별 없는 평등세상을 염원했다. 광장에는 비인간 존재를 대변하는 이들도 있었다. 광장에서 내다보았던 세계는 프란치스코의 보편적 형제애가 구현된 세계와 겹친다. 주거와 에너지와 돌봄, 산과 강과 바다와 갯벌 등 각종 공유재의 보전과 확장은 오늘 보편적 형제애를 구현하는 길이다. ‘차별금지법’과 ‘자연의 권리법’ 제정은 그 구체적인 실천이다. 하지만 ‘일상’이 돌아오자 광장의 염원은 기약 없이 ‘나중으로’ 밀렸다, 민생의 이름으로. 현실에서는 노동자와 빈민의 삶이 무너져내리고 비인간 존재가 파괴되는 안타까운 일상이 이어진다.
이상(理想)은 존중되기보다 외면당하기 쉽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이지만 경원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의 급진적 가난과 보편적 형제애가 너무 이상적으로 보여 사람들에게 충격과 부담을 준 탓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으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가 진정한 평화, ‘샬롬’을 누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었다. 전환이 화두인 우리 시대에 전환을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극복에 필요한 ‘근본적인 전환’이나 ‘정의로운 전환’을 꺼내면 비현실적인 이상이라며 무시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상은 실현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갈 방향을 제시하여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1979년 11월 29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보편적 형제애로 온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린 프란치스코를 ‘생태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