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와 자본주의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2014)는 기후변화에 대한 중요한 저술로서 근년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온 책이다. 그 책의 한국어 번역본이 최근 발간되어 나왔기에 조금 들여다보다가 다음 구절에서 시선이 멈췄다.
약 7년 전, 나는 우리사회가 끔찍한 생태계 파괴를 향해 치달아 간다는 절망감 때문에 자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내 능력마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을 하면 언젠가는 이별의 아픔을 겪게 되리라는 불안감 때문에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자연 속에서 아름답고 멋진 경험을 하면 할수록 이 아름다운 경험의 상실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비탄에 잠기곤 했다.
책을 읽다가 여기서 멈춘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것은 지난 수십 년간 줄곧 내 자신이 품어온 ‘비탄’의 감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이 책의 저자가 느끼는 절박한 심정에 완전히 공감하는 독자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에는 나와 같은 독자의 심금을 건드리는 대목이 많다. 예를 들어, 소위 생태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행 열풍’을 언급할 때에도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는 듯이 허무주의적 태도로 야생의 자연을 소비하고” 있다, 라고 저자는 매우 신랄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절망적인 세계 현실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사소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로서는 중요한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우선 이 책의 분량 때문이다. 저자는 기후변화라는 심각한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제시하는 데에 근 800페이지(한국어 역본)에 달하는 지면을 소모하고 있다. 이미 세상에는 기후변화에 관한 수많은 자료와 문헌이 넘치고 넘치는데 왜 이토록 방대한 지면이 새삼 필요했을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급적 종이와 나무를 아끼고, 소중한 자연자원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생각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특히 미국식 대학원 교육을 받은 지식인·학자들 중에는 어떠한 이슈, 어떠한 논제에 관한 저술에 있어서든 시시콜콜 관련된 온갖 이야기를 끌어다가 늘어놓는 것을 대단한 지적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에 젖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대작’을 집필하여 두각을 드러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경쟁적 연구 환경에서 길러진 습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그 습관은 본질적으로 뿌리 깊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의식·무의식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오미 클라인은 기후변화의 원인은 ‘탄소’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에 있다고 강조한다. 요컨대 기후변화를 막으려면 인류사회가 화석연료 사용을 대폭 줄여야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석탄, 석유 따위 화석연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화석연료의 대규모 채취·가공·유통·소비를 강요하는 구조, 즉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지당한 논리이다. 그리고 환경기술의 개발이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혁신으로 환경위기와 기후변화가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근본적으로 얼마나 무지하고 무책임한 자세인가를 깨우쳐주기 위해서도 그것은 우리가 되풀이해서 강조해야 할 논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회변혁운동가·환경운동가들이 보여주는 흔한 행동양태이지만, 나오미 클라인 역시 ‘자본주의’가 주범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책만 쓰는 게 아니라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바쁘게 돌아다닌다. 불가피하게 그들은 그 과정에서 대기를 더럽히고 지구온난화 유발 가스를 끊임없이 내뿜는 비행기를 포함한 온갖 반환경적 교통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근본적인 자기모순은 당분간은 용인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딜레마 자체에 대해서 별다른 자기성찰 혹은 적어도 불편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표현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에 이르자면, 어차피 우리에게는 타락한 수단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게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숙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도 좋은 것일까?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할 난제 중의 난제, 즉 우리가 긴장된 정신으로 항시 주시하고 있어야 할 ‘문제거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 클라인의 이 책은 많은 미덕을 가진 역작이다. 그중 가장 값진 것은 기후변화라는 엄중한 위기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인류사회가 이 위기를 도리어 축복으로 바꾸어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이다. 클라인은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그것은 단지 기후변화라는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지금 세계가 안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난제들을 거의 모두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가 질적으로 보다 높은 단계로 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믿음을 표명한다. 요컨대 저주를 축복으로, 번뇌(煩惱)를 보리(菩提)로 바꿔놓을 가능성을 기후변화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 없는 순전한 원망(願望)의 표출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기후변화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문제라면, 기후변화를 극복하려는 세계의 모든 개인적·집단적 노력들은 자본주의시스템 그 자체의 극복을 겨냥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오늘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시스템이 낳은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온갖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난제들이 그 과정에서 동시에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니까 핵심적인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시스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클라인 자신도 다양한 방법, 대안들을 열거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한 다수 풀뿌리 활동가, 시민, 지식인들에 의해서 시도되어온 온갖 다양한 사회실험들과 숱한 정치적 저항의 사례들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갈수록 패권을 강화하는 억압적인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것의 중요성이다. 그 점에서 클라인이 기대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에 빠져 있는 현상을 지적하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능동적인 정치참여와 사회적 혁신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시민의식’ 혹은 ‘공민의식’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사회 변혁의 필요성이나 환경문제를 거론하는 거의 모든 저술이 흔히 그렇듯이, 이 책도 기후변화라는 위기적 사태를 진단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데에는 매우 치밀하고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만, 문제해결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쉬운 것은 이 책 속에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표명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본소득이라는 해법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나는 기본소득은 비단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온갖 사회적, 실존적 측면에서 우리가 현재의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려 할 때 가장 쓸모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본소득이라는 것이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흔히 기본소득은 종래의 사회복지 프로그램들과 비교되어 그 장단점이 거론되고 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기본소득의 의미는 그 정도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수급자의 자격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정하는 일반적인 복지프로그램과 달리 아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일정액의 생계비 내지 생활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아이디어는 기존의 상식으로는 사실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저 돈을 받는다는 게 합당하냐는 강한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이런 의구심은 비단 자본주의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굳어진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종교적(특히 기독교) 윤리의식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무시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지난 6월 5일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둘러싼 스위스의 국민투표에서도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반대표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그 지역들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중시하는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는 곳이라는 점과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모처럼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부상한 것을 계기로, 이제 우리는 ‘일’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아니 우리가 무엇을 ‘일’이라고 불러왔는지 차분히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종래에 우리가 ‘일’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모두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받는 일이었음에 반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도 돈으로 그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예컨대 아기와 노인, 환자나 장애자를 돌보는 일, 가사노동 혹은 ‘그림자노동’으로 불리는 모든 일, 비상업적인 다양한 문예활동 등등)은 ‘일’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처럼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중요한 일들이 떳떳한 지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종전과는 달리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의 건강·자연을 돌보고 보살피는 노력들이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보다 풍요로워지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바뀌게 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노동윤리’의 허구성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그것은 이른바 ‘노동윤리’라는 게 과연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는 데 가장 좋은 길잡이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쓴 〈게으름의 찬양〉(1932)이라는 기념비적인 에세이이다. 러셀은 이 글에서 ‘노동윤리’라는 게 원래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즉,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사회의 지배계급 혹은 귀족 계층이 누려온 ‘여가(餘暇)’는 기본적으로 그들의 억압적인 지배하에 있었던 하층민의 노동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은폐하고자 지배세력이 꾸며낸 허구적인 아이디어가 ‘노동의 신성함’ 혹은 ‘노동의 존엄성’이었고, 그것을 기초로 ‘노동윤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노동이 고역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고, 괴로운 노동에도 즐거움이 수반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의 하층민, 특히 농민들에게는 부역과 공납이라는 엄중한 의무가 부과돼 있었고, 따라서 아무리 근면하게 일을 하더라도 궁핍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노동의 신성함이나 존엄성을 강조하는 노동윤리는 하층민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삶의 테두리를 넘어 대안적인 삶을 내다보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이념적 장치로 기능해왔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은 서구세계에서 수천 년간 강조되어온 ‘노동윤리’란 결국 ‘노예의 윤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근대 이후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산업혁명 이후는 괄목할 만한 기술의 발달로 엄청나게 생산력이 증가하고, 그 결과 잉여 노동자가 넘쳐나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었고, 반면에 많은 하층민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결과로 굶어 죽거나 비인간적인 구빈(救貧)제도 속에서 갖가지 모욕을 당하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러셀은 해묵은 노동윤리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이 가장 달가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게 바로 “가난한 자들도 여가를 누려야 한다”라는 아이디어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언제나 ‘쇼킹’한 아이디어라고 러셀은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가’라는 것이 더이상 부유층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상황이란, 경악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자동화·로봇·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인간이 수행해왔던 수많은 일이 급격히 기계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것을 예견해왔던 사람들이 ‘노동의 종말’이라고 불러왔던 상황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노동의 종말’
일부 전문가·지식인들은 산업혁명기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로봇이나 인공지능 등 신기술의 도입으로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하고 있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즉, 종래의 혁신적 기술은 어떤 것이든 인간을 돕는 보조적인 기술이었음에 반해 로봇이나 인공지능 등은 아예 인간 존재 자체를 대체해버리는 초(超)기술이라는 점이다. 지난 3월 서울에서 인간 기사(棋士)와 바둑 두는 기계 ‘알파고’ 사이에 벌어진 바둑 대결 소동을 통해서 우리는 비단 바둑뿐만 아니라, 신문 기사나 영화 시나리오의 작성도, 의료행위도, 외국 문헌을 번역하는 일도 기계가 대신할 날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전율을 느끼며 확인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현실적으로 다가온 ‘노동의 종말’ 현상을 회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키고 사회의 존속을 바란다면, 이 전대미문의 상황에 대비하여 시급히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실제로 2016년 정초에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다루어진 주 의제가 바로 이 문제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최근에는 미국 상·하원 합동 경제위원회가 ‘로봇, 인공지능과 일자리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청문회를 개최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사실은 이제 이 문제가 소수 지식인들의 관심사를 넘어서서 주류 사회의 긴급한 현안이 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이 상황에서 시대착오적인 ‘노동윤리’를 계속 고집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전통적인 노동윤리의 근저에는 ‘돈이 생기는 일’이 곧 ‘좋은 일’이며,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은 ‘나쁜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삶이나 사회적 삶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들이 늘 홀대를 당하고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근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적 논리로 볼 때도 실은 이 고정관념은 허점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돈이 생기는 일’이 좋은 것이고 ‘돈이 생기지 않으면’ 나쁜 일이라고 보는 것은 결국 ‘생산’ 측면을 일방적으로 중시하면서, ‘소비’ 측면은 경시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경제가 순조롭게 돌아가자면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한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자본가가 새로운 투자를 함으로써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진실은 그 반대이다. 즉,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소비행위이다.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 가난한 시민들이 물건과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자본가나 기업가들이 계속적으로 생산시설을 확장하기는커녕 기존의 생산시설의 유지조차 어려워지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건강한 경제가 유지되자면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들이 갖춰져야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력의 크기나 경제규모나 1인당 국민소득 따위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다. 그리하여 생산―유통―소비 과정이 사이클을 그리면서 원활하게 돌아갈 때 경제는 안정성을 유지하고 사회는 평화로워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돈을 쓰자면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하고, 또한 돈을 쓸 시간(여가)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그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기계화·자동화가 이미 깊숙이 생산 현장 속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예전처럼 장시간 노동에 얽매여 있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자본과 국가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수를 줄이거나 정규직 사원들의 비정규직화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아직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은 노동자들은 예전보다 더 긴 노동시간, 더 힘든 노동조건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내몰려 있다.
기본소득의 재원 ― 나누면 된다
지금 세계경제는 기본적으로 생산과잉―과소소비로 인한 심각한 디플레이션 상황(즉, 경제공황)으로 빠르게 들어가고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기후변화도 큰 문제이지만, 경제 상황이 이렇다는 것은 실로 불길한 조짐이다. 이대로 간다면 전쟁 혹은 상상하기 어려운 큰 파국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20~1930년대의 대공황은 전쟁을 거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전쟁을 해 봤자 잿더미가 된 땅에서 다시 경제가 살아날 가능성은 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경제를 뒷받침할 자연자원이 거의 고갈돼버렸거나 지구 자체가 이미 생태적으로 거의 완전히 죽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사고의 전환’만 이루어진다면, 이 절망적인 상황은 금세 종식될 수 있다. 즉, 노동시간의 대폭적인 단축을 통해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생산노동을 분담하면서 보다 많은 여가를 누릴 수 있게 하고, 동시에 기본소득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그것을 (궁극적으로는 전면적으로, 초기에는 부분적·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우리의 삶이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의 도입은 경제를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으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생산력이 매우 낮았던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과학기술 덕분에 오히려 생산력의 지나친 증대를 우려해야 할 시대이다. 실제로 지금은 온갖 생활물자가―오염되거나 날림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남아돌고 있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인간이 더는 괴로운 노역에 시달리고 있어야 할 이유도, 수많은 민중이 ‘풍요 속의 가난’을 견뎌야 할 이유도 없다. 하물며 예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노예생활을 감내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다수의 가난한 사람,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응당 누려야 할 생계보장과 ‘여가’를 돌려줌으로써, 그들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은 이 시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윤리적인 책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노동시간 단축이나 기본소득 보장과 같은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우둔한 질문은 없다. 왜냐하면 알래스카영구기금(1982년 이후 알래스카의 석유자원에서 얻어진 이익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배당금’ 형태로 매년 분배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집중적인 연구를 수행한 바 있는 정치철학자 와이더퀴스트(Karl Widerquist, 카타르대학 교수)가 명료하게 말했듯이, 사회 구성원들끼리 고르게 나눌 수 있는 재화가 없는, 그 정도로 빈곤한 사회는 지구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관건은, 우리사회가 고르게 나눌 의사가 있느냐, 그리고 고르게 나눈다는 생각에 대해서 우리가 정치적인 합의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치’라는 결론을 여기서 다시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어리석은 탐욕에 맞서고, 기후변화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다수 민중의 삶을 보호하고, 자연세계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합리적인 정치’이다. 그리고 현 단계에서 합리적인 정치란 온전한 의미의 민주정치뿐이다. 민주주의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