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무더위가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되고 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결국 지구온난화가 본격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후일 것이다. 별다른 근본적인 대책 없이 마냥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 수십 년간, 그리고 근년에 들어서는 매우 다급하게,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대해 끊임없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지만, 해결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적 노력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기후변화 문제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난제들)에 집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적 장치―정치―는 세계 도처에서 대부분 작동 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지배’해온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의 대통령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친 보통의 생활인들의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엄청난 권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이 어떤 정파에 소속해 있고, 어떤 경력과 어떤 가치관·세계관을 가진 인물인가 하는 것은 온 세계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차기 미국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민주, 공화 양대 정당 후보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유권자들로부터 심각한 불신의 대상이 돼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과연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올 11월 미국의 유권자들은 “오늘날 미국의 양식 있는 시민 대다수가 가장 혐오하는 두 인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이 상황은 언젠가부터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딜레마, 즉 ‘덜 나쁜’ 후보를 고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또다시 재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도 지나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트럼프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막대한 재산가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이력을 보면, 자신의 사적 이익 이외에 사회 를 위해서 어떤 뜻있는 일을 해온 흔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선거판에 뛰어든 이후에 보여준 언행도 문명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비웃는 너무나 조잡하고 난폭한 것으로 점철돼왔다. 문제는 그러한 인물이 어쨌든 놀랄 만한 대중적 인기를 얻어 결국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기이한 현상, 즉 정치지도자는커녕 일개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조차 의심스러워 보이는 인물이 미국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의 한 사람으로 확정된 이 사태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오늘날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 그중에서도 특히 주류의 엘리트 정치가들에 대해서 다수 대중이 느끼는 극도의 환멸과 불신 그리고 분노가 표출된 현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성 정치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시민들의 반응은 무소속 상원의원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뛰어들어 막판까지 이른바 ‘준비된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위협했던 버니 샌더스가 어째서 그토록 돌풍을 일으켰는지 그 원인도 설명해준다. 더욱이 샌더스는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로 자처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사회주의’를 죄악시해온 미국 주류 사회의 오랜 금기를 과감하게 깨뜨려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유로운 경쟁과 능력주의가 강조되지만 실은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활개를 치는 자본주의시스템 이외에도 얼마든지 대안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는 사회적 부를 공정하게 나누는 게 중요하고, 그럼으로써 평화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게 오늘날에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주된 수단이 정치라는 사실을 정열적으로 이야기했다. 많은 선의의 시민들이 어떠한 기성 정치가들에게서도 들어본 바 없는 이 신선한 메시지에 환호하고,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부호들과 자산가들의 공개적이거나 음성적인 끊임없는 ‘로비’에 의해서 타락할 대로 타락한 금권정치에 말할 수 없이 절망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 ‘민주사회주의자’ 샌더스의 메시지는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샌더스는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그가 깨려고 했던 벽은 너무나 두껍고 견고했다). 그의 퇴장으로 그를 지지했던 많은 시민들은 심한 좌절을 느끼고 또다시 절망에 빠졌지만, 샌더스 자신은 현실의 정치가로서 책임을 다하려 했음인지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물론 이 지지선언은 힐러리 측이 샌더스가 제안한 정책 중 일부나마 받아들인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허다한 정치논평가들 중에서 그 약속이 글자 그대로 지켜질 것으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힐러리 자신의 과거 행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15년간 클린턴 부부는 미국의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의 초청에 응하여 수많은 강연을 했고, 그때마다 그들은 한 시간에 평균 30만 달러의 강연료―정확히는 ‘뇌물’―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숱한 부자들과 자본가들은 ‘클린턴재단’에 끊임없이 거액의 헌금을 기부해왔다(저명한 소비자운동가 랄프 네이더는 힐러리가 거액의 사례비를 받은 강연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과연 그 강연 내용들이 지금 선거기간 중 대중에게 하는 이야기와 일치하는지, 그 녹취록을 공개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으나 힐러리 측으로부터의 대답은 아직 없다).
문제는 힐러리 같은 엘리트 정치가들이 자신의 위선과 탐욕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정치풍토이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미국 제일주의 혹은 미국 예외주의라는 환상에 깊이 빠진 채, 이 세계의 모든 다른 지역, 나라, 인간들은 마땅히 미국적 가치와 미국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들러리로서 살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말을 듣지 않을 때, 미국의 엘리트들은 아시아든 중동이든 라틴아메리카든 어디든 무자비한 공격과 침략, 인권유린도 마다하지 않는 습관에 길들어왔다. 현역 정치엘리트 중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하는 동안 그가 미국의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데 군사적 개입을 어떤 다른 정치가보다도 선호했다는 것은 많은 자료에서 입증되고 있다. 온두라스에서도, 리비아에서도, 우크라이나, 혹은 시리아에서도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 명분을 들이대며 미국이 무력 개입을 할 때마다 늘 중심에 있던 인물이 힐러리였다.
결론적으로, 지금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기묘하게 코믹한 선거 상황은 오늘날 정치라는 것이 다수 민중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외면해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민중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다운 정치가 사실상 실종됐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치러지는 선거라는 것은 단지 기득권층 엘리트들끼리의 자리바꿈 유희를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다.
여론조사의 추이가 이대로 간다면, 몇달 후 미국 대통령 선거는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정치다운 정치의 부재―혹은 1%만을 위한 정치―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에서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숙고해봐야 할 게 있다. 오늘날 정치가 이렇게 변질 혹은 타락했다는 것은 종래의 정당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제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왜 하필 2016년 이 시점에 미국의 대선 상황에서 저토록 민중의 강한 분노와 불신감이 분출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상황이 그 원인이 아닐까? (경제성장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어쨌든 다수 하층민에게도 물질적인 혜택이 돌아오지만, 성장이 끝났음에도 부의 집중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면 사회적 평화와 안정성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까지의 (미국식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정치나 대의제 민주주의란 경제성장이 계속되는 동안만 유효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면 기후변화를 비롯하여 갈수록 심화되는 생태적 위기,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안 등등,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정치, 어떤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가능하고, 또 바람직한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한 노력이 지금부터라도 다각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호 《녹색평론》이 기획한 ‘개헌문제’에 관한 좌담이나, ‘사드’배치문제에 대한 논의들도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개헌의 주체는 직업정치가들이 아니라 시민들이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해야 하고, 사드배치에 관련해서도 핵심적인 것은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한반도 주민의 생사가 걸린 문제를 국민들의 동의와 허락 없이 대통령이라는 권력자 1인이 자의적으로 결정한다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것이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위헌적 행위가 아닌지, 그것부터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시민이지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해야 한다.
실제로, 기왕에 우리가 익숙했던 미국식 민주주의가 유효성을 잃어가는 지금이야말로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은 훨씬 더 긴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기왕의 껍데기뿐인 정당정치,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패로 정치에 대한 환멸감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고, 이 풍토는 새로운 파시즘의 등장·지배를 조장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호에서 우리는 또한 쿠바에 관한 몇 편의 자료를 소개한다. 우리가 이 시기에 특히 쿠바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난국을 슬기롭게 뚫고 나가자면 무엇보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실체를 재음미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의 끊임없는 긴장관계에서 살아남은 쿠바라는 국가의 존재가 각별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료를 들여다볼수록 놀라운 것은, 근 반세기 동안이나 미국에 의해 철저히 경제적 봉쇄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작은 섬나라가 꾸준히 ‘사회정의’를 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숱한 역경 속에서 오히려 세계 제일의 지속가능한 친환경 국가로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흔히 일당독재 국가라고 비판받는 쿠바가 실은 자기 나름의 견실한 민주주의를 실천해온 나라라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