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끔찍한 가정이긴 하지만 12·3 쿠데타가 곧바로 제압될 수 없었다고 상상을 해보자. 계엄하에서 정치인이나 기자가 아닌 일반시민들이 겪게 될 변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차적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겠다고 포고령은 선언하고 있었다. 집권세력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언사나 행위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당한 사법절차가 생략된 채 가혹한 탄압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령 실제로 감금이나 박해 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대단히 높은 수위의 폭력이다. 자기검열의 굴욕 속에서 숨죽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노예와 다를 바 없고, 동료나 친구, 가족까지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을 늘 의심하거나 감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 굉장히 소중한 특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날 밤 가슴을 졸이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나 정치적 발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현대 민주국가들에서 주요한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는 일이나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에 일반시민들의 필요나 요구가 반영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보통사람들로서는 공동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은 이해관계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치인이나 관료집단에 호소하거나 로비활동을 하면서 그들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 최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방법은 스스로 직업 정치인이 되는 길밖에 없어 보이는데 특출한 능력이나 재력, 명성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그것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빛 좋은 개살구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체는, 그러므로 소수 엘리트들이 정치를 독점하는 과두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시민권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자유주의적인 원리들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민주주의(민중의 자기통치)와 혼동해선 안될 것이다.
1987년 헌법은 선거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결함 외에도 태생부터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서 삼권분립의 원리가 무력화되고 있고, 읍·면·동 자치 등 5·16 군사쿠데타 이전의 헌법이 담고 있던 민주적 요소조차 원상 복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대의제가 정당성을 갖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인 정당의 설립 및 활동에 제약을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민주국가의 헌법이라고 보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이 누차 지적돼왔다. 그럼에도 이 헌정체제가 30년 넘도록 별다른 대중적 저항을 받지 않고 ‘민주주의’로 행세하면서 그런대로 기능을 해올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결정적인 요인은 그 세월 동안 경제가 꾸준히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의 지휘 아래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각국 정부들은 적극적으로 적자재정 정책을 펼쳤고, 신용은 팽창했다. 기업들의 신세계가 펼쳐졌기 때문에 안정적인 일자리도 넘쳐났다. 물론 생활이 고달픈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적어도 자신의 아들딸은 그들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꾸릴 것이라고 믿었다. 너도나도 사교육에 열을 올렸던 것은 성장하는 경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마천루가 솟아오르고 밤낮으로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장이 무엇을 희생한 대가인지, 그리고 얼마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시장논리와 능력주의가 팽배하게 되자 경제적 불평등(정치적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민주정권’이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의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1%를 위해 99%의 희생을 강요한다. 그 일을 원만하게 성취하기 위해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를 통해 평등이라는 환상을 유포하고, 자본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내세워서 대중의 동의를 얻는다. 그리하여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된 모든 나라에서 부의 상향 재분배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우리 경우에도 독재자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여 식량안보를 위험에 빠트렸고, 온 국토를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놀이터가 되게 허용하여 국가공동체의 장기적인 지속가능성을 훼손해왔으며, 마침내 전례 없는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던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도움을 받아 초국적기업들과 글로벌 자본은 야만적인 자본축적에 가속도를 붙였다. 그렇게 반세기 가까이 신자유주의가 독주를 펼친 결과 빈곤은 더욱 깊어지기도 했지만, 자본주의적 가난은 불안감, 수치심 같은 심리적, 정신적 상흔을 동반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기회의 평등’이라고 하는 수사(修辭)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를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실증적으로 밝혀냈기 때문에 대중의 환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성장과 대의민주주의는 대중이 그 본질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성장은 한계가 있는 자본(지구생태계의 수용능력)을 고갈시키면서 무한한 이익을 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설혹 경제성장이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대의제 민주주의체제 아래에서는 그 과실이 고르게 분배될 수 없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버린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붕괴 이후 특히 자유주의 진영의 경제가 사실상 마이너스 내지 제로 성장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파생상품 등 카지노경제 영역을 제외)과, 서방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정치적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있는 현상은 연관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경우를 살펴볼 때에도, 만약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불신과 기성 정치엘리트들의 위선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지 않았다면, 특별한 정치적 업적도 없고 정치적 비전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 단지 전쟁의 폐허에서 한국을 일으켜 세운 공로자로 인식되고 있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능력이 검증된 바 없는 검사가 ‘공정’이라는 구호 한마디로 단기간에 정치지도자로 부상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망상에 빠진 대통령과 일부 극우 선동가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정치적 소요 사태쯤으로 인식해선 안된다. 대의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더이상 큰 피해를 끼치지 않고 역사에서 퇴장할 수 있도록, 퇴로를 잘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적 과업을 우리는 짊어지고 있다. 물론 합리적이고 유능한 대통령을 세워서 마비된 정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긴 하지만, 촛불·응원봉의 힘은 허울뿐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내실 있는 민주주의에 다가서기 위한 제도적 개혁(예를 들어 국민발안, 국민소환)을 이끌어내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 만약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촛불이 꺼진다면 우리는 수년 내에 더 젊고 더 강경하고, 영리해진 파시스트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다. 전쟁, 기후재앙, 팬데믹 등 반복되고 있는 재난 속에서 실수를 거듭할 여유가 없으므로, 이미 보통사람들의 중지를 모아서 정책에 반영할 방법을 찾아낸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실패의 사례까지,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응용하는 기지를 발휘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성장이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엄중한 현실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도 헛수고가 될 공산이 크다.
지난 석 달 동안 우리는 이 사회에 분노가 가득하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조차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하게 존재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실은 이것도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존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이 저토록 원한을 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큰 충돌 없이 함께 살아가자면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공통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이 고안돼야 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벌어진 폭동 사태의 밑바닥에도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은 세월만큼 곪아온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례 없는 집단적 폭력 행사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정치인들의 공공연한 선동이다. 신자유주의의 사기(詐欺)가 드러나자 이 체제에서 특혜와 특권을 독점해온 세력들은 극우 데마고그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중에게 더 좋은 사회나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럴 능력도 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의 상상력보다 공포에 호소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동을 일삼는 세력과 사회 혼란을 돈벌이 기회로 삼는 후안무치한 자들을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일 외에도, 보통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소외감이나 박탈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보려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이치에 닿지 않는 이유를 대면서 전시 아닌 평시에 비상계엄을 감행한 대통령이 극우 유튜브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주제도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이 기술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의 심리와 정신세계, 그리고 사회를 심원하게 변화시키고 있다는 증거는 이미 상당하게 쌓여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에서는 음모론이나 가짜뉴스가 진실보다 6배 빠르게 전파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주로 SNS를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사람은 거의 항상 미망 속에 있게 된다는 뜻이므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세상 경험이 부족하고 순진한 개인, 집단일수록 소셜미디어의 폐해에 취약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알고리즘 기술까지 가세한다고 생각하면, 과연 장래에 우리가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막막한 기분까지 든다.
알고리즘은 온라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과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진지하게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다. 미국 시사매체 《디애틀랜틱》의 데릭 톰프슨은 ‘반(反)사회적 세기’라는 제목의 최신 기고문에서 이러한 현실을 “마을이 실종됐다”고 표현했다. 마을이란 가치관, 신념, 취향, 혈연, 계급 등 공통의 관심사도, 배경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어쩔 수 없이―함께 살아가는 장소를 말하는 것일 텐데,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갈등도 일으키고 도움도 주고받으면서 인식의 세계를 넓히며, 무엇보다 관용을 배운다. 문제는 컴퓨터기술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매개하게 되면서 마을이라는 사회적 공간이 급격하게 축소되었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을 몸으로 익힐 기회도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도 한몫을 하고 있다. 놀이터, 스포츠시설, 학교, 교통, 병원, 요양원 등 마땅히 공적으로 제공돼야 할 필수 서비스가 돈을 주고 구입하는 상품으로 바뀌게 되면 비슷한 무리 내에서만 교류하는 문화가 굳어지게 된다. 확증편향은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생활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서로 다른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민자치를 강화하는 활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공원이나 광장, 문화센터 등 공공장소를 매력적인 공간으로 구축하는 작업도, 그런 시설들 자체의 유익함을 넘어서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국가를 쇄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헌법개정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내각제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인 것처럼 개헌 논의를 왜곡, 축소하고 있는 언론과 정치인 등 기득권층의 계략에 말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 중요한 문제를 정치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번 헌법개정의 핵심은 ‘민주공화국’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장치들을 확립하고, 그것을 국가권력이 실천에 옮기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담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당사자인 시민들이 주축이 되지 않고서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일을 맡을 기구로는, 아일랜드 등의 사례에서 유용성이 여러 차례 입증된 시민의회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시민의회의 장점은 무척 많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히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독보적인 강점을 갖는다.
첫째, 시민의회는 파편화된 문화, 양극화된 사회, 고립된 개인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선거대의제에 익숙한 우리는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생각하지만, 시민의회는 합의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수결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내 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헐뜯는 일이 자연히 수반된다. 그러므로 패배한 쪽은 앙심을 품고―극단적인 경우에는 투표과정에 부정이 개입되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하면서―다음 기회를 벼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쟁이 아닌 토의(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참가자는 의견을 개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도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는다. “내 의견이 존중받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누군가와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것은 처음이다.” 시민의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둘째, 시민의회는 저마다 다른 현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할 것이다. 시민의회의 절차를 살펴보면, 주어진 주제를 두고 균형 잡힌 객관적 정보를 제공받으면서 학습하는 데서 출발한다. 오늘날과 같이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시대에, 시민들이 이런 식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할 기회를 갖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유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시민의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기 때문에 교육효과는 널리 미칠 수 있다.
셋째, 시민의회는 추첨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편부당하다. 헌법재판소 등 기성체제의 기관들에서 내린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숙의하여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 쉽게 납득하고 선선히 따른다는 것 역시 지금까지의 시민의회 사례들에서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헌법이 개정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다. 시민들이 개헌운동을 통해서 참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그런 원칙이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 자체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법치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데, 법은 근본적으로 권세를 가진 자들이 힘없는 약자들에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 틀이 잘 작동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헌법을 손보자는 것이다.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삶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들이 더 악화되기 전에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함께 토론하기 위한 장(場)으로서도 개헌운동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법은 원래, 공동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건전한 상식과 양심으로 해소할 수 없을 때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눈으로 보면 수준 낮은, 초라한 공동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