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이 다시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몇 가지 거짓된 이야기가 미디어에서 무비판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짚어야 할 것은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면서 ‘세계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세계화라는 개념이 상품 및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별다른 장벽 없이 쉽게 이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무역기구(WTO)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사심 없이 살펴본 사람이라면, 세계화의 본질이 ‘자유무역’이라고 진심으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화가 가져온 것은 (특히 제3세계의) 국민국가들이 경제주권을 상실하고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당하면서, 소수 선진 경제(혹은 글로벌 자본)에 완전히 의존하는 구조로 경제가 왜곡된 것이었다. 즉 새로운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자유무역’은 보호무역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의 핵심은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을 용이하게 해서 상호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국적자본이 국경을 넘어 어느 곳에서나 보호를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나아가 특혜까지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자유무역협정이 진실로 ‘자유로운’ 무역에 관한 것이었다면 협정문이 저토록 두꺼운 문건이 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보통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협정문들은 기업들이 어떻게 국민국가의 기능(의회)을 무력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시시콜콜한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까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는 소란스럽긴 해도 새로울 것도 없고 변칙적인 것도 아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거대한 국내시장을 무기로 삼아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규칙을 바꿔가면서 상대 국가들에게 그것을 강요해온 미국의 통상원칙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다.
두 번째로 따져봐야 할 것은 기후변화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미국 대통령으로 인하여 세계적인 기후대응이 후퇴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런 전망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적어도 파리협정에서 탈퇴했던 트럼프의 대통령 재임기와 기후변화 문제를 우선적인 국정 현안으로 삼았던 바이든 정부 시절을 비교했을 때 기후문제와 관련해서 질적인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 시작되었던 전쟁들이 기후위기에 기여한 몫은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바이든 정부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유의미하게 감축된 것으로 확인되진 않는다. 오히려 지난 트럼프 재임 시절에 (관세로 인하여) 무역량이 줄어들면서 온실가스 배출이 감소되는 결과가 초래됐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부수적인 효과에 더해서, 만약 현재 떠들어대고 있는 것처럼 차기 미국 행정부가 실제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등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고 해외기지를 축소하면서 군사부문을 감축해간다면 온실가스 배출은 상당하게 줄어들 것이다. 전기차나 재생에너지에 대한 미국 연방정부의 지원이 끊어지면 기후대응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처럼 언론에서는 호들갑을 떨지만, 진실로 차질이 빚어지게 될 것은 일부 기업들의 판매수익과 주가(株價)일 것이다.
어째서 기후파국을 막고자 하는 선의의 정책적 노력들이 우연적으로 생겨난 효과만큼도 실효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야말로, 온실가스 배출을 (의미 있는 정도로) 줄이는 일은 신자유주의의 틀을 깨부수지 않고선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부가 열성적으로 기후대응에 나서지 않는다고 규탄하지만, 애초에 그것을 좌절시키고 있는 WTO, 자유무역협정 규정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2000년대 후반부터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그 지역의 태양광·풍력 발전사업을 지원함으로써 실업률과 온실가스 배출을 동시에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일본의 다국적기업들이 WTO 규정(내국민 대우) 위반이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중재재판부가 기업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 성공적인 정책은 애석하게도 몇년 만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인도정부는 홍수로 몹시 큰 피해를 입은 우타라칸드주 지역의 재건을 위해서 그곳에서 생산된 태양광에너지에 보조금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미국 기업에 제소를 당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동차 탄소배출을 경감하기 위한 제도를 기껏 만들어놓고도 자유무역협정(FTA)에 발목이 잡혀 시행해보지 못하고 폐기한 예가 있다. 정부의 손발에 재갈이 물려 있는 이런 현실은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또 잘 눈에 띄지 않는 장애물은 세계화가 구축해온 경제·정치 구조 자체일 것이다. 세계화(자유무역)의 논리에 의하면, 각 나라는 자신들이 경쟁력을 갖는 품목만 전문적으로 생산하여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해야 한다. 그럴 때 모두가 저렴하고 질 좋은 제품을 손에 넣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비교우위론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이론의 수혜자는 초국적자본이었다. 개발도상국의 기간산업이나 유치산업(幼稚産業)에 대해서 항상 비교우위를 갖는 것은 선진국의 초국적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 기업들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노동력이 싸고 규제가 약한 곳이면 어디든 들어가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고, 그곳에서 자원은 바닥이 나고 독성 쓰레기가 산처럼 쌓일 때쯤이면 손쉽게 빠져나와 다음 목표지로 향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경제는 점점 더 시장에 예속된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들고, 한 나라의 경제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고 시장의 수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노동력과 천연자원이 풍부하기 이를 데 없는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부채와 빈곤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바로 이렇게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나아가 수출지향 경제는 인간과 자연, 한 사회의 장기적인 생존기반을 반드시 황폐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것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사실상 단기간에 무역수지 흑자를 낼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부가 자유무역협정의 족쇄에 묶여서 운신의 폭이 제한적인 탓도 있지만, 4~5년마다 선거를 치르는 대의정부에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정책을 펴고자 하는 동기가 결여돼 있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상실, 지구생태계 파괴는 필연적인 종착지이다.
자유시장·자유무역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 값이 있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인데, 이것이야말로 WTO의 핵심이라고 봐야 한다. 장사꾼들이 하늘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 유형무형의 삼라만상을 상품화하여 독점적 배타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 지식재산권(특허권)이기 때문이다. 실은 태양광이나 풍력, 지열 같은 기술도 깨끗한 에너지 생산이라는 대의명분보다 녹색상품으로서 개발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탄소세 같은 ‘오염할 권리’(‘환경파괴의 가격’이라고나 해야 할 이런 개념이 도대체 어떤 권위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가 국가와 기업 간에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80억 인구 중에서 8억 명이 굶주리는 세계에서도 식용작물이 바이오연료라는 친환경 상품으로 바뀌어 선량한 사람들의 지갑을 털어가고, 숲이나 강과 바다는 녹색관광 혹은 탄소포집저장 능력(이른바 자연기반해법) 같은 이름으로 거래되기에 이르렀다. 지구생태계가 타락하고 취약해질수록 이 시장은 나날이 규모가 커졌고, 바야흐로 초국적자본들의 투기판이 되어가는 중이다. 대단히 거친 묘사이긴 해도, 신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후대응’이라는 것들이 대체로 이런 경로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장거리 운송, 즉 무역은 당연히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시장의 무한한 확대가 아니라 서로 필요한 물자를 호혜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것이 무역이라면, 자급을 기본으로 하고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나머지 필요를 교환으로 충당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생산경제는 수출에 목을 매고 소비경제는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시스템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게다가 통상마찰이 불시에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안까지 안고 있다.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인하여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무력충돌 가능성마저 고조될 것이라고 걱정들이 많은데, 지금이야말로 기회이다. 어찌하여 우리 경제구조(와 정치구조)가 이렇게까지 왜곡되었는지 차분히 살펴보고, 근원에서부터 바로잡을 때이다. 어떻게 게임의 규칙을 요령껏 이용해서 나만 살아남을까 하는 비겁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인간과 대지의 피눈물 위에서 극소수 인간이 찰나의 안락을 즐기기 위해서 고안된 게임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기후대응은 ‘탄소중립’도 ‘RE100’도 아니라 경제주권을 회복하는 일이다. 생태문명의 문을 여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을 테지만,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비상시 대책조차도 자유무역체제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인다.
‘자유무역’의 최대 피해자가 농민·농업·농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게임에서 농업이 승승장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농(農)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가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진지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자유무역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의 규칙과 전혀 다른 생활양식을 가진 농촌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규모화·기계화가 농업이 추구해야 할 길이라는 말을 세뇌될 지경으로 들어왔다. 그래야 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했다. 농업소득이 줄고 인구가 빠져나가 농촌이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무력해지고 있는 이유는 모두 시대의 변화, 즉 산업화에 발맞추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세계시장에서 우리 농업이 패배하는 이유는 선진국들이 농업에 엄청난 규모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고, 저개발 국가들에서 값싼 노동력이 착취되고 있기 때문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 농민들이 땅과 공동체, 인간의 건강 같은 비경제적인 요소들은 과감하게 무시해버리고, 기계와 농약을 더더욱 많이 투입하여 식품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자부심을 갖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기르는 일 같은 데 관심을 둬선 안된다. 한마디로 ‘기업가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정작 자유무역의 선봉에 선 국가들은 농업을 기간산업으로서 지키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도, 어리석고 순진한 한국정부는 비교우위 운운하면서 우리 농업이 냉정한 세계시장에서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든 그럴 수 없다면 도태돼야 마땅하다는 주문(呪文)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리고 WTO 집권 30년에 걸쳐서 예상되었던 대로 농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자, 관료들이라는 사람들이 농업을 마치 국고를 축내는 사양산업이라는 듯이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농업은 사양산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농업은 산업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유무역 이데올로기는 농업에 산업의 논리를 강요해왔고, 바로 그런 연유로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국에서도 농업의 생산기반이 꾸준하게 약화돼온 것이다. 물론 선진국 대부분은 놀랍게도 표리부동하게 자유무역에서 농업을 예외로 두고 식량자급률 100% 이상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농업이 경제의 토대이고 주권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일부를 제외한) 서방세계의 농민들까지 오늘날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일까? 초국적기업들이 호시탐탐 농업의 기반을 훼손하면서 독점적 이익을 누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후안무치는 끝이 없다. 3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특수를 누린 것은 방위산업만이 아니었다. 초국적 농기업들은 전시상황을 이용하여 우크라이나 신자유주의 정부로부터 옥토 중의 옥토, 우크라이나 농토에 대한 장악력을 상당하게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농업이 끝내 사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또다른 이유는―이 자명한 사실을 현대 도시인들만 모르는 것 같은데―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실험실에서 햄버거를 만들어내면서 연금술의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우쭐대지만, 대체육처럼 극단적으로 가공이 된 ‘식품’이라고 해도 그 원재료는 땅에서 나온다. 농업은 인류가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초국적자본도 마지막까지 지배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화석연료에 의존한 녹색혁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기후변화로 전 세계 작황이 널뛰기를 하면서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식량안보 지키기에 급히 나서고 있고, 다시 한바탕 초국적기업들에 의한 농업 침투도 본격화되는 추세이다. 이런 현실을 앞에 두고서,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를테면 경관 유지라든지, 논의 온실가스 포집 효과 등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내세우면서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농업을 옹호해서는 자칫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휘말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된다. 식량이든 경관이든 기후대응 효과든, 농업을 어떤 기능이나 생산품을 제공하는 산업으로 보는 습관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스마트팜이든 유기농산업이든 이번에는 초국적기업들의 ‘친환경’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의 곤경은 바로 그런 관점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 아닌가. 일본의 사상사가 세키 히로노(關曠野)는 상품으로서의 식량 생산이 아니라, 국토를 보전하고 생활양식을 보존하는 데 농민·농업·농촌의 궁극적인 존재의의가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한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것이 농업의 주된 임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농업의 재생보다 농업을 중심에 둔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농업에서는 최대화가 아니라 최적화가 기본원칙이다. 농부들은 무턱대고 수확량을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 농업의 목표는 지속성의 확보이고, 그것은 최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투입물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고 산출물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비료가 적정 수준을 넘어가면 작물은 허약해지고 지력은 훼손되며 이듬해의 수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삭에 낟알이 지나치게 들어찬 벼는 가을 태풍에 취약하다. 순환의 원리, 지속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고, 착취나 추출로 인해 근본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합리적인 농사방식이다. 수십 년에 걸친 녹색혁명 이데올로기 공세와 자유무역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70% 이상의 인구를 소농들이 먹여 살리고 있고, 또한 가장 생산성이 높고 땅을 잘 보호할 수 있는 영농은 가족농의 방식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130년 전에 조선의 관료들이 정부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었을 때, 마치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처럼 국가가 사유화되고 사회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을 때, 우리 선조들은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외치며 궐기했다. 그런데 지금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농민이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자유시장’ 전체주의 아래에서도 농촌은 유일하게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농민은 사회적 압력이 강요하는 선악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윤리적 개인주의, 비폭력 저항(사탸그라하)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은 자립·자급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인구 과반수가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세계에서도 농본주의를 다양하게, 창조적인 방식으로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율성(자치권)의 여지를 만들고 혁명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는 거대한 자기학대, 자기혐오의 문화에 짓눌려 있다. 먹고 먹힘으로써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동학 교리는 자기긍정의 근원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거룩한 존재이다. 그런 거룩한 존재로서 우리는 무엇을 용인하고 용인하지 않을 것인지 서둘러 결정해야 할 것이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