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일 지음 《라틴어 수업》(흐름출판, 2017년)
2010년 2학기에 한동일 신부는 서강대학교로부터 라틴어 수업 강좌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잠시 쉬었다가 로마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던 게 2016년 1학기까지 꼬박 12학기나 강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24명이었던 수강생이 날로 불어나 매 학기 200명이 넘는 학생이 강의실을 꽉꽉 채웠기 때문이다. 인근의 연세대, 이화여대에 이어, 학점교류가 안되는 다른 대학의 학생들, 심지어 일반인 청강생까지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줄탁동시라고 했던가. 학생은 취업준비를 위해서가 아닌 진짜 공부를 그에게서 배웠다. 공부만 알고 살았던 그는 학생들에게서, 아니 학생들의 아픔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봤다. 마음 한편에 밀쳐놓았던 스스로의 고통과 어려움도 어루만질 수 있었다. 최근 그가 펴낸 《라틴어 수업》이란 책은 바로 그 6년간 학생들과 공유한 강의 내용을 풀어놓은 것이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이란 부제가 결코 무색하지 않다.
공부란 몸으로 하는 것
그는 광주 가톨릭대학교와 부산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2000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듬해 로마 유학길에 올라 2004년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원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3년간의 사법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동아시아인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의 변호사가 됐다. 이탈리아어나 라틴어뿐만 아니라 각종 유럽어 그리고 역사와 철학, 법학에까지 두루 통하지 않으면 결코 쌓을 수 없는 경력이다. 타고난 천재이겠거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스로 ‘루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로마에서 수업을 받을 때는 120명의 학생 중 교회법학을 강의하는 노교수의 유머를 못 알아듣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마치 일용직 노동자가 일하듯 고통스럽게 공부해 그는 고비를 하나하나 넘겼다. 흔한 성공사례나 미담, 혹은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다. 비법이나 비결은 없다. 그저 무한한 고통만을 강권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책을 읽노라면 어느 결에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일상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더구나 ‘스펙’과도 거리가 먼 라틴어 강좌가 어떻게 해서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됐을까.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 신부가 강좌를 시작한 즈음은 한국의 대학들이 취업률에 목을 매며 거의 입사시험 대비 학원으로 전락해가던 상태였다. 노골적으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공급하겠다”는 플래카드를 내건 곳도 적지 않았다. 체면치레로나마 열어놓았던 인문학 강좌는 하나둘 폐쇄됐다. 낯 뜨겁게도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정치안보국제학과를 졸업하는 일도 벌어졌다. ‘국제’라는 말을 집어넣으면 혹시나 취업에 유리할까 해서였다. ‘의생명융합’ 학부처럼 듣도 보도 못했던 과들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서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김예슬 학생은 그해 3월 대학을 거부한다며 자퇴서를 던졌다. 순수 학문, 진짜 공부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던 시기였다. 바로 그런 때에 한 신부의 강의가 학생들의 ‘코드’를 건드린 것이다.
그의 책을 천천히 읽어내려 가노라면 학생들이 어째서 그의 강의에 빠져들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는 라틴어를 배우는 어학교실이라기보다는 종합 교양강좌인 것만 같다. 이래서야 라틴어를 배울 수 있을까, 의심은 들지만 일단 안심은 된다. 라틴어가 엄청나게 배우기 힘든 언어라는 얘기는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강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처럼 유명한 라틴어 문구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유럽 그리고 우리가 사는 얘기로 퍼져 나간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라틴어가 어떤 언어인지 서서히 머릿속에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가 소개한 라틴어는 매력적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이며 라틴어의 대가인 키케로마저 ‘지긋지긋한 라틴문학’이라며 넌덜머리를 냈을 정도로 라틴어 문법은 분명 복잡하다. 그러나 고비를 잘 넘기고 난해한 문법체계를 익히고 나면 확실히 공부하는 훈련이 된다는 게 한 신부의 얘기다. 나중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와 마주해도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 스스로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격려한다. 전세계 교과서가 공인한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원래는 평범했으나 36살에 라틴어를 독학한 뒤 잠재성을 터뜨릴 수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라틴어에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상태로 바꾸고 사고를 체계화하는 마력이 있다는 그의 얘기에 점점 빠져든다. 실로 오랜만에 고통을 참으며 끈기를 갖고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한 신부의 강의에서 조선의 서당이나 유럽의 중세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오직 문리가 트이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던’ 그 교육의 오래된 미래를 봤음에 틀림없다.
한 신부에게 선생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틀을 짜는 사람이다. 그는 학생을 위해 공부하는 틀을, 나아가 인생을 보는 틀을 짜주고 싶어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장을 선사하고 싶다는 표현도 자주 쓴다. 차곡차곡 지식을 책장에 정돈하고 불려가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어느덧 배를 깔고 눕거나 팔베개를 하고 책을 보던 내가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곁에는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정갈한 책장이 있다. 그렇다. 라틴어 동사활용표를 달달 외울 필요는 없다. 내 뜻을 라틴어로 표현할 때 어떤 단어를 찾아 문법에 맞게 쓸 것인가 방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걸 순식간에 이해하게 된다.
그는 우리에게 공부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라고 가르친다. 라틴어로 습관이란 뜻의 단어 ‘하비투스(habitus)’에는 수도승이 입는 옷이란 의미도 있다. 좋은 자질이나 두뇌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내다. 매일 출근해 일하는 노동자처럼, 공부하는 노동자는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차곡차곡 몸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아 일정한 시간을 공부해야 한다. 머리로만 하면 반짝 끝나지만 몸으로 하면 공부를 옷처럼 입을 수 있다. ‘하비투스’가 그 사람의 미래다.
위로가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
책의 중반을 넘어가면 우리는 라틴어를 향해, 세상을 향해, 그리고 내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향해 거침없이 몸으로 부딪쳐 나아간다. 그는 공부를 해나가는 굽이굽이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 세상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리고 내면의 나를 다스리느라 얼마나 외로웠는지 다 안다는 듯 조근조근 말을 건다. 의심스러우면서도, 혹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류에 떠밀려, 될 수 있으면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려고 했던 자기자신을 정면에서 찬찬히 뜯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입었던 무수한 상처를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면서.
지금은 신부님이자 변호사이며, 무엇보다도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한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어려서 그는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며 서슴없이 악담을 퍼붓는 아이였다. 공부하며 좌절을 거듭하다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릴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 뒤에도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자살을 하려고 했던 적이 또 있었다. 그는 그때마다 두 문장을 떠올렸다고 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Letum non omnia finit).”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 그에게 희망이란 이루고 싶은 무엇, 혹은 어떤 기대와 그것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것들이 아니다. 죽음과 마주했을 때 그저 희망 그 자체가 그를 살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입시나 입사, 혹은 부모님을 위하거나 친구를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의 지성 세네카가 얘기했듯이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어떤 비둘기도 참새처럼 날지 않고, 어떤 앵무새도 부엉이처럼 날지 않는다.
그는 로마 유학 때 수업의 내용과 용어조차 못 알아들으면서, 죽고 싶을 정도로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실력은 천천히 쌓인다는 걸 알았다. 공부는 자동판매기가 아니었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허다하지만 꾸준히 체계적으로 학습량을 쌓은 두뇌는 어느 순간 화수분으로 변한다는 걸 경험했다. 무능한 노동자라고 수없이 자신을 책망했던 게 언제였던가 싶은 때가 왔다. 그는 공부란 성숙을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맙소사, 화수분이라니. 내내 진중하고 절제된 표현만 써왔던 그가 이런 어휘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는 법학 시간에 배운,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라는 구절을 인용해 끝없이 갈망해 성취한 뒤에 밀려드는 허무함을 맛보는 경험을 꼭 해보라고 권한다.
여기까지라면 자기계발서에 가깝다고 여기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이루기 힘든 일이 많다는 걸 인정한다. 온갖 아픔을 안고 사는 청춘들과 부대끼며 그는 우리사회가 단단히 병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보기에 “공부해서 남 주냐”는 얘기는 잘못됐다. 우리사회 청년들이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해서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데는 발군이지만 다른 사람이 착취당하는 사회시스템에는 무관심하다. 나나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지만 어려운 사람의 신음에는 귀를 막는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공부가 흉기가 되고 말았다. 배워서 남 주는 사람이 지성인이다. 우리는 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읽는다. 청년들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고 그는 믿는다. 정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나거든 속 끓이지 말고 “그냥 쌩까라”고도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랜만에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곧바로 첫 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책을 만났다. 책을 읽는 내내 특별히 라틴어를 공부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에게 라틴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라틴어 명사를 사전에서 찾을 때는 ‘주격 단수 1인칭’으로 찾아야 한다. 라틴어 명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하는 부분은 명사의 성, 수, 격과 관련된 개념이다. 라틴어 명사는 남성, 여성, 중성 그리고 격과 수에 따라 어미변화를 한다. 형용사, 대명사 역시 성, 수, 격에 따라 어미변화를 한다. 우리말에서 ‘은/는, 을/를, 의, 에게’와 같은 조사의 역할을 명사의 어미변화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이 격이다. 다른 유럽어는 관사를 활용함으로써 다양한 격변화의 부담을 덜었다. 유럽어는 관사를 통해 명사의 성과 수를 표시하고, 엄격한 어순의 사용을 통해서 격도 드러낸다. 하지만 라틴어는 이런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배울 때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인칭, 성, 격 따위가 왜 필요한지 알았다. 이런 규칙이 있으면 문장을 늘어뜨리는 주범인 대명사, 관사, 전치사, 접속사 따위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라틴어 문장이 간결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라틴어는 맛과 멋을 위해 효율을 포기한 언어이다. 메리툼(meritum, 장점)이 곧 데펙투스(defectus, 단점)란 걸 알겠다. 이런 걸 깨닫게 하다니. 제대로 가르치는 선생님은 위대하다.
전문으로 글을 쓰는 분이 아니라서 투박하고 거친 문장도 더러 눈에 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문장의 골짜기에서 새로 건지게 되는 깨달음이 있다. 나와는 인연이 멀게만 느껴졌던 법학과 신학, 그리고 세속주의에 대해서도 제법 아는 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분은 학자 중에서도 아주 드문, 사전을 만드는 분이 아니던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에 걸쳐 《교회법률용어사전》 초역을 마쳤다. A4 용지 1,400장 분량, 단행본으로는 10권 정도 되는 길이이다. 그는 앞으로 《이탈리아관행어사전》, 《라틴어사전》도 번역할 계획이다. 우리사회가 오랜만에 학자다운 학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편협한) 학계와 교계가, “공부만 하다 보니 성격이 유별난” 그가 혹시 튀는 행동을 하더라도 사랑과 관용을 베풀기를 바란다. 그리고 선생께는 “두려워하지 말라(Nolite timere)”는 말씀을 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