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싫든 좋든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사이이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상호 간 이해가 매우 부족한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반시민들은 물론이고, 이른바 깨어 있는 지성인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저질러진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그렇습니다. 위안부문제는 비단 인권문제일 뿐만 아니라, 일본이 전쟁과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로서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층과 수구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리버럴한 입장을 가진 지식인이나 언론들도 이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는, 저와 같은 한국인이 보기에는, 매우 안이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재작년 아베(安倍) 정부와 한국의 박근혜 정부가 ‘불가역적으로’ 타결되었다면서 발표한 위안부문제에 대한 합의 처리는 한국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습니다. 왜냐하면 양국 정부가 위안부문제의 당사자인 아직 생존 중인 고령의 할머니들의 의사를 전혀 물어보지 않고 이 문제를 정치적인 셈법만 가지고 타결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내놓기로 한 10억 엔이라는 돈이 ‘사죄금’인지 혹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원조금인지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양국 간의 합의가 발표된 직후 일본정부가 보여준 반응을 보면, 그 돈은 사죄금도 배상금도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일본정부와 일본의 지배층에게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진심 어린 책임의식도, 사과할 마음도 없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 밝혔던 것입니다. 그들은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매우 질 낮은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고, 지금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의 보수 기득권세력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일본의 양심세력, 즉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지성인들마저 피해 당사자들을 무시하고 이루어진 이런 식의 위안부문제 처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대체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한일 간의 상호 이해는 아직 요원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은 최근에 전개된 한국의 대규모 촛불시위의 경과와 그 성과에 대해서 일본의 언론이 보여준 반응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한국의 다수 시민들은 대체로 작년 10월부터 금년 봄까지 치열하게 행해진 ‘촛불데모’를 통해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민주적 정부를 세운 데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이 ‘촛불혁명’에 대해서, 일본의 극우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 혹은 중도적 언론에서도 민주주의 후진국에서 일어난 ‘혼란 사태’ 정도로 취급하는 논조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 고의든 아니든 상황을 근본적으로 오독한 어처구니없는 관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는 원래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험난한 투쟁을 거쳐서야 간신히 맛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열매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는 만고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우리들이 볼 때, 근대 이후 지금까지 일본은 아래로부터의 민중항쟁에 의해서 정부를 전복시켜본 적도, 정권을 바꿔본 경험도 없는 나라입니다. 실은 근대 일본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정치적 대변혁도 엄밀히 보면 지배층 내의 권력교체를 위한 쿠데타였지, 풀뿌리 민중에 의한 반란도 혁명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늘 그 실체가 매우 공허하고 빈약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쟁 전이나 전후에 일본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의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민중봉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패전 후 미군의 점령정책에 의해서 성립·제도화되었고, 그 후 한 번도 시민들의 항거투쟁으로 실제로 정권을 바꿔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기적으로 선거를 하고, 형식적으로 정당정치와 의회제를 유지한다고 해서 저절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당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사실상 독재체제 혹은 소수 기득권 지배층에 의한 과두지배체제인 경우는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한국의 역대 군사정권과 수구 정권들도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형식적으로나마 의회제를 유지했습니다. 일본을 장기적으로 지배해온 자민당 정권과 지금의 아베 정권도 그랬고, 그리고 이른바 민주주의 모범 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정치도 선거를 하고 의회정치를 하고 있지만, 그 민주주의가 실은 껍데기뿐이라는 것은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 혹은 정부들의 특징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평범한 시민들의 욕구를 무시하고, 국가기구를 사익추구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기득권 지배층의 이익만을 충실히 관철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원래 민중이 자율적으로 자기들 삶의 문제를 통제하는 정치시스템입니다. 요컨대, 다수 민중이 주권자로서의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는 것이 가능할 때만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문명사회라는 것은 거의 언제나, 어디서나 부유하고 힘 있는 소수의 강자와 가난하고 힘없는 다수의 약자들로 나누어져 있는 사회를 뜻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부유한 기득권자·권력자들이 자기들의 부와 권력 그리고 특권적인 지위를 자발적으로 내놓고 양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은 지난한 투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적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고 해서 잠깐 안도하고 있다가는,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층이 언제 독재 내지 권위주의적 체제를 복구하여 다수 민중을 사실상의 노예로 삼을지 알 수 없는 게 냉정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 인권운동, 반전평화운동, 환경운동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의 생활하는 시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집회와 시위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혹은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한국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리 불만이 많고 고통스러워도 꾹 참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저 없이 저항적 행동에 나서는 게 한국 근대의 민중운동사의 큰 특징이 되어왔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배세력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노예적인 삶을 강요하는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장기간에 걸친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 그리고 독재시대를 통해서 뼛속 깊이 터득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궐기했던 1960년 4월의 경험,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그리고 군부 독재정권을 끝장낸 1987년 6월의 투쟁은, 그러한 저항운동의 큰 줄기를 형성해온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이번의 ‘촛불혁명’도 결국 그 저항운동의 연장선에서 전개된 투쟁이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투쟁은 시종일관 오직 촛불을 들었을 뿐, 극히 평화적으로 행해졌다는 게 무엇보다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데모에 참가한 시민들은 그저 한 가지 구호를 열심히 외쳤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집회·시위였기 때문에 각자의 생활상의 다종다양한 고통과 불만을 토로하는 온갖 구호가 나올 법도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끊임없이 외치는 데 집중했던 것입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세계경제가 침체되고 성장이 둔화되면서 그 여파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그중에서도 무역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 경제는 세계 자본주의경제 속에서 심히 취약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미래가 몹시 불투명해진 청년세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저주하며 오늘의 한국의 상황을 ‘헬조선’이라고 규정하고 자조해왔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청년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 즉 학비문제나 고용문제 등등, 자신들의 괴로운 삶의 문제와 앞날의 전망에 관련한 요구를 크게 주장할 법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저임금 노동의 실태는 매우 비참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전체 노동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노동운동의 자유를 외치는 것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를 열렬히 외치는 데 더욱 치중했습니다.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즉, 청년들이나 노동자들을 포함해서 데모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갖고 있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들이 아무리 절박한 것일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민주정부가 들어서야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보다 더 긴급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 인식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구호 속에 집중적으로 담았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한국인들의 싸움은 100년도 넘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즉, 그 전통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층과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난 봉기는 결국 어리석은 지배층과 외국 군대, 특히 일본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분쇄,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저항정신은 잠복된 형태로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분단시대의 독재정부 밑에서도 끈질기게 지속돼왔습니다.
지금 한국의 헌법 전문(前文)에는 대한민국은 1919년의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또한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의 상하이에 세웠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1919년 4월에 성립된 이 망명객들에 의한 임시정부는 그 헌법에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임시정부에 집결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옛 조선의 유학정신이 몸에 밴 사람들로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조선왕조의 은덕을 입은 양반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옛 왕조체제의 복원을 꿈꾼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근대적인 국민주권 국가, 즉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원리를 토대로 한 새로운 나라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3·1운동이라는 것이 외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는 전면적인 민중해방을 지향한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점은 또한 3·1운동이 기본적으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한 운동이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은 본래 유생이었다가 동학의 주요 지도자가 된 인물이었는데, 나중에 관헌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의 기록을 보면, 그가 꿈꾼 것은 지방에서는 집강소(執綱所)라는 민중자치 기관을 중심으로 한 자치제의 확립, 그리고 중앙에서는 복수(複數)의 지도자들에 의한 합의제 정부운영, 즉 일종의 공화주의 정치체제였음이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흐름, 즉 민중저항의 역사를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흐름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지금 한국에서 사람들이 왜 ‘촛불혁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식민지배자와 독재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은 때때로 상당한 성과를 얻기도 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민중이 참혹한 학살을 당하기도 하고, 그 운동의 후유증으로 오히려 더 강력한 반동적 지배체제가 들어서는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상당히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종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전개될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압도적입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물론 있습니다. 한국의 이번 ‘촛불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현직 대통령을 법률이 정한 엄격한 절차에 따라 탄핵을 하고, 구속까지 시켜 지금은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현 상황에서 가장 민주주의적 가치에 충실하다고 평가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새 정부의 수반이 된 문재인은 원래 인권변호사로 살아왔고, 제대로 뜻을 펴지는 못했지만 잠깐 동안의 민주정부였던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운영을 실제로 경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5월 10일, 당선 직후 치러진 취임식에서 향후 5년간의 임기 동안 자신이 권력자가 아니라 단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국민의 일원’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이번에 어떻게, 무엇 때문에 대통령으로 뽑혔는지 잘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취임한 지 석 달이 가까워 옵니다만, 지금까지의 그의 언행은 국가권력을 사익을 위해 사용해온 전임자들과는 무척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운영의 책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에 대한 설명책임과 시민들과의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시점에서 국가에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임을 잊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취임 직후 그가 가장 먼저 발표한 정책제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그리고 젊은이들의 일자리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국회 안팎에 아직 광범하고 뿌리 깊게 포진해 있는 기득권세력과 수구 언론들의 완강한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단행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나 제안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방식에 대하여 그가 내놓은 획기적인 제안입니다. 예를 들어, 새 정부는 오랫동안의 골치 아픈 현안이었던 노후화된 고리원전 1호기를 폐쇄하기로 결단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현재 건설 중인 새로운 원전―신고리 5·6호기―공사를 일시 중단시킨 다음 공사 재개 여부는 시민들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민들의 결정에 맡기겠다면서 밝힌 구체적인 시나리오입니다. 즉, 종래에 국가의 중대사는 거의 예외 없이 권력자와 관료 그리고 이른바 전문가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왔는데, 이제 그것을 평범한 시민들이 주체가 된 시민배심원단을 구성하여 거기서 충분한 숙의와 토의를 거쳐서 결정하면 정부가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시민배심원단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숙의―토론이 가능한 소규모 회의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회의체는 일반시민들 중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것이 특기할 점입니다. 실은, 이 시민배심원단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쇠퇴일로에 있는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재생시키기 위한 가장 믿을 만한 방법으로 고안·실행되고 있는 ‘숙의민주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덴마크에서는 1980년대부터 ‘시민합의회의’라는 명칭으로 과학기술 관련 현안을 이 방식으로 논의·결정해왔고,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에서는 근년에 헌법개정을 ‘시민의회’를 구성하여 의논하는 구조를 만들어 실행해왔습니다. 아주 최근에는 몽골에서도 시민들의 적극 참여를 통한 헌법개정을 위해서 이 방법을 도입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시민의회, 시민합의회의, 시민배심원제는 각기 이름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 것으로, 모두 무작위로 뽑힌 각계각층의 보통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국가나 지방자치체의 중대사를 결정하도록 설계된 제도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형사법정에서 오랫동안 시행돼온 배심제나 근년에 일본과 한국에서도 도입·실행하고 있는 재판원제도, 국민참여재판제도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원리에 입각한 제도입니다.
이렇게 국가의 중대사를 추첨으로 뽑힌 시민 대표들의 주체적인 결정에 맡긴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정신과 원리를 현대의 상황에 맞게 부활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아테네에서는 전쟁의 지휘관이나 재정관 등 특수한 능력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책을 제외하고는 모든 행정관이나 재판관들을 전부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선거에서는 아무래도 명망가, 부자 등 사회적 특권층이 당선되기 쉽고, 따라서 선거제도를 계속 유지할 때는 엘리트들이 자기들끼리 권력을 주고받는 시스템으로 굳어지고, 그 결과 평범한 민중의 정치적 발언권은 축소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아테네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인간은 거의 반드시 그 권력을 독점적으로 또 영구적으로 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공직자를 평범한 시민들 중에서 제비뽑기 방식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선거는 귀족정을 유지하는 제도인 반면에 추첨은 민주정을 유지하는 제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쇠퇴의 징후를 드러내고, 극우 파시스트들이나 강한 권력욕을 가진 포퓰리스트들이 민중을 선동하여 정치지도자로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는 기성 엘리트 중심의 정치에 대중이 크게 환멸을 느끼게 된 사실과, 선거제도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한계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회생시키려면, 일시에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점진적·부분적으로나마 추첨제를 도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일찍부터 세계의 많은 학자, 지식인, 사상가들이 해왔고, 그중 대표적인 분으로 우리는 오다 마코토 선생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다 선생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한 자신의 사상의 출발점이 바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점에서 오다 선생이 생애의 마지막에 남기고 떠나신 저작의 제목이 ‘오리진(origin)으로부터 생각한다’라고 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복잡한 이론을 필요로 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운명과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하는, 즉 자기통치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정치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윤리적으로 커다란 위기상황에 처해 있고 핵전쟁의 가능성도 여전히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려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파시스트들이나 유사 파시스트들은 주장하지만, 실제로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 점을 생각하더라도, 지금 한국에서 ‘촛불혁명’의 성과로 모처럼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그동안의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살리기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여러 실험들은 일본의 여러분의 주목과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기] 위의 글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재인 정부는 아직 사드(THAAD)배치 문제에 관하여 민주적 원칙을 표명하고 있었다. 즉, 이 국제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처리하는 데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온전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7월 29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자, 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태에 대응한답시고, 즉시 사드의 임시 배치를 결정해버렸고, 그럼으로써 민주적 원칙을 운위한 당초의 입장을 뒤집어버렸다. 어떤 내막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드배치 그 자체보다도 모처럼 민주정부로서 성립한 문재인 정부의 신용이 크게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조금씩 드러내는 어리석거나 서툰 국정운영 방식과 더불어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무겁게 한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간다면, 당초에 원전공사 재개에 대한 결정을 시민들에게 맡기겠다고 한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드문제도 원전의 경우처럼 시민배심원단 혹은 숙의형 공론조사 형식을 통해 시민들이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지난 7월 22일 도쿄에서 열린,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평화운동가, 민주주의 사상가, 작가로 평가받는 고(故) 오다 마코토(小田實) 선생의 10주기 기념집회에서 발표된 원고에 약간 가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