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증원과 의사 파업으로 사회가 혼란스럽다. 의대 정원 증원이 필요해 보이는데 정부가 추진하는 내용과 추진 방식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의사 수 증가로 의료의 공공성이 획기적으로 확대될지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른 나라 의사들은 먼저 의대 정원 확대를 요구한다는데 우리나라 의사들은 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가?
의료도 일종의 서비스로 볼 때 의료가 공공재인가 아닌가 논쟁할 때가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의료가 상품으로 치환되어 계약에 따라 사고파는 서비스로 전락한 지는 오래되었다. 이미 상품화되어 공공재인지를 따지는 게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료서비스를 하나의 상품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의료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의료의 울타리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의료는 삶의 전 과정에서 필수요소가 되었고 존엄 그리고 생명과 직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의료는 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되는 공공재라는 규정은 아주 적절하고 타당하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방, 경찰이나 소방 업무처럼 의료도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기후위기에서 비롯되는 재난도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어 강력한 의료대응이 절실한데 공공성에 기초할 때 비로소 올바른 방향 수립이 가능하다. 우리의 의료체계가 공공성 실현을 위해 적절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의료공공성 강화와 확대를 위해 무엇을 보완하고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 성찰하고 실행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의료공공성의 현실
의료가 공공성이 아주 강한 서비스임이 틀림없으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의료는 공공성을 언급하기에 매우 부끄러운 수준이다, 의료공공성 수준은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의료재정을 보면 우리나라는 경상의료비 중에서 건강보험이나 세금 등 공공지출이 부담하는 비중이 60% 안팎 정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대개 70%를 넘는다. 우리 경우 본인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걸 의미한다.
의료서비스 공급 주체의 경우 우리나라 공공병원 수는 전체 병원 수의 5% 수준, 병상으로 비교할 때도 공공병상은 10%를 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은 대부분 공공병상 비율이 70%를 넘는다. 일본과 미국이 20~30% 수준으로 낮은 편이다. 공공병상이 10%도 안된다는 것은 병상의 90% 이상이 민간영역에서 관리된다는 걸 의미한다. 철저하게 민간 주도의 의료서비스 공급체계에 의존하는 셈이다. 지금 같은 민간의료 비대화는 공공성을 소홀하게 여긴 의료정책이 초래한 결과이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병상 자체만 확대하면 되고 민간 운영이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민간 의료기관의 공공성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종교기관, 구호기관 또는 공익성이 강한 기관에서 운영한다면 나름대로 공공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으나 우리나라 민간병원은 그렇지 못하다. 개인이 개설하는 경우가 많고 법인 설립이어도 개인 또는 가족 운영의 경우가 상당하다. 이런 경우 수익성에 기반한 병원 경영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법적으로 영리병원이 없지만 사실상 의료기관들이 과도하게 상업성을 보이는 이유이다.
의료 자체에 공공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지만 민간 주도의 의료 현실에서 의료공공성을 강조하기 위해 공공의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불필요한 또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공공경찰, 공공소방이라는 용어가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공의료를 강화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도 공공병원 확충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공공병원 인프라가 취약함을 반영한다.
넓은 의미로 의료공공성 강화는 재정분야에서 공적 부담을 높이는 과제, 의료서비스 공급체계에서 공공병원을 확대 강화하는 것 그리고 민간 의료기관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 모두를 아우른다. 나아가 의료 이용 과정에서 공공성을 높이는 과제까지도 포함한다.
공공의료 취약성의 영향
공공의료가 취약하다는 것은 전체 의료시스템의 취약성을 의미한다. 민간 의료기관은 공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을 위해서도 수익성에 기반한 경영전략을 펼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진료분야는 기피하거나 소극적이게 된다. 아무리 필수분야 진료기능이어도 기대수익이 약하면 투자하지 않는다. 중소 병원이나 사립대학 병원도 마찬가지이다. 수익성이 높은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서 가능한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한다. 진료기능이 편중될 수밖에 없거니와 의료내용이 적정선을 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비보험 분야의 확대 그리고 피부·미용 분야로의 의사 쏠림 등은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소아청소년과 분야의 경우 수익은 낮고 리스크는 높아 전공의 지원이 급격히 감소하는데 병원 경영진은 이익이 적다는 이유로 공백을 메울 전문의 인력 채용을 기피한다. 남아 있는 전문의들은 과다한 업무로 소진되다가 나중에는 사직하게 되는데 결국 대학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진료기능이 붕괴하기에 이른다. 몇몇 과들도 비슷한 경로에 들어섰다. 그 피해는 환자와 보호자,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코로나 팬데믹은 신종 인수감염병으로 기후재난의 성격이 강하다. 팬데믹 과정에서 공공의료 취약성으로 인해 대응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재난 상황은 모든 의료기관이 합심하여야 하는 중대한 위기이다. 그러나 민간 의료기관은 사스, 메르스 등 이전 전염병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전염병 환자를 진료한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환자들이 기피하여 경영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민간 의료기관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전염병 대응이 근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는 이유이다. 민간 의료기관은 경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염성 질환에 투자하거나 전념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전염병 대응을 공공병원에 미루게 된다. 공공병원들은 다른 진료기능을 폐쇄하고 코로나 환자 진료만 전담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공공병원들은 팬데믹 이후 이전의 일반 진료기능이 손상된 상태로 쉽게 복구되지 않아 고전하고 있다. 팬데믹이 진행되면서 공공병원만으로 한계에 봉착하자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민간병원의 병상을 동원하게 된다. 민간병원을 움직이기 위해 막대한 재정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극단적인 공공의료 취약성은 공공성이 아닌 수익성, 즉 돈의 흐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왜곡된 의료구조의 토대가 된다. 지금의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붕괴, 재난 대응력의 부재는 모두 취약한 의료공공성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사 파업과 공공의료
문재인 정부 시절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을 시도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의사들은 공공의대에 대해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다. 민간 의료기관이 90% 이상 차지하므로 의사들은 90% 이상의 비율로 민간 의료기관에 취직하거나 아니면 개원해서 자영업을 영위한다. 공공영역에서 일하는 의사는 아주 소수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의사들의 의식은 공공성의 가치와 멀어지게 되었다. 정책을 바라볼 때는 민간의료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공공의료를 경계하거나 때로는 적대하기도 한다. 공공의료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는 의사 수 확대 얘기만 나오면 의사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만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반대로 의사단체들이 증원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 나라는 공공병원의 비율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데, 의사 수 증가로 노동강도를 낮추고 지방의 의료인력 부족을 메꿀 수 있어서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들과 비교해 의사 수가 적은데 환자들의 의료 이용은 더 많다. 이는 의사들의 노동강도가 더 세다는 걸 말한다. 그런데도 의사 수가 증가하면 경쟁자가 늘어나 수입 감소를 걱정해야 하므로 의사 수 확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의사 수가 증가한다고 공공분야에서 일한다는 보장이 없다. 공공분야 일자리 자체가 별로 없어 의사가 늘어나도 민간 의료기관에서 일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이 분야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잉 진료, 비급여 진료, 피부·미용 진료의 거품이 더 커질 거라는 우려도 있다. 공공의료 확충 보장 없이 의사 수만 확대하는 정책은 기존의 문제를 증폭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추진하면서 필수의료, 지역의료를 위한다는 명분을 제시한다. 그러나 공공의료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붕괴가 취약한 의료공공성에서 비롯된 점을 감안하면 의대 정원 확대 이전에, 적어도 동시에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제시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오히려 정부는 출범 이후 의료분야에서 공공성의 가치를 철저히 배제해왔다. 공공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민간이 효율적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반면 바이오헬스산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의사 수 증가가 필요하다고 수차례 언급한다. 여기서 의료를 산업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고 정책의 의도도 엿보인다. 의사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비대면진료를 전격적으로 확대하기도 한다. 비대면진료가 담당하는 영역은 대형병원 전공의 파업으로 발생하는 공백과는 무관하다. 그동안 의료계의 반대로 진척이 더딘 원격진료, 비대면진료를 이 기회에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이는 비대면진료를 가능케 하는 플랫폼기업, IT업계의 이익을 대변한다.
가치 지향의 의료
의술을 시행하는 행위 자체는 극히 가치중립적이다. 전쟁 중에도 다친 적군을 치료하는 게 의술 본연의 역할이다. 그러나 의료는 미래지향적인 다양한 가치를 담아낼 수 있다. 지금의 의료가 담아내지 못하는 분야, 새롭게 대두되는 영역에서 의료의 역할을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극히 가치지향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의학은 과학의 힘을 얻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젠더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이를 교정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 등 인권 피해자들은 의료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시장화된 의료는 이를 외면한다. 소수자들이 겪는 의료소외도 마찬가지이다. 고령화에 따라 통합적 돌봄의료서비스 체계 구축이 절실하지만 진척이 더디다. 공공분야에서 먼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수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민간의료에 다양한 가치 지향의 의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후위기는 건강위기이고 심각한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기온 등 극심한 기후변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환경재난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대응력이 부족한 취약 계층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기후위기의 심화로 코로나 같은 전염병 재난은 반드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복합적인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의료의 준비는 중요한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수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류의 안전을 위해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의료분야 탄소 발생 감소를 위한 투자도 필요하나 지금의 조건에서는 진척이 어렵다. 의료공공성의 토대가 미약하여 이를 추진할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치 지향의 의료는 주류 민간의료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그늘을 보듬고 다가올 재난에 적절하게 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챙겨야 하는 분야이다. 의료공공성의 강화를 통해 새로운 의료의 지평을 넓힐 여지를 확보할 수 있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건강하고 안전한 미래를 위해 의료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공성이라는 지향 아래 지금의 의료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워낙 공공성이 취약하여 웬만한 노력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공성을 담보하는 의료기관 인프라에 해당하는 공공병원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일부 비효율적이고 나태한 모습이 있더라도 이는 혁신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공공병원을 운영하는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병원 스스로 성찰이 필요하다. 시민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도 혁신을 위한 방안의 하나이다. 현재 의료를 주도하는 민간 의료기관의 공공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도 관심의 대상이다. 그동안 관심과 논의가 부족했던 분야이다. 정책도 소극적이다. 단기간에 공공병원 확충이 쉽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민간 의료기관의 공공성 강화는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의료협동조합처럼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설립하는 방식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의료재정 분야, 의료서비스 이용 분야에서도 공공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의료재정 분야에서는 공적 부담을 늘리고 개인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의료서비스 이용자들은 불필요한 의료 이용을 줄이고 대형병원 중심의 선호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의 의료기관 이용을 늘리고 나아가 이들 의료기관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시민들이 모여 시민들 자신을 위한 그리고 지역사회 공동체를 위한 의료기관을 직접 개설하여 운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후위기에 대한 체계적인 대책 수립도 필요하다. 의료공공성의 강화라는 토대 위에서 의료계 내 기후위기 심각성에 대한 인식 공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후재난, 전염병 팬데믹 등에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