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까지 높았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건강과 관련된 정보가 온갖 매체를 통해서 멀미가 날 만큼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건강은 좀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최종 목표가 된 것 같다. 전 세계 건강산업은 규모가 4조억 달러를 훌쩍 넘어가고 이른바 선진국들의 경상의료비는 GDP(국내총생산)의 10% 내외에 이른다. 만약 병소(病所)가 아니라 병의 원인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풍요의 질병, 오염의 질병이라고 해야 할 ‘전염병’들이 창궐하고 있다. 황폐할 뿐만 아니라 독(毒)을 가득 품고 있는 대지와 공기에 둘러싸여서, 양분이 없는 음식, 가짜 식품(초가공식품)을 먹고 마시고,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마음 깊은 곳에서 쓸모없는 일 또는 근본적으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활동을 밥벌이 삼아 살아가면서 아픈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악할 만한 수치도 현대 세계의 병리적 현실을 정당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나라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1차 진료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병원이 병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원성(醫原性) 질환이 3대 사망 원인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건강관리’가 대단히 수익성이 좋은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거짓 수요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고, 이제 우리는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던 출생, 노화, 죽음조차 제도화된 의료체계에 전면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정상(正常)이 무엇이고 미(美)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획일적인 기준이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상태는 모조리 질병으로, 즉 의료적 개입을 통해서 교정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기후변화는 이렇게 과부하로 불안하게 지탱되고 있는 보건시스템에 무거운 짐을 보탠다. 열사병, 탈진, 경련, 발진 같은 온열질환과 말라리아, 뎅기열, 지카열, 라임병 등 다양한 감염성 질환이 지역이나 계절에 상관없이 확산되고 있다. 대기 질이 악화하면서 천식, 폐병, 심장마비, 뇌졸중, 인지장애도 늘어났고 극단적 기상현상은 트라우마, 폭력, 자살도 유의미하게 증가시킨다. 기후불안 및 우울증도 놀랄 만큼 만연해 있다. 이상기후의 된서리를 직접 맞고 있는 필리핀, 인도 같은 나라들에서는 청(소)년 4명 가운데 3명이, 상대적으로 아직은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할 미국, 영국에서도 4명 중 1명이 기후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의료에 대한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기후위기에 진지하게 대응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의료시스템은 반드시 축소돼야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항공부문과 비교하면 갑절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의료산업은 화석연료에 대단히 무겁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약품들, 병원에서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들, 의료적 처치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거의 모든 도구가 석유를 원료로 한 것이다. 냉난방과 냉장 설비도 전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만 갈수록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진단, 검사, 수술 관련 기계장비들의 전력수요도 무시할 수 없이 크다.
고에너지, 고비용, 저효율의 의료산업 모델은 어떤 식으로든 폐기될 수밖에 없고, 자원을 덜 쓰면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의료공공성을 확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어디에서나 누구든 필수의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앞으로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원에서 실패하고 있는 상품들(의사, 약품, 기술)에 의존하는 시스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환원주의적, 기계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그대로 둔 채 공적인 개입과 비용을 늘리는 방식은 명백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왜 질병의 결과와 비용을 국가가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고 정치에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더 많은 병원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런 것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환경과 생활조건을 위해서는 왜 노력하지 않는가. 게다가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인구가 감소하는 축소시대가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사회보험제도가 언제까지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산업문명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현대 의료시스템 역시 끊임없이 확대되는 경제와 함께 기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2008년 금융붕괴 이후 세계경제는 혼란과 정체(停滯)를 반복하면서 성장시대의 수명이 다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것을 일시적 불황이라고 고집하면서 ‘장기적 비상상황’의 사회적, 생태적 맥락을 계속해서 외면한다면 재앙적인 수준의 보건위기가 닥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에 기초한 의료를 구상하기 위해서 백지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필요한 기능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이미 반세기 전부터 착실하게 노력해온 쿠바가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경제봉쇄와 에너지 수급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런 악조건 덕분에 쿠바는 적어도 의료부문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 없이 어떤 ‘선진국’보다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 쿠바 의료체계는 예방의학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서 예방의학이란 아무런 처치나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 온갖 검사들이나 퇴행성 질환의 조기 진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질병을 예방하는 일은 집단적 차원에서 병을 불러오는 환경과 사람들의 면역력을 취약하게 만드는 사회적, 심리적인 요인들을 다룰 때에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고, 건강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 즉 지구 및 공동체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능력이다. 따라서 예방의학의 주된 관심사는 이 능력을 증진하기 위해서 사회적 지원이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된다.
예방의학을 강조한다는 것은 기술 중심의 의료를 포기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기술주의 의료는 건강관리를 표준화하고 환자를 대상화, 소외시키면서 위계적이고 관료주의적 구조를 구축한다. 이 시스템의 연료는 이윤이다. 그 결과 일반의(一般醫)가 하이테크를 구사하는 전문의들에 비해서 저평가되고, 간호사 같은 보조 의료인들이나 한의사, 자연요법가 등 대안적 의료전문가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의사들의 의료독점은 강화된다. 의료기술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갈수록 소수의 특별한 요구에 복무하면서 더 많은 결핍과 불평등, 좌절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어쩌면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장기이식, 생명공학 등을 통해 본질적인 인간조건을 초월하고야 말겠다는 유아적(幼兒的)인 기술주의의 폭주 속에서 머지않아 의학이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해낼 것이라는 환상이 유포되고, 사회와 생태계의 건전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완전히 방기되는 것일지 모른다. 현대인들은 성지(聖地)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더 새로운 기술, 더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근거 없는 오해이다. 특허받은 신약도, 도대체 못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첨단 의료기술도, 따져보면 (외과적 처치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고통을 덜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치유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이다. 건강과 질병, 죽음의 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의 독점적 지위를 폐기하고,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기초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자율적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전문가와 기술에 대한 의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물론 특수한 경우에 필요한 전문가들을 교육, 훈련하는 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을 지키고 병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과 책임을 사회 구성원이 고르게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성을 강화하고, 전문가의 독점을 배제하고 보통사람들의 자율적 능력과 삶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보건분야에만 국한해서 필요한 일이 아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무사히 건너가기 위해서는 농업, 산업, 경제, 교육, 교통 등 산업문명의 전 영역에서 범죄적일 만큼 낭비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성’ 논리를 깨끗이 물리치고 저에너지 고효율의 시스템을 건설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맥락에서, 공유지를 회복하고 공동체적 문화를 복구하여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기후운동이 될 수 있다. 자율성에 기초한 협동적 네트워크야말로 에너지를 가장 적게 소비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일은 우리가 일상을 꾸려가는 구체적인 장소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성취되기 어렵다. 우리의 상상력과 감수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터전, 생활공간을 넘어선 곳에서는 스스로의 결정과 행위가 장기적으로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상관하지 않거나 내다보지 못할 수 있다. ‘공유지의 비극’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내밀하게 알고 있는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는, 건전하고 충실한 판단을 내리거나 책임 있는 행동을 끈기 있게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운동은 공허하고 쉽게 좌절될 가능성이 크다. 독일의 언어학자 우베 푀르크센은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를 ‘플라스틱 언어’라고 부른다. 그는 전문가나 기술자, 정치가, 미래학자들이 구체적인 장소와 연결될 수 없는, 실체가 불분명한 언어들을 조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대중은 혼란에 빠지고,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납작하게 뭉개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 기후변화’나 ‘6차 대멸종’ 같은 용어들은 어떨까. 그 위협적인 내용의 무게에 맞게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의료기술의 발달이 임상적, 사회적, 문화적 의인성(醫因性) 질병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기후운동이 전문화되어가는 만큼 대중은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기후운동의 전문성 역시 근본적으로 환원주의적, 기계론적, 산업적 사고방식과 훈련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악을 악으로 타도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이곳뿐이다. 생태문명은 지구가 유한한 체계라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도래할 수 있을 것 같다. 기후운동은 10년 뒤, 100년 뒤에 지구를 구하겠다는 목표를 버리고, 우리가 저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장소에서 지금 당장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산업문명의 폭력은 끝이 없어서, 더이상 망가질 산하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오늘에도 이 땅 곳곳에서 자신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나 거대자본을 상대로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을 힘겹게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난다. 지켜야 할 구체적인 장소가 있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운동, 급진적인 행위는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