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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햄블린 지음, 우동현 옮김, 《저주받은 원자》, 너머북스, 2022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위선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의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무기 트리니티 폭발 실험이 실행된 이후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2,000번이 넘는 핵실험이 있었다. 유엔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기록에 따르면, 그중 절반 이상은 미국에 의해 실시되었다. 1945년부터 1992년까지 지상과 지하, 바다, 대기 중에서 알려진 실험만 공식적으로 1,032건이다. 뒤이어 소련 715건, 프랑스 210건, 영국과 중국이 각각 45건의 핵실험을 진행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 핵실험 국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핵무기는 지상의 거대한 탑과 바다 위의 대형 선박, 열기구, 지표면, 수중과 지하 수백 미터 아래, 대기권에 발사된 로켓 등 다양한 장소에서 폭발했다. 이 가운데 25%인 500개 이상의 폭탄이 대기권에서 폭발했다. 1954년 마셜제도 비키니환초에서 실행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과 일본 어부들의 사망을 계기로 1963년 대기 중 핵실험을 금지하는 협약이 처음으로 마련되었지만, 프랑스와 중국은 1980년에 이르기까지도 이를 지속했다. 이후 많은 핵실험은 지하에서 이루어졌는데 어떤 요인으로든 방사능 낙진이 지표면으로 흘러나오게 되었을 때 그것은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디언들의 정착지였던 네바다의 사막,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소련과 중국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살아가는 외딴 땅 세미팔라틴스크와 신장위구르자치구 롭누르 그리고 태평양의 많은 섬들이 실험장으로 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추진된 미국의 맨해튼프로젝트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괴멸적 파괴를 낳은 이후, 핵무기 보유를 위한 각국의 강력한 열망은 냉전이 시작된 세계질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유엔 상임이사국 5개 나라가 1만여 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핵무기 제조와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 미국은 무엇을 했는가? 《저주받은 원자―미국의 핵기술 도박이 만들어낸 현재진행형 지구사》는 미국이 자국의 핵무기 개발을 고도화하는 한편(책에서 이 부분은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뒤로는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핵무기 제조를 향한 열망을 자신들의 감시하에 통제하고자 했던 핵 외교 전략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역사서다. 책의 제목 ‘저주받은 원자’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 만큼, 저자는 그 과정에서 작동한 미국의 인종주의적이며 식민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 태도가 빚어낸 모순을 보여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국의 핵기술 비밀주의는 국제정치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다. 핵기술 독점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은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으며, 영국, 프랑스, 소련은 각기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한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옛 식민지들의 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미국과 영국 등이 가지고 있던 전략광물 통제권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정부는 방사성동위원소를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 자산으로 활용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미국 내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주 등 콜로라도강을 따라 형성된 고원이 우라늄의 보고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 미국은 우라늄, 토륨, 녹주석 등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을 위해 필요한 전략광물을 확보하기 위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인도 등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미국이 취한 전략의 대부분은 상대 국가가 관심 있어 하는 핵물리학 분야보다는 농업이나 의학 등 방사성동위원소를 활용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지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은 저개발 국가들에게 방사성동위원소에 관한 과학적 전문성이나 장비들이 ‘미래 발전의 열쇠’(식량, 보건, 에너지 문제 해결)라고 설파함으로써 이들 국가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방사성물질을 다루는 기술을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했다. 미국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 개념을 통해 방사성동위원소 기술이 세계의 고통, 특히 전쟁과 재난으로 폐허가 된 가난한 국가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자이자 메시아가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미국과 소련 간에 격화된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한 진정한 감축 제안 없이 “풍요라는 허구에 의지해 상상한” 일련의 원자력기술(특히, 농업과 의학)이 가져올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미국중앙정보국(CIA)과 ‘미국의 목소리(VOA)’ 방송은 미국의 원자력이 ‘평화를 위한 도덕적 십자군’이라는 개념을 선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촉수를 뻗쳤다. 그리고 여기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프레데릭 졸리오-퀴리와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해 버트런트 러셀, 존 듀이와 같은 친서방적 지식인과 예술인들로 구성된 회의를 지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핵물리학자 한스 티링, 유전학자 허먼 밀러, 미국원자력위원회 위원장 데이비드 릴리엔솔 등이 회의의 강연자로 나섰다. 릴리엔솔은 원자력은 창조주의 비밀이며, 그것을 푼 사람은 신의 영광에 복무해야 한다는 믿음과 헌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이야기하는 한편에서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으며 핵융합폭탄 개발로 이것이 현실화되었다.
반공주의, 인종주의, 신식민주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냉전시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으로 폐허가 된 일본은 이 개념을 가장 강력하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국가 중 하나였다. 일본 의회는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연설 직후인 1954년 원자력 예산을 편성했는데, 당시 젊은 정치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는 일본학술회의의 젊은 과학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예산 편성에 관한 의회 승인을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두 번의 원폭 투하와 비키니환초에서의 수폭 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낙진으로 직접 피해를 입은 일본이 어떻게 가장 적극적인 원자력발전 수용 국가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은 그러한 이유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원자력기술의 홍보 장소가 되었다. 미국 CIA는 ‘KMCASHIR’라는 작전명의 심리전을 통해 일본에 원자력을 수출하려는 전략을 수립했으며, 일본 현대 미디어 역사의 주요 인물이자 선전 전문가였던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郎)가 여기에 협력했다. 미국의 원자력업계와 일본 정치인, 미디어는 피폭의 경험이 있는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식민지 해방 이후 동족 간의 참혹한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도 원자력기술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가 펼쳐졌다. ‘제3의 태양’, ‘꿈의 에너지’ 라는 문구와 함께 원자력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이 가장 핵심적으로 확보해야 할 선진 기술로 홍보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원자력이 발전용으로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안보적 지형 속에서 핵무기 개발이라는 잠재적인 군사적 가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미국의 원자력기술 이전 절차를 빠르게 승인했다.
원자력기술은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 독립국 지도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자원으로 여겨졌다. 이곳은 우라늄 광산의 보고이자 백인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령 콩고, 가나, 알제리 등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들은 우라늄 광산산업을 둘러싸고 구 식민제국과 미국의 이익 사이에서 위험한 정치적 줄타기를 해야 했다. 미국은 아프리카 독립국 건설과정에서 원자력발전을 통한 이들의 정치적 야망이 반미주의, 친소비에트, 반식민주의, 범아프리카주의, 미국 내의 흑인민권운동 등과 연계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은크루마라는 걸출한 정치지도자를 따라 반인종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 백인이 통제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독자적 평화적 핵개발 계획을 표방했던 가나는 강력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은크루마는 《신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1965)라는 저서를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표면상으로는 독립된 주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체계에 따라 외부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며 미국의 CIA, 평화봉사단, 미국 공보처가 신생 아프리카 독립국을 조종하고 약화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 열강들의 분할점령 전술에 대항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단합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친사회주의 성향의 정치행보를 지속하며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 등을 도입하고자 협의해나갔다. 하지만 1966년 2월 은크루마가 중국과 북베트남을 방문한 사이 가나에서는 친미주의 군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가나의 반식민주의적 평화 핵개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기 미국 중심의 세계 핵 정치질서를 통제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결성되었다. 초대 사무총장으로는 미국 공화당 의원인 스털링 콜이 임명되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콜이 외국어도 할 줄 모르고, 외교 경험도 없으며, 국제기구 근무 경력도 없지만 오랫동안 반공주의 이념만은 확고하게 지킨 백인 남성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아이젠하워는 그가 IAEA에 가입한 아프리카•아시아 국가들이 이 국제기구에 반식민주의나 반인종주의적 의제를 들고 오는 것을 막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인물이라고 보았다. 콜과 이후의 역대 IAEA 사무총장들은 원자력으로 가난한 나라도 자연의 제약을 돌파할 수 있다는 비전을 설파하며, IAEA는 과학자와 기술관료들로 이루어져 있어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지식만을 다룬다는 인상을 주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IAEA는 초기 이사국 구성에서 대륙별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는데 여기에도 미국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되었다. 초기 이사국에는 미국을 제외하고 구미 주요 강대국인 프랑스, 스웨덴, 영국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 국가로는 친미주의적이거나 적어도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은 국가들이 포함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가나를 제외한 대신 인종분리주의 정책을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포함되었다. 아시아에서는 풍부한 방사성물질을 추출할 수 있는 천연 광산을 보유한 채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프로그램을 추진한 인도를 배제하고, 미국의 정책에 순응적인 일본을 포함시켰다. 원자력 개발에서 ‘유색인’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핵 질서를 수용했을 때만 핵기술 이전의 수혜를 입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
IAEA는 1957년 결성 초기부터 핵무기 개발계획을 가진 선진국으로부터 대규모의 재정지원을 받아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원자력기술의 환상을 설파하는 데 힘썼다. 이들은 원자력이 세계 여러 나라가 경험하는 가난과 질병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과장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식량기구(FAO)의 우려하는 목소리를 밀어냈다. IAEA는 원자력의 환경적•공중보건적 측면에서의 문제점을 우려하는 WHO 관료들의 의견을 무시했으며, 원자력기술을 이용한 식량•곡물 개량과 해충구제, 변이식물 육종프로젝트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FAO의 비판에 귀를 닫았다. FAO와 WHO는 IAEA와 방사성 수질오염, 폐기물, 방사선 방호에 관한 공중보건과 노동기준 등 여러 쟁점에서 충돌했는데, IAEA는 끈질기게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해나갔다.
물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미국의 기조는 다방면에서 위협받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도자들은 핵기술을 방사능 치료나 종자 개량 같은 시원찮은 용도로만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미국이 민간 원자로 개발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1950년대 초반, 영국과 소련은 발전용 원자로 개발을 통해 제3세계와 아시아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했으며,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활용이 현실화하는 데에는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64년 10월 중국의 핵실험 성공은 IAEA가 ‘평화를 위한 원자력’ 홍보기구에서 전 세계 핵무기 개발 감시기구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권 핵무기체제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영국, 프랑스 등 서구 핵무기 보유국 이외에도 몇개 소수 국가들(예를 들어 인도, 이스라엘, 일본 등)의 핵을 묵인하는 것이 비용을 덜 들이고 억지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IAEA의 핵기술 감시체계와 NPT의 핵 비확산 체제의 자기모순적인 운용의 기저에 놓인 이중사고의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원자력 개발을 돕는 것으로 한정되었으며, 세계를 핵무기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고 개발도상국의 원자로 취득 기술에 불필요하고 지나치게 간섭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이러한 모순된 체제 속에서 인도는 1974년 핵무기 개발프로젝트 ‘미소 짓는 부처’를 성공시켰다. 핵실험 직후 미국을 방문했던 케왈 싱 당시 인도 외무장관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로부터 인도의 핵실험은 선진국의 핵실험과 “지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서방국가의 핵무기는 평화적 억지와 통제가 가능하지만, 유색인종의 핵무기는 통제되기 어렵다는 인종차별주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싱은 “부유한 국가들이 파괴적 목적으로 핵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괜찮고 가난한 나라가 이를 모색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가”라고 물으며 자신들의 핵실험이 “평화적 핵폭발”이었다고 항변했다. 실로 세계 핵 정치에서 ‘평화’는 자국의 파괴적 핵무기 제조 행위를 정당화하는 외피에 불과했다.
그리고 반인도적인 범죄의 전개
20세기 핵 역사는 냉전체제하의 국가와 군부, 과학기술자, 국제기구 간의 경쟁 속에서 비밀과 협상, 감시, 배반, 음모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냉전시기 미국이 수행한 인도주의적 민간 핵기술 이전은 전략광물 확보를 위한 노력과 병행되었다. 또한, 방사성동위원소를 활용한 과학기술 이전 약속은 아시아와 남미 여러 지역에서 확산하는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이 대거 망명하였던 아르헨티나는 특히 모나자이트와 같은 방사성광물의 주요한 산지였다. 미국은 이곳에서 반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기를 바랐으며, 이를 위해 이들이 나치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에 눈감았다. 또한, 미국은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소유한 풍부한 전략광물을 확보하기 위해 이 지역의 식민주의적 착취를 용인했다. 미국은 각국에서 얻은 전략광물에 대한 대가로 이들 국가에 자국의 무기고에 저장 중인 핵폐기물을 농업과 의학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방사성동위원소’라는 이름으로 제공하였다. 미국 땅에서도 우라늄을 채굴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 이와 같은 외교방침은 많이 바뀌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다른 나라들, 특히 소련이 이들 국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았다.
한편, 미래 번영과 꿈의 에너지로 홍보하며 원자력기술을 외교적 협상의 주요 자산으로 활용한 미국은 놀랍게도 중동에서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미국은 석유 감산과 가격 인상을 주도한 OPEC(석유수출국기구) 국가의 균열을 획책했으며, 이란 이슬람혁명 이전까지 핵기술 이전을 미끼로 이란이 다른 아랍국가들로부터 멀어지도록 애를 썼다. 미국은 에너지원으로서 원자력의 가능성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다른 국가들이 앞서 나가기 전까지는 그 현실화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속증식로사업 등 새로운 원자력 기반시설이 가져올 미래를 선전하며 이들 건설프로그램에 여러 나라를 참여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는 석유 중심의 세계 천연자원 통제권을 되찾고 변화하는 지정학적 질서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의 일부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방사성폐기물을 방사성동위원소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 인도주의 핵기술 이전이라는 미국의 외교 협상 전략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저주받은 원자》는 이처럼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미명하에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서 펼쳐진 미국의 핵 외교의 이면을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핵무기 개발 이후 이에 대한 독점적 지식과 기술을 통해 세계질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미국이 펼친 ‘더러운’ 외교와 장밋빛 전망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지만,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오히려 그 역사의 굴레에 짓밟힌 이들이다. 사실 미국의 인도주의 핵기술 이전 문제의 심각성은 인도의 핵무기 개발 성공이 아니라 우라늄 채굴지와 핵폐기물 저장고 등에서 더욱 비참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우라늄은 대부분 나바호 지역 인디언으로 널리 알려진 디네인들이 살아가는 땅과 그 주변에 존재했다. 미국연방정부는 이들의 노동을 동원해 채광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했다. 인디언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우라늄 채굴에 종사했다. 1948년 시작된 인디언들의 우라늄 채굴은 이후 10년 동안 나바호의 주요 광산에서 지속됐다. 이후 50여 년이 지나면서 당시 채굴노동을 했던 인디언들 다수가 진폐증, 호흡기 질환, 결핵, 피폭에 의한 폐암 등의 질환을 앓았다. 당시 이들에게는 피폭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는 2차대전 당시 핵무기 제조를 위해 구성된 맨해튼프로젝트의 여러 시설(네바다의 로스앨러모스, 워싱턴의 핸퍼드 등)에서 종사하던 백인에 대해 나름의 피폭기준이 적용되었던 것과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당시 미국의 과학자들은 라돈과 라돈 동위원소인 자손이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나 이를 디네인들에게 알리거나 방호복을 제공하지 않았다. 당시 디네인들은 영어를 구사하지도 못했다.
더욱 잔혹한 사실은 과학자들은 이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에게 어떠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0년 한 백인 학자는 우라늄 채굴에 종사하는 디네인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의학적 현지조사를 진행했는데, 광부들은 여기에서 실험실의 마루타처럼 처리되었다. 미국연방정부와 과학자 집단의 디네인들에 대한 이러한 처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에서 생존한 피폭자들에 대한 방사성 영향 조사에서도 반복되었다. 원폭 투하 직후 미군의 시민방어계획 수립의 일환으로 조직된 원자폭탄상해조사위원회(ABCC)는 원폭 생존자들에 대한 치료는 전혀 제공하지 않은 채 피폭으로 인해 이들의 몸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만을 관찰했다. 생존자들은 벌거벗겨진 채 차가운 실험실 한복판에 세워졌다. 요컨대 우라늄 채굴에 동원된 인디언들에 대한 처우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에 대한 미국의 이 같은 행위는, 식민지와 식민지인들에 대한 수탈을 토대로 이루어진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정치경제의 다른 한 버전이다.
비키니환초에서는 또다른 형태의 반인도주의적 수탈이 자행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태평양의 많은 섬 가운데 하나였던 비키니환초는 종전과 함께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미 해군은 비키니의 원주민을 이주시키고 이곳을 핵무기 실험장으로 활용했다. 일시적으로 소개(疏開)하는 것으로 여겨 해군에 협조했던 비키니인들 다수는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반복되는 핵실험으로 인해 방출된 방사성물질이 지상과 바다에 쌓여갈수록 원자에 대한 찬양과 홍보는 더욱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1946년 미국에서 출간된 만화책 〈아토맨〉은 방사선으로 더욱 강력한 힘, 초인적 속도, 비행능력을 얻고 식물들은 신비한 힘을 얻는 것처럼 그려졌다. 미국 농무부와 비료회사, 원자력업계는 방사성동위원소에 쪼여 더 생산성이 높은 씨앗을 육종했다거나 새로운 생장패턴을 갖는 식물을 창조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는 동안 비키니환초 주변에서 피폭된 식물에서 나타나는 유전적 변이와 기형은 외면했다.
IAEA가 핵무기 개발과정에서 다량 발생한 방사성폐기물을 ‘방사성동위원소 상품’으로 제3세계에 유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더욱 경악할 만하다. 방사선을 쪼인 식품을 ‘멸균식품’ 혹은 ‘살균식품’으로 홍보하거나, 유전적 변이를 통해 식량용 동식물을 개량시키거나 해충을 박멸시킬 수 있다고 선전하는 저개발 국가에서의 농업프로그램은 계속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이 현명하지 못하고 미숙하기까지 하며 공중보건에 가져올 위험을 우려한 IAEA 내부의 실로(R.A. Silow) 보고서나 WHO의 비판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실로의 보고서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과정은, 방사선 방호기준의 주요 데이터를 제공한 미국의 원폭상해조사위원회가 저선량 방사선 피폭의 건강위험을 연구해야 한다는 내부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과정과 유사하다. 비판하는 이들의 자리는 없어지고 그들의 우려를 증명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는 수행하지 않았다.
‘느리게 진행되는 핵전쟁’ 속에서
1979년 미국에서 발생한 스리마일 원전사고, 1986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 일련의 방사성 재난은 ‘평화의 원자’라는 이름의 거대한 허구의 탑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IAEA는 매번 그것이 세계 원자력 발전의 역사를 가로막을 장애가 되지 못하도록 발 빠르게 대처했다. IAEA 기술관료들은 사고의 영향이 한정적이라는 보고서를 신속하게 작성했으며,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을 내세워 이를 교육하고 선전했다. 체르노빌 사고를 선진적이지 못한 소련의 발전용 원자로 기술의 문제이자 사회주의적 관리체계의 실패로 한정지으려 했다. 놀라울 것도 없이 이러한 기조는 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3기의 원자로가 폭발한 이후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IAEA는 원자력발전 자체의 문제가 아닌 ‘상정 외’의 거대한 쓰나미에 그 원인을 돌린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는 동안 지역주민들, 지역의 숲과 나무, 땅, 바다는 방사성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영구적으로 떠안았다.
‘글로벌 히바쿠샤(피폭자) 프로젝트’의 공동 창립자로서 지난 10여 년간 20여 개 나라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지역사회에 대한 현장연구를 수행한 히로시마 시립대학교 히로시마평화연구소 로버트 제이콥스 교수는 이들 지역에서 사람들이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질병과 조기 사망, 불확실한 위험에 대한 불안, 식량 공급원과 생태계 오염으로 인한 강제 이주, 피난으로 인한 고향과 사회적 관계망의 상실, 전통과의 단절로 인한 고립감이나 급격한 삶의 방식 변경, 새로운 지역에서의 적응 실패 등 복합적인 정치경제, 사회문화, 심리, 신체와 건강상의 어려움과 장애를 생애 전체에 걸쳐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경험이 오염된 땅과 바다, 지하수, 숲과 나무 등을 통해 세대에 걸쳐 지속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의 관점에서 《저주받은 원자》 속 미국의 수탈주의 핵 역사는 사실상 ‘제한적인 핵전쟁’ 혹은 ‘느리게 진행되는 핵전쟁’(Robert A. Jacobs, Nuclear Bodies: The Global Hibakusha, Yale University Press, 2022.)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역사는 사람들에 가해진 피해를 은폐하려는 거대한 위선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20세기 생태학의 중요한 인문학적 상상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루이스 멈퍼드는 근대 과학혁명에 의해 발명된 과학기술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후 세계와 결합된 순수한 종교적 개념이었던 무한대, 영원, 불멸 등의 개념이 인간의 세속적인 현실 속 시공간에서 작동할 수 있게 된 점이라고 말한다. 20세기 핵 역사는 원자력이 바로 그와 같은 상상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만들어지고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저개발 국가들이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자 서구에 뒤처진 나라라는 전제하에서 원자력이 이들 국가의 영화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즉 미래의 시공간을 확장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 선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전이 수용된 배경에는 사실상 대량살상무기로서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군사적인 욕망, 그리고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는 꿈의 무한에너지를 창출하는 고도화된 첨단 과학기술을 소유하겠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플루서멀(pluthermal), 파이로프로세싱, 핵융합 등에 많은 국가가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은 이렇듯 무한과 영원에 대한 세속적인 열망을 과학기술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 떠받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