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의 아픔을 갖고 있는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투기하면서 핵폐기물 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는 사실이나, 유랑민의 비애와 인종학살의 불의의 무게를 지고 견뎌온 이스라엘 민족이 오늘날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부조리이다. 식민지, 분단의 상흔을 깊게 안고서 화염만 멈추었을 뿐이지 70년 넘게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에서 남북이 모두 끝없는 무기개발에 목을 매고, 다른 민족의 피눈물을 대가로 얻은 무기수출 특수에 미소 짓고 있는 현실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현대세계의 전쟁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이유로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과밀한 도시, 빈곤의 심화, 상품가격 폭등, 임금 저하, 지역 서비스체계의 붕괴 그리고 이상기후, 야생지 파괴, 표토 유실, 지하수면 하락, 생물다양성 축소의 난국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전쟁의 해’(박노자)는 쉽게 저물 것 같지 않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화도 어떻게 보면 경제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프로젝트의 큰 부분은 팔레스타인의 농업과 어업의 파괴, 즉 토양과 수계, 생물다양성을 파괴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급능력을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유린하는 것이었다. 2023년 10월 이전에도 가자지구에서 농지의 35%는 접근제한구역이었고 11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자신의 땅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2014년 이후로는 수확철이 되면 이스라엘군은 공중에서 제초제(글리포세이트 포함)를 살포해서 농작물과 초목을 마구잡이로 고사시키고 있다. 어업은 원래 가자지역의 문화와 경제에 깊이 연결돼 있던 일이었지만 현재는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한 직업이다. 땅이 망가지면서 이 지역 물은 90% 이상이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1982년부터 가자지구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스라엘(국영기업 메코롯)이 공급하는 물에 의존하고 있다. 농경지가 90%에 이르렀던 서안지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서안의 80% 이상이 이스라엘군 관할지로 편입되었고, 무섭게 늘어나는 유대인 (불법) 정착촌과 함께 분리장벽이 건설되어 땅을 조각조각 구획하고 수많은 검문소가 촘촘하게 설치되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자신의 밭에 가기 위해서 한나절씩 줄을 서서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농사를 짓다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서안지역에서도 물 부족은 심각한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우물을 팔 수도 없고 빗물을 받아 쓰는 일조차 난폭하게 제지당하고 있다. 서울과 같은 기생적인 대도시라면 모를까, 가자지구처럼 농토도 있고 숲도 있고 강도 있는 365제곱킬로미터의 땅에서 단 며칠 동안 외부로부터 연료(전기), 식품, 물 반입이 중단되었다고 ‘인도주의적 참사’까지 일어나는 사정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가자 주민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 ‘봉쇄’하의 가자에서 어쩌면 평생을 두려움, 수치심, 불안 속에서 지내왔을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은 어떨까. 이들은 군사공격과 인간적, 종교적 모욕을 일상적으로 견디면서, 부모와 친지들이 생업활동조차 위협 속에서 전쟁하듯 치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라난 세대이다.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신들의 땅과 문화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것을 보면서 절망과 증오 이외에 어떤 감정을 키울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아래에서 가자지구는 ‘지붕 없는 감옥’, ‘세계 최대의 강제수용소’라고 일컬어지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수인(囚人)이라고 부를 때에는 단지 이 지역이 이스라엘 병력에 의해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는 물리적 상황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치와 자급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적대적 타인에게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든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인종청소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이스라엘정부에 군사공격의 빌미만 준 것처럼 보이는 하마스의 무력행위는 전문가들의 눈에는 ‘비합리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게토 반란’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고위관료들도 이전부터 경고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인권과 자치권을 회복하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적, 법적 노력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냉소와 경멸로 일관하고 있고 국제사회는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상황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가자지구의 합법적 통치세력이었다. 저항하는 ‘테러리스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토벌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식민정책 속에서 ‘하마스’ 전사들이 끊임없이 양성되고 있다.
진보세력들은 이스라엘이 ‘20세기의 유물’인 식민주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2차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들 중에서 강대국에 종속되지 않고 경제와 정치를 자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허울뿐인 ‘민주정부’ 아래에서, 계속해서 선진국들의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나가면서 만성적인 빈곤과 무질서, 부채의 수렁에 빠져 있는 나라가 대다수이다. 노골적인 군사적 침략이라는 모습을 한 식민주의시대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구조조정과 조건부 차관, 불평등한 무역협정이 식민주의의 도구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선진국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난민문제도 따지고 보면 (테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실은 바로 그들 자신, 북반구 주민들의 (제국주의적) 삶의 방식이 초래한 수많은 비극 중의 하나인 것이다. 고 권정생 선생은 이라크전쟁 때 우리가 파병을 안할 수 있으려면 자동차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지 우리 경제가 석유에 깊이 중독돼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은 강대국들의 부(富)가 약소민족들의 피눈물과, 자연의 파괴와 약탈로써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라는 말 속에는, 식민지-제국주의-군국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석유문명, 우리 삶의 방식과 문화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서 평화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근원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근년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그린뉴딜’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름이 말해주고 있듯이 이것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폈던 뉴딜정책을 본따서 정부 주도의 공공정책을 펴서 기후변화와 경기침체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계획이다. 핵심 내용은 재생에너지를 대규모로 도입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성장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게 성공한다면 정말 문제이다. 글로벌 노동기계의 수명을 연장해서 생산량, 생산성, 고용수준을 증가시키는 것은 생태적 재앙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고자 한다면 지금 우리가 결단코 피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구상은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도 한데, 이 기술낙관론자들은 신기술(재생에너지 등)에 무겁게 의지하여 60~70년 전의 케인스식 정책, 즉 경제성장에 기초한 광범위한 번영으로 회귀한다는 불가능한 꿈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린뉴딜은 (물론 조금 인간적인 모습이 되도록 손은 보겠지만)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조직적으로 착취하는 산업문명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엔진의 동력을 석유에서 태양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류사회가 겪고 있는 환란의 정체는 경제위기가 아니라 시스템의 위기이다. 2008년 세계적 금융붕괴는 배타적 탐욕과 약자에 대한 착취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근대적 삶의 방식이 수명을 다했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 이와 같은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서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서 세계의 근본적 재생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야심 찬 기획도 애초에 가망이 없다. 그린뉴딜은 과학의 눈으로 봐도 위험한 발상이지만 지정학적 시각으로 본다면 더욱 많은 폭력, 식민주의와 군국주의를 불러올 공산이 대단히 크다. 그러니까 화석연료(온실가스)보다 앞서서 우리가 미련 없이 청산해야 할 것은 자연과 인간, 농촌과 도시, 남반구와 북반구, 미래세대와 현세대 사이의 식민주의-제국주의적 관계인 것이다.
산업자본주의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길, 지난 300년 동안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구해온 ‘발전’ 방식은 착취와 폭력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 식민주의의 일차적인 폭력과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등장한 저항과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항구적인 전시(戰時)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다. 세계 어디에서든 최신의 첨단 기술은 군비산업과 관련된 것이고, 국가 차원에서도 민간에서도 안보(경찰)사업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지금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전쟁의 서사(敍事)이다. 전쟁의 논리, 전쟁의 사고(思考), 전쟁의 문화가 현대인의 의식과 무의식, 심리 속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우선 적(敵)을 찾아낸다. 병충해로 작물이 상하면 농약으로 해충(害蟲)을 섬멸하고, 잡초가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제초제를 살포해서 말려 죽인다. 독감이 돌면 항생제로 바이러스를 박멸해야 할 것이다. 테러(전쟁)는 당연히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면 끝날 문제이다. 그리고 온실가스를 적으로 규정했을 때 기후위기도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축소될 수 있다. 전쟁의 논리와 전술이 팽배한 세계에서 문제(전쟁)는 끝없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식별해낸 적들(해충, 잡초, 바이러스, 테러리스트, 온실가스)은 악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대증요법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병은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 많은 자원을 사용하고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면서 갈수록 극단적인 방법―독성이 치명적으로 강한 화학약품, 군비 증강, 핵무기, 첨단 기술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락을 향한 질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쟁(폭력)의 논리와 문화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폭력의 논리와 정신구조를 가진 사회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할까. 근본적인 차이는 현실을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손쉬운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데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진정한 원인, 즉 생태적 질서가 교란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 해충이나 잡초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고마운 지표가 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오히려 농작물이 풀과 벌레들의 삶터를 공격했던 것이다. 새로 개간된 밭이 (이스라엘 정착촌처럼) 침범자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공생의 길을 제시해야 할 책임은 우리 쪽에 있다. 비폭력의 문화 속에서는 지구온난화도 결국 자연과 절연돼온 우리 삶의 방식이 초래한 증상의 하나라는 사실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무조건 물리쳐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면서 떨쳐내려고 허망한 노력을 기울여왔던 숱한 문제들―난민, 테러리스트, 후쿠시마 오염수, 핵폐기물,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불안정, 파시즘의 부활, 부채와 빈곤, 쇠약해진 인간정신 등이 모두 하나의 뿌리, 산업문명에 불가분하게 내재되어 있는 현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경제학자들이 ‘외부비용’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불러온 것으로, 300년 동안 인류가 한껏 전가하고 외면해온 덕분에 지금 태산처럼 쌓여 있는 빚더미이다. 현세대가 미래세대에, 선진국들이 제3세계에, 도시가 농촌에 반드시 갚아야 할 부채이다. 하루빨리 상환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미래는 없다.
2023년 8월 30일 에콰도르는 국민투표를 통해 야수니 일부 지역(43구역)에서 석유 채굴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야수니국립공원은 생물다양성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지역으로, 실은 2007년에도 이곳의 개발을 자제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당시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이 지역에 매장된 8억 배럴의 석유를 지하에 그대로 두는 대신에, 그 석유를 수출했을 때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수익금의 절반인 36억 달러를 전 세계가 기금으로 출연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생태계와 토착민을 보호하고 기후변화를 경감하는 일은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모집된 기금액은 1,300만 달러에 그쳤고 결국 2013년에 야수니 보전계획은 중단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기대만큼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은 왜일까. 어쩌면 현대인들이 거의 모두 본질적으로 실향민, 즉 땅에서 뿌리가 뽑힌 유랑민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속에 지키고 싶은 장소도, 기억도 없는 난민들로 구성된 세계에서는 땅과 강, 바다조차도 할퀴고 착취되어도 좋은 ‘자원’으로 격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예를 들어서,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만, 그러나 지구 저편에 있는 숲이 벌목될 때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감정은 기억(직접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 비슷한 울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서,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온 뒷동산의 은행나무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감수성의 한계를 가진 인간은 자신이 친숙하게 알고 있는 장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유추하여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세계의 도시화율이 55%라는 사실은(2050년이 되면 70%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전 세계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더이상 어떤 장소에도 귀속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실에 경제논리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 더해지면, 망실되는 목숨붙이들이 얼마가 되든지 개발의 가차 없는 행군을 막아설 장애물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현재 정부수입의 3분의 1이 석유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에콰도르 국민 60 %가 개발보다 보존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장소를 내밀하게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관찰자로 머물러서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적극적으로 아끼고 보살피고, 스스로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일이며, 무엇이 정말 필요한 일인지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 깃들어 있는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에서 노을공원시민모임 사람들이 지난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해온 작업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난지도는 1993년까지 높이 100m에 이르는 2개의 쓰레기 산이었다. 지금은 162개 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이 되었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거대도시에서 멸종위기종 맹꽁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 작은 기적은 1만 그루 나무를 심어서 9,999그루를 죽이는 것과 같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실의에 빠지거나 꾀를 부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씨앗부터 키워서 숲’을 만들어온 3만 6,258명의 시민들과, 셀 수 없이 많은 고라니, 너구리, 다람쥐, 딱따구리, 참새, 달팽이, 지렁이, 개미 들과, 해와 바람과 구름이 협력해서 이루어낸 일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난지도 공원의 운명이 이른바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졌더라도 이런 결실을 볼 수 있었을까. 짐작건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지식에 편협하게 의지하면서, 천지자연의 힘이라는 변수를 믿지도 않고 헤아릴 수도 없는 전문가들로서는 쓰레기 더미 위로 얇게 덮여 있는 흙을 뚫고 나오는 유독가스와 침출수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마도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기술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 사회도 똑같이 가망이 없어 보인다. 거의 모든 영역이 돈의 논리에 포박되어 있고, 국회의사당은 협잡꾼으로 가득 차 있고, 지금껏 묵묵히 자본과 산업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온 농촌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만과 절망, 기득권층을 향한 적개심,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른 데 대한 분노와 회한,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회에 대한 비탄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비관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 시스템이 그런대로 아직도 기능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을 만들어낸 정신구조와 그것을 지배하고 운영하는 이들의 무능력과 도덕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일부에 여전히 고집스럽게 주류에서 이탈해서 반란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기적은 뛰어난 사람, 머리 좋은 엘리트들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겸손한 태도로 우직하게 해나가고 있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전문가들이 기후위기의 최악의 사태를 모면하게 해줄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는 골든타임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에 너무 열중하지 말자.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우리가 옳은 길에 들어서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노을공원시민모임 사람들이 보여준 긴 호흡과 낙관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