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명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망가져버린 지구 물질대사 사이클의 한쪽에서는 물, 표토, 광물, 생물 등 기초적 자원들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처리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더 빠르게 쌓여가고 있다. 산업문명은 광합성의 소중한 원료인 이산화탄소도 온난화를 초래하는 흉기로, 관리돼야 할 쓰레기로 변질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방사능은 그중에서도 가장 처치 곤란한 쓰레기이다. 문제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핵폐기물이 원자력발전의 주요 생산물이라는 점이다(전기는 일시적인 부산물이다). 핵무기가 사용되고 핵실험이 지속되고 원전이 가동되는 한, 즉 산업체제가 존속되는 한 생물권에 치명적인 방사능 쓰레기는 끝없이 쌓여간다. 1946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구소련(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일본, 한국이 핵폐기물을 해양에 투기한 것은 아마도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핵폐기물을 바다에 ‘투기’하는 일이 국제적으로 금지됐지만 바다를 궁극적인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산업과 국가의 관성은 흔들림이 없다. 고체, 액체 핵폐기물을 드럼통에 담아 바다에 던져 넣는 일은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해저에 거대한 파이프를 건설하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방류’하는 일은 여전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방사능뿐인가. 태평양에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섬을 이루고, 매년 여름 멕시코만에는 2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데드존이 형성된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일어나는 원유 유출사고에 더해, 국제 선박들의 통상적인 항해 과정에서도 연료석유 찌꺼기 오염수가 (불법적으로) 엄청나게 방출되고 있다(bilge dumping). 물론 관행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행위를 정당화하는 요건이 될 수 없다.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원전에서도 삼중수소가 배출된다는 사실은,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해서는 안된다는 결정적 근거가 돼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모두의 바다에 온갖 오염물질이 이미 가공할 만큼 축적되어 있다는 비극적 현실을 두고, 더이상 어떤 오염원도 바다로 유입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근년에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는 농업용수와 식수에서 환경청(EPA) 기준보다 10배 높은 농도로 우라늄이 검출되었는데, 토양에 질산염(잔류 농약 등으로 인한)이 축적된 결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오염에 오염과 오염을 더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오염을 희석해서 느린 속도로 배출한다는 것은 그럴 때에 자연이 오염물질을 완전히 분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될 때의 논리이다. 반감기가 29년(스트론튬-90), 5,730년(탄소-14), 1,570만 년(요오드-129)에 이르는 방사성핵종의 경우에는 전혀 무의미한 일이 된다. 결국 터무니없는 위험을 또다시 ‘경제성’ 때문에 감내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핵산업이나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전문가들은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후쿠시마 오염수를 처리할 다른 방법들이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경제성이라는 주문(呪文) 앞에서는 어떤 논리도, 어떤 가치도 힘을 잃는 것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산업시대는 ‘경제를 위해서’라는 주술 아래에서 독(毒)을 만들어서 먹고 마시고, 유포해온 세월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환경기준이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산업적 혹은 정치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인간, 동식물, 미생물, 땅, 강과 바다, 대기와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가 독살당해왔다.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이 제물(祭物)로 필요한 것일까. 산업오염으로 인해 소아암 환자가 단 한 명 발생한다고 해도 너무 많다는 인간의 감각을, 우리는 언제부터 이상주의라고 조롱해온 것일까. 오래된 시(詩)들과 생물학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목숨붙이들이 모두 바다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어머니 바다를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원초적 정의감을 표현하고 있는 해녀와 어부들의 절규 앞에서, 산업과 행정기관은 어획량이며 매상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오늘날 ‘민주국가’ 행정부의 정치적 의지라는 것은 글로벌 자본의 욕망과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국민국가의 대의(代議)기능은 성장경제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민간기업들에 의한 사실상의 국가권력 탈취와, 국가의 사유화 및 관료화에 의해서 꾸준히 축소, 타락해왔다. 그 결과 우리의 공적 담론은 유럽에서 기원한 자유시장이라고 하는 특정한 경제관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쟁, 효율, 민영화 같은 원리들은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진다. 심지어 한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정책적 우선순위를 토론해야 하는 정치의 공간에서도 경제성 이외의 것을 말하는 사람은 비합리적, 비현실적, 심지어 위험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국가권력은 선출된 대표자들로부터 주권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글로벌 자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실제로 초국적기업들의 투자결정, 화폐투기, 자본유통이 각 나라의 고용과 부의 수준을 직접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타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보 모슬리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선거대의제 ‘민주주의’는 200년 전에 그 출발부터 민중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민중의 이름으로’ 시민혁명을 주도했던 중산계급 엘리트들은 정치적, 시민적, 법적 권리를 확대, 허용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외양을 갖추면서 실제로는 정치엘리트와 금권세력이 지배하는 과두적 체제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민중이 직접 통치한다’는 단순 명료한 정의를 비틀어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그릇된 인식을 확산, 고착시키면서 거침없이 자본축적(자연과 민중에 대한 약탈)의 장애물들을 걷어내왔다. 그러므로 지난 30년 동안 세계화의 이름으로 정치엘리트들이 솔선해서 국민국가의 경계와 기능을 무너뜨리고 99%의 희생으로 1%가 천문학적 부를 쌓도록 주선해온 것을 실책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선출된 대표자들에게 부여된 본연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민중의 이름으로》에서 모슬리는 선거대의제가 가져오는 변화 중에서 가장 구석구석 스며드는 것은 정치 그 자체의 성격에 초래하는 변화라고 말했다. 선거로 구성된 의회는 공정한 법을 제정하기 위한 장(場)이 아니라 여러 이해집단의 이권다툼이 벌어지는 경기장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면 사람들은 국가에서 무엇을 받을지를 놓고 협상하고 경쟁하고 모의하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국가’들에서 정치적 포럼을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돼야 할 많은 일들이 행정기구가 주관하는 문제로 사실상 바뀌어 있다. 유전공학, 우주개발, 인공지능 등 한 사회를 심원하게 변화시킬 사안들이 거의 전적으로 기술관료들의 결정에 맡겨져 있는 것이 그런 예이다(이런 일들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를 밟아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대중이 정치에 대해 냉소, 무관심, 혐오밖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개인의 자율성에만 집중하는 원자화된 사람들은 공적 영역에서 완전히 후퇴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는 보통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시민은 소비자가 되었고, 정치는 부조리극이 되었다. 일간지 1면을 정치기사가 도배하고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이 가십거리로 과잉 소비되는 바로 그만큼 시민들은 탈정치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언론 상황이 그것을 말해준다. 민주주의에서 공직자 감시와 언로는 양보할 수 없는 민중의 기본적 권리이자 의무이다. “직업정치인들이 높은 봉급을 받으면서 돈 이외에도 공직에 딸린 각종 혜택을 탈취하고 있는 대의정부 아래에서는, 이들의 권력남용을 조사해서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언론매체밖에” 없다. 한 줌도 안되는 극소수 자본가가 사실상 전 세계 주요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처럼 현대 ‘민주국가’들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지역언론이 소멸하고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동안 민주주의는 뿌리에서부터 훼손되고 있다. 한편, 투표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선거라는 것은 유권자들의 가장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욕망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한차례 행사에 불과하다. 모든 입후보자가 경쟁적으로 개발과 소득증대를 약속하는 분위기 속에서, 맹목적인 경제성장의 추구가 궁극적으로 파국을 불러온다는 것을 환기하는 장기적인 안목의 질문이 제기될 틈은 애초에 마련되지 않는다.
극단적 양극화, 불평등, 비인간적 형태의 빈곤이 전 세계 보편적 현상이 되어 있고, 개인과 기업, 국가 모두 전례 없는 빚더미에 눌려 질식할 지경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양적 완화와 엘리트 지배층의 부채를 사회화하는 방법으로 간신히 위태롭게 작동하고 있다. 지구생태계의 급진적 타락까지 포함하여, 신자유주의를 경제 프로젝트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봐도 낙제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어떨까. 사회를 해체하고 정치를 무력화하고, 단 하나의 경제모델(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의 독점자본주의)을 강요하면서, ‘대안은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데 있어서 신자유주의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게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 지금에 와서,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물리학적 한계로 인하여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다.
물론 끝없는 확장과 축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본디부터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인도와 중국의 폭주를 고려에 넣는다면 이번 세기 안에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어떤 것이 됐든 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자본주의(끝없는 확장)는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보다 나은 것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제 인류사회는 두 가지 차원의 난제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라이벌이 없다고 느끼는 자본주의체제가 더이상 민주주의로 가장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탐욕을 극한까지 밀어붙일 때 거기에 수반될 인간적, 사회적 고통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그리고 생태문명의 기초가 될 사상적, 심리적, 물리적 토대를 너무 늦지 않게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생태문명을 향한 길에 놓여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가 대안적 사회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불신하게 된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경험한 ‘민주주의’라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 즉 가짜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이유이다(선거대의제는 태생적으로 금권정치일 수밖에 없고 현상유지를 강화할 뿐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앞에서 미흡하게나마 설명했다). 따라서 관건은 우리가 상투적인 사고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된다. 근대 산업주의 성장모델과 국민국가의 테두리에 갇혀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 사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스스로 혐오하는 체제에 의존해서 굴종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순수한 자유시장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그런 것은 현실에 있을 수 없다)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가 한때라도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자본주의의 산실이라 할 영국에서조차 사람들이 어떤 일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조사해보았더니 임금노동과 자급적 노동(비자본주의적 노동)이 각각 절반씩 같은 비중을 차지하더라고 한다. 어쩌면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지적처럼, 우리 모두가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공동작업을 할 때에는 코뮤니스트(공동체의 일원으로)로서, 사법제도나 경찰 없이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아나키스트(자주적, 자립적으로)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누천년 이어진 인류문명을 단 200년 만에 붕괴 위험에 빠뜨린 장본인은 가짜 민주주의와 연합한 세계체제로서의 산업자본주의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도로 지난 두 세기 동안 지구 위에서 벌어진 일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작업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선출된 대표자들이 권력을 손에 넣은 뒤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먼저 착수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 핵심 내용은 민중의 경제적 자립기반을 빼앗는 것이었다. 자급의 지혜와 기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야말로 효과적으로 국가와 산업체제에 종속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진지하게 이 세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운동을 구상하려고 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경제를 포함하도록 민주주의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땅(과 바다)에 대한 권리, 생물다양성에 대한 민중의 권리는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국민국가 테두리 바깥에 있는, 현시대는 물론 미래를 살아갈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타자들까지 고려하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물론 미디어산업―인간 상상력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을 통해서 대안적 미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프로파간다 기구가 아닌, 독립적인 언론매체가 민주주의와 지속가능한 사회의 필수적 조건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기후변화, 대량멸종, 군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일은 급진적인 문명적 전환이다.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세, ESG, 그린뉴딜 같은 제도적 개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생에너지, 전기차 같은 녹색기술로도 충분치 않다. 자원 추출에서 제조, 운송, 폐기에 이르기까지 산업화된 경제에서 녹색화(탈물질화)의 여지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긴급한 일은 생산성의 엔진을 멈추는 것이다. 2016년 예일대 윌리엄 노드하우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경제가 성장하는 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시대 이전에 비해 1.5°C 이내로 제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현재의 시스템은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감수하지 않고는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리기는 더욱 불가능한 성장역학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 지구의 미래를 파괴해야 하는 기업과, 오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이들의 내일을 파괴해야 하는 노동자와, 생태적, 사회적 혼란이 커질수록 더 많은 세금을 거둬서 국고를 충당해야 하는 정부 모두가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경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화석연료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우리의 문명, 전체 생산양식과 삶의 양식이 송두리째 병들어 있다. 전체를 바꾸지 않고 ‘부작용’들만 제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변화를 위한 운동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 시스템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한 목적의 새로운 ‘혁명’은 역사 속의 민중봉기나 시민혁명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다. 체제를 뒤집어엎는 모습이 아니라 그 토대가 야금야금 갉아먹혀서 어느 순간 있으나 마나 한 실체가 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신자유주의시대에 정치는 경제성장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쪼그라들었다. 인간의 모든 희망과 꿈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야말로 모두에게 안락을 가져다줄 유일한 경제모델이라는 신화 아래에서 경제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희생, 보류되었다. 인권유린, 농민공동체의 해체, 도시 슬럼의 확대, 자연훼손이 필요악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자유와 평등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새로운 혁명은 행복을 지금 실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혁명의 과정 속에 목적이 이미 성취되는 셈이다. 지금의 경제, 정치 시스템과 절연된 공간(루돌프 바로가 해방구(解放區)라고 부른 것)을 창출하는 일은 그 기초작업이 될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지역적 직거래, 지역통화, 자치, 시민공간의 탈환, 공동체적 자립 등의 형태로 자본의 논리를 깨고 연대의 경제를 만들어낸 경험이 숱하게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루빨리 정치의 언어를 복구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탄소감축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은 경제의 언어이다. 정치는 우리가 어떤 모습의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를 묻는 일이다. 인류는 생명체로서의 자기자신을 표현하면서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 각자가 진실로 보람 있는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주적이고 협동적인 삶의 방식을 복원하여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성장동력에서 해방시키고, 땅과 바다를 보살핌으로써 기후위기에 근본적으로 대처하고, 인간성을 회복하여 거대 기계체제의 부속품이 되는 일을 단호히 거부하는 행위 속에서 혁명이 싹트고 있다. 근대 산업문명의 억압적 구조와 논리 그 자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비협력의 자세, 보이콧에는 심원한 정치혁명의 씨앗이 들어 있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