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같은 권력의 중앙집중적 체제 속에서는 그 권력이 생명의 옹호를 자신의 과제로 떠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거대한 권력의 집중 그 자체에 이미 반생명적이며, 반생태적인 경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결코 거대권력의 통제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도, 또 그렇게 극복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고 김종철 선생이 1993년에 쓴 글로서, 《녹색평론》 서문집인 《비판적 상상력》에 실려 있는 〈선거와 풀뿌리 주권의 회복〉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중앙집중적 권력에는 그 자체로 반생명적이고 반생태적인 경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런 위험성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울이 님비인가, 농촌이 님비인가
중앙집중적 정치·행정 권력과 서울 중심 사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서울에 정치·행정 권력이 있다 보니, 서울 중심의 경제·사회 구조는 더욱 강화된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은 주목을 받고, 농촌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시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서울과 수도권을 위해, 농어촌은 희생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발전소와 송전선이 들어서는 곳은 농어촌이다. 심지어 재생에너지도 농촌에서 농지와 임야를 훼손해가며 대규모로 추진된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태양광 패널을 깔아서 전기를 생산해, 공장과 도시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재생에너지를 하면, 당연히 초고압송전선도 많이 건설해야 한다. 재생에너지가 가진 ‘자립’과 ‘순환’의 가능성은 말살되고, 석탄화력발전, 핵발전과 똑같은 ‘나쁜’전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서울 중심 구조는 그나마의 에너지 전환도 어렵게 만든다. 말로는 정부가 ‘에너지 전환’을 얘기하지만, 지금도 동해안의 강릉과 삼척에는 각각 2개씩, 4개의 석탄화력발전소가 건설 중에 있다. 삼성, 포스코 등 대기업이 관련된 민자 발전소들이다. 당연히 이 석탄화력발전소는 동해안에 전기가 필요해서 건설하는 발전소가 아니다. 이 발전소들이 생산하는 전기는 결국 수도권으로 보내져야 한다. 그래서 동해안에서 경기도 가평까지 이어지는 50만V 초고압직류송전선(HVDC)도 같이 추진되고 있다.
만약 서울 중심 사회가 아니라면, 이런 방식으로 발전소와 송전선을 건설할 수 있을까? 전기가 반드시 필요하고 석탄화력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면, 수도권에 짓는 게 낫다. 그러면 최소한 강원도를 가로지르는 초고압송전선은 필요 없다.
그런데 서울에 석탄화력발전소를 짓자고 하면 어떻게 될까? 서울사람들은 물론이고, 정치권과 언론에서도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수도권에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짓지 못하고 동해안에 짓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님비(NIMBY)인가? 전기를 많이 쓰면서도 우리 지역에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쪽이 님비인가, 아니면 우리 지역에서 쓰는 전기도 아닌데 발전소와 송전선을 우리 지역에 건설하겠다고 밀어붙이니 거기에 반대하는 것이 님비인가? 사실은 서울과 그 인근 지역이야말로 극단의 ‘님비’이다. 외부에 전기를 의존하면서도 스스로 전기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곳이다. 게다가 발생하는 생활쓰레기도 자체 처리를 못하고 외부로 반출해서 버리는 도시가 서울이다.
반(反)생태적일 수밖에 없는 서울 중심 사회
이렇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발전소 짓고, 송전선 짓는 구조는 지금 필요한 생태적 전환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 만약 서울에 석탄화력발전소를 지어야 했다면 진작 대한민국은 ‘탈석탄’을 했을 것이다. 바닷가에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농촌 마을과 산을 가로질러서 송전선을 건설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석탄화력발전이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에너지 전환의 핵심은 재생에너지로 발전원을 바꾸는 것에만 있지 않다. ‘분산’과 ‘자급’의 관점이 필요하다. 중앙집중적 전력시스템을 지역분산형으로 바꿔야 한다. 자기 지역에서 필요한 전기를 자기 지역에서 최대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관점을 분명히 했다면, 지금처럼 동해안에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강원도를 관통하는 초고압송전선을 건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한편 전력문제와 관련해서는 서울에 앉아 있는 일부 ‘전문가’들의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에너지 전환’은 허상이다. 이들은 대도시부터 태양광발전을 늘리고, 전기를 많이 쓰는 산업단지와 공장 등의 공간에서부터 태양광발전을 늘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산업단지 공장 지붕에서 태양광발전을 하면 곧바로 산업단지에서 전기를 쓸 수 있다. 굳이 송전선을 건설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놔두고, 농지를 훼손해가면서 태양광발전을 늘리겠다는 것은 ‘전환’이 아니라 ‘공멸’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전력시스템 측면에서 보더라도 매우 위험하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장거리 초고압송전에 의존하는 전력시스템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경우 수도권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초고압송전선 몇 군데에서 동시에 사고가 나면 전력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전은 그 위험을 감추기 위해 송전선을 덕지덕지 건설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해답은 지역분산형으로 전환하고, 자기 지역의 전력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생각해도 그렇다. 이미 불가능해지고 있지만, 설사 지구의 온도를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상승에서 막는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이상기후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전세계적으로 식량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런데 지금도 부족한 농지를 훼손하면 어쩌자는 얘기인가? 전기 없이는 버틸 수 있지만 밥 없이는 못 버티는 것이 인간이다.
단지 전기와 관련해서만 이런 것이 아니다. 반생명·반생태적 사업은 서울 중심 사회가 아니면 유지될 수 없다. 각종 환경오염물질을 내뿜는 공장이 수도권에 있다면 그런 공장이 가동할 수 있겠는가? 산속 외진 곳과 농촌에 이런 공장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에 있는 영풍제련소 문제가 대표적이다. 카드뮴 등 중금속을 내뿜은 지 오래됐어도 여전히 제련소는 가동 중에 있다. 주민들의 몸에서 중금속이 검출되고, 제련소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치아가 녹아내린다는 증언도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런 제련소가 폐쇄되지 않는 것은 서울 중심의 정치, 언론이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중심 사회는 그 자체로 반생태, 반생명적이다.
중앙집권과 맞물린 신자유주의
중앙집권적인 정치·행정 구조는 이런 구조를 유지·강화시킨다. 설사 소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있어서 발전소와 송전선 건설에 반대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것을 저지시킬 권한이 없다. 대규모 발전소, 송전선 건설과 관련된 핵심 권한은 중앙정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소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도 나오기 어렵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려면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아야 하는데, 정당 자체가 중앙집권적이고 서울 중심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지역주민들을 소신 있게 대변해서 중앙정부와 부딪히는 지방자치단체장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중앙집권세력이 가진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 역시 자본의 탐욕이 농촌지역을 파괴하도록 만들고 있다. 지금 기득권 정치와 중앙정부, 기득권 언론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규제완화’가 절대선이고, 그들에게 자유란 ‘자본의 자유’와 ‘돈을 벌 자유’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공성이 필요한 영역까지 민간기업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대장동이 그 결과물이다.
택지 개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농촌지역에 들어서고 있는 산업단지도 민간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인허가를 하지만, 사업 주체는 민간기업들이 만든 특수목적법인인 경우가 많다(지자체가 일부 지분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사업이 확정되면 이런 법인이 토지 강제수용까지 할 수 있다. 그러니 곳곳에서 무분별하게 산업단지가 추진되고, 대규모로 농지와 임야가 훼손되고 있다. 또한 민간기업들이 화력발전소도 운영할 수 있게 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 동해안의 석탄화력발전소 문제도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발전소를 짓고 있는 주체가 삼성, 포스코 등 민간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유주의는 폐기물 영역에까지 침투해 있다. 지금 생활폐기물은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지는 구조이지만, 산업폐기물은 대부분 민간기업들에게 맡겨 놓았다. 그런데 지금 산업폐기물 매립장, 의료폐기물 소각장 등은 한 곳당 수천억대의 이권사업이 되었기 때문에, 민간업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허가를 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사회이지만, 서울 인근에 산업폐기물 매립장, 의료폐기물 소각장을 지을 수 있겠는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민간기업들은 농촌지역에 이런 시설들을 지으려 하고, 많은 농촌 마을들이 이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문제는 이런 공공성의 훼손을 막고 싶어도 지역에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민간기업이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막고 공공이 책임지려 해도, 지방자치단체가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 얼마 전 충남 서산시에서는 주민대책위와 지방자치단체가 합의해서 민간업체가 짓고 있는 산업폐기물 매립장을 공공시설화하기로 했지만, 법적인 제약이 많아서 좌절되고 말았다. 중앙집권적인 정치·행정 구조 탓이다. 결국 현재의 중앙집권 구조는 신자유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공공성을 훼손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하며, 농촌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농촌에도 존재하는 중앙집권주의
그런데 이런 중앙집권주의는 농촌 안에도 존재한다. 농촌에 있는 군청이 바로 그것이다. 군청에 있는 군수는 표가 많이 있는 읍 지역에 신경을 쓰고, 군청 공무원들도 읍이나 인근 도시에 산다. 면장은 군수가 임명하는 순환보직이고,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들도 본청인 군청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농촌 내에서도 인구가 적은 면 지역은 소외된다. 그리고 면 지역으로 온갖 환경파괴 시설들이 밀려든다.
지금 충북 괴산군 사리면의 상황이 그렇다. 사리면 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산업단지와 산업폐기물 매립장이 자기 지역에 들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려 200만 톤 가까운 산업폐기물이 전국에서 밀려들 상황이었다. 산업단지를 추진하는 것은 SK그룹과 지역 건설업체 그리고 괴산시이고, 산업폐기물 매립장은 당연히 민간업체가 운영하게 될 것이다. 대장동처럼 특수목적법인을 만들고,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산업단지와 산업폐기물 매립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이익의 대부분은 민간자본이 가져가는 구조이다.
그런데 괴산군수는 막무가내로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항의의 표시로 사리면 전체 이장단이 총사퇴하고 주민자치위원들까지 총사퇴를 했지만, 군수는 공무원들까지 동원해서 밀어붙이고 있다. 만약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는 나라라면 이런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나라였다면 농촌지역에서는 면 단위, 읍 단위로 지방자치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보면, 군수와 군청이 아예 없는 나라도 많다. 그러니 면의 주민들이 반대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대한민국도 5·16 군사쿠데타 이전까지는 그랬다. 5·16 이전의 기초지방자치는 시·읍·면 자치였다. 면장, 읍장도 직선으로 뽑고 면의원, 읍의원도 뽑았다. 군(郡)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이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지방자치를 중단시키면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면·읍을 군(郡)으로 강제 통합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박정희의 ‘잔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991년 지방자치를 부활시키면서도 면·읍 자치를 부활시키지 않고 군 단위로 지방자치를 부활시킨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이상한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
일본도 기초지방자치는 시·정·촌 자치이다. 정·촌은 우리로 치면 읍·면 정도이다. 독일의 기초자치단체인 ‘게마인데’도 농촌지역에서는 우리의 읍·면 정도이다. 스위스의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코뮌’도 그렇다. 그런데 대한민국만은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놓은 군 단위 지방자치를 여전히 하고 있다. 그리고 군수와 군청으로 집중된 권한은 농촌지역 내에서도 면 지역을 소외시키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를 중단시키면서 읍·면의 자치만 폐지시킨 것이 아니었다. 1961년 이전의 지방자치법에서는 도시지역의 동장(洞長)과 농촌지역의 이장(里長)을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것도 폐지했다. 그리고 이 부분도 민주화 이후에 복구되지 않았다.
농촌지역에서 마을대표를 주민 직선으로 뽑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역사인 것이다. 지금도 농촌지역의 마을 이장은 주민들이 총회에서 뽑는 것이 관행이다. 그런데 법적인 임명권은 면장, 읍장에게 있다. 지방자치법 시행령 81조 2항에서 “이장은 주민의 신망이 두터운 자 중에서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읍장·면장이 임명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주민들이 뽑은 이장을 면장, 읍장이 그대로 임명하지만, 만약 지방자치단체장이 밀어붙이는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이 이장이 되거나 하면 이장 임명을 안해주는 경우도 있다.
결국 지금 우리 농촌지역의 지방자치는 제대로 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없다. 면·읍의 지방자치를 부활시켜야 농촌에 맞는 지방자치를 할 수 있다. 지금의 군은 서울시 전체 면적보다 넓은 경우가 많을 정도로 자치를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다. 더구나 군 안에서도 읍·면별로 사정이 많이 다르다. 그러니 군 단위에서는 제대로 된 자치를 하기도 어렵다.
지금도 단위농협은 읍·면별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더라도, 농촌지역의 지방자치는 읍·면별로 해야 한다. 그래야 에너지 자립도 가능하다. 독일의 유명한 에너지자립 마을인 쇠나우는 인구 2,500명 정도의 작은 지방자치단체이다. 우리로 치면 면 정도밖에 안된다. 그런데 그런 인구 규모로 자치를 하고 있다.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지방자치 차원에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자립 모델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쇠나우가 우리의 읍·면처럼 자치권도 없는 군청의 하부조직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논의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치가 가능해야만,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에너지 자립’ 모델이 나올 수 있는 까닭이다.
한 가지 의문인 것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공무원, 정치인, 전문가들이 에너지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독일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농촌지역 기초지방자치가 5·16 군사쿠데타 이전에는 대한민국에서도 했던 면·읍 자치라는 것은 보지 못한 것인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다.
메가시티가 아니라 연방제를 논의하자
다른 한편 ‘지방 대도시’ 중심의 균형발전론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요즘 나오는 ‘메가시티’론이 대표적이다. 이런 주장은 한마디로 서울―수도권을 닮은 거대도시권을 지방에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부―울―경 메가시티가 수도권처럼 될 수 있을까? 수도권이 수도권일 수 있는 것은 정치·행정적 권력이 그곳에 있고, 사회·경제적 권력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하지 않고 메가시티를 얘기하니,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주장이다. 결국 ‘메가시티’라는 단어만 내세워서 지역주민들을 현혹시키고 중앙정부로부터 개발사업 예산이나 따오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당장 가덕도 신공항처럼 대규모 예산낭비와 환경파괴가 우려되는 사업을 타당성 검증도 없이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메가시티론이 낳을 결말이 예상되는 것이다.
사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논의는 메가시티가 아니라 연방제이다. 중앙집권적인 권력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주권을 가진 주(州)로 구성된 연방국가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균형발전이나 지방분권을 얘기하면서도 연방제 도입을 얘기하는 것은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다. 연방제가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연방제는 미국도 채택하고 있고 독일도 채택하고 있는 민주국가의 한 구성원리이다. 오히려 고려연방제는 남북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구상으로, 일반적인 연방제 논의와는 거리가 있다. 북한이 연방제라는 단어를 쓴다는 사실 때문에 연방제를 얘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북한이 ‘민주’라는 단어를 쓴다는 이유로 우리도 ‘민주’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중앙집권―서울 중심 구조를 해체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중앙집권적인 정치·행정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연방제 원리를 도입한 연방국가로 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주(州)의 권한은 다시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산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역의 문제는 지역에서 결정해야 한다. 중앙정부는 외교, 국방 등과 전체적인 조정 역할만 하고, 나머지 역할은 주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넘겨야 한다. 그리고 지역별로 자급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서울처럼 100% 자급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면, 최대한 노력을 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피해를 끼치는 만큼 그에 대한 부담을 지게 해야 한다. 지금처럼 아무 부담 없이 다른 지역들로 에너지, 폐기물 등과 관련된 문제를 떠넘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또한 농촌지역에서는 기초지방자치를 면·읍 자치로 전환함으로써 실질적인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 면·읍이 지방자치단체가 되면 스스로 공간계획도 만들고, 조례도 만들고, 예산도 편성할 수 있다. 사람이 남고,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농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주거, 교육, 의료, 복지, 문화, 환경 정책을 세울 수 있다. 농사를 살리고 지역순환경제를 만들 농업계획, 지역순환경제계획도 세울 수 있다.
또한 이장을 임명직으로 만든 지방자치법 시행령을 개정해서, 마을자치도 보장해야 한다. 지금 전국의 면·읍 지역에 있는 행정리가 3만 6,000개에 달한다(현재는 행정리가 마을자치를 하는 단위이다). 이 행정리들이 마을자치를 제대로 한다면, 3만 6,000개의 마을공화국이 농촌을 지키게 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장은 주민이 선출하는 마을 대표자로 자리매김해야 하고, 마을의 규약도 민주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농(農)의 가치를 살릴 방법은 자치의 확대뿐
지금 얘기한 연방제 도입과 면·읍 자치의 부활은 중앙집권적이고 서울 중심인 대한민국 사회를 큰 틀에서 바꾸자는 얘기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제도를 포함한 정치제도의 변화, 배심재판 등 추첨제 민주주의의 확대, 국민발안 등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도입도 필요하다. 이런 변화들이 너무나 어렵고 먼 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큰 틀의 전환이 어렵다는 이유로 쉬운 길을 택하면, 나중에 그 길은 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너무 많이 해왔다. 어렵더라도 제대로 방향을 설정하고, 길이 없으면 좁은 길부터 내서 넓혀나가야 한다.
필자는 지난 2월 농촌·농사·농민을 위한 공익 법률단체인 ‘공익법률센터 농본’을 창립해서 활동하고 있다. 필자가 할 수 있는 ‘길을 내는 활동’이다. 문을 열고 나니 어떻게 소문을 듣고 농촌지역에 있는 여러 대책위, 비대위, 반대투쟁위에서 연락들이 온다. 그렇게 찾아오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우리 얘기를 안 들어준다”는 것이다. 돈을 벌려고 사업을 추진하는 업체가 주민 얘기를 안 들어주는 것은 말할 나위 없겠지만 공무원도, 정치인도, 언론도 “우리 얘기를 잘 안 들어준다”고 한다.
그중에는 꽤 큰 기업체 대표이사를 하다가 귀촌한 사람도 있었고, 공무원이나 언론사 기자, 교수 출신도 있었다. 그런데 농촌에 들어와 농촌주민이 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순간, 거대한 벽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농촌주민들은 이 사회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의미’의 소수자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농촌을 파괴하는 자들은 힘도 있고 돈도 있고 네트워크도 있는데, 농촌을 지키고 농사와 농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민원인’ 취급만 당하는 것이 중앙집권 구조가 낳은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풀뿌리에서부터 확대해나가야 한다. 농촌주민들, 농민들이 제대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고, 법 제도도 바꿔나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 연대하고, 힘을 모아나가야 한다. 지금 시대에 농(農)의 가치를 살릴 방법은 그뿐인 것이다. 기후위기를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통해서 대응해나간다는 것도 허상이다. 그 권력이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현실을 보면, 중앙집권적인 권력과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해온 자본은 유착해 있는 상황이다.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해온 경제·사회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면, 자치를 강화하고 민중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분산하고, 자급하고, 지역 내에서의 순환을 이뤄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시민의 주도성도 발휘될 수 있다. “우리는 생태계를 보전하고 자연을 치유하는 일을 중앙집중적 권력체계에 언제까지나 위임해 놓을 수는 없게 되었다”라고 한 김종철 선생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민중의 자기통치를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모여서 토론하고 결정해나갈 수 있는 작은 단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김종철 선생은 《녹색평론》 2009년 11―12월호 서문에서 “민주주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밑바닥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상호부조의 협동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자율적으로 사는 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인민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복잡한 이론으로 사람 헷갈리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간디도 독립 인도가 70만 개 마을공화국의 연합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판차야트’라는 마을의회를 두고 마을자치를 하는 것을 꿈꿨다(이런 간디의 구상은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녹색평론사, 2014)에 잘 소개되어 있다).
지금도 스위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스위스는 코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스위스의 코뮌은 인구 1,000명이 안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그 어느 나라의 기초정부보다 큰 권한을 행사한다. 인구 규모가 작은 것은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다. 주민총회에서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위스는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도 안되는 나라이지만, 연방제를 택하고 있다. 26개의 칸톤(주)이 입법·행정·사법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연방제는 오히려 다양성을 보장한다. 4개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될 정도로 다양성을 지닌 칸톤들이 하나의 국가로 모일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맑은 하늘’의 경험을 생각하며
요즘 대선과정을 지켜보면서 회의감과 피로감이 커진다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의 대의제에서는 기후위기처럼 정말 중요한 주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다. 소수자와 약자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끝없는 정쟁만 부각된다. 그래서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지금의 대의제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를 통해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앞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하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숱한 좌절과 실패의 경험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몇몇 경험들 때문이다. 여러 차례 있었던 촛불과 광장에서의 경험들, 2004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주민자치적인 방식으로 시행했던 주민투표의 경험, 그 외 여러 현장들에서 목격해온 민중의 자치능력이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필자에게는 잠깐 보았던 ‘맑은 하늘’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각자 경험했던 ‘맑은 하늘’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김종철 선생은 그 ‘맑은 하늘’이 우리의 동력이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녹색평론》 2009년 11―12월호).
하늘이 맑아지는 순간이 잠시뿐이라고 해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가 잠시 동안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영물(靈物)이어서 그 잠시 동안의 맑은 하늘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마음속 깊이 그 기억을 평생 갖고 살면서 언젠가 그것이 다시 실현될 날을 꿈꾸고, 노력하고, 싸우는 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