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창간 3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몹시 무겁다. 일차적으로는 물론 《녹색평론》을 이끌어온 김종철 전 발행인의 부재가 대단히 안타깝기 때문이지만, 모든 객관적 자료로 미루어 볼 때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30년 전 창간사에서 피력되었던 우려가 모조리 현실이 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세계야생생물기금(WWF)과 런던동물협회가 공동으로 작성, 발표한 〈살아있는 행성 보고서 2020〉에 따르면, 인류의 낭비적·착취적 자원사용으로 인하여 지난 46년 동안(1970~2016년) 야생 척추동물이 68%나 사라졌다. 지구 생물량의 80%를 점유하면서 탄소를 땅속으로 보내고 산소를 대기 중에 공급하는 식물의 경우 5분의 1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숲은 40% 감소했다. 1초마다 축구장 하나 크기의 삼림벌채가 진행된다. 1970년까지만 해도 인류의 생태발자국은 지구의 재생능력보다 작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인류는 식품과 연료를 위해 지구 1.5개(지구 생태적 용량의 56%를 초과)를 남용하고 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성이 처해 있는 가공할 생태적 현주소를 말해주는 통계자료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인류의 태만은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다.
현재 우리의 미래를 가장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는 요소는 관성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 그대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기술적·경제적 낙관주의는 끝없이 성장하는 세계를 가정하고, 미래 어느 지점에선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하면서 전 세계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탄압해왔다. 그러나 ‘풍요’를 맛보는 인구는 갈수록 더 극소수에 한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생태적 비용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제 ‘지속가능성’이라는 무서운 말이 일상적으로 운위되는 실존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인류는 또다시 바로 그 위기를 초래한 기계적 사고에 의존해 ‘해결’을 시도하면서 곧장 재앙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점점 가속도가 붙어가는 기후붕괴 사태 아래에서 이미 지구공학이라는 아이디어가 꽤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성장경제를 포기하는 대신, 정책입안자들은 대규모의 기술공학적 방법으로 기후변화를 ‘고치려고’ 한다.
기후변화는 지구라는 기계가 고장이 나서 나타나는 이상 징후가 아니다. 지구라는 유기체가 형평성(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질서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지구 생물량의 0.01%를 차지하는 인류는 자신의 행위와 존재방식이 지구 생태계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고, 값싼 방법이다. 이것은 철학적 이유에서도 인류가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원리이다. 인간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다른 생명체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인간 역시 먹이를 통해 그물처럼 얽혀서 서로의 삶(生)을 지탱하고 있는 지구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유시장’의 제물(祭物)이 되어온 농민, 농토, 숲, 강과 바다, 공동체를 복구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재생에너지나 지구공학, 혹은 기계문명의 폭력적·군사적인 정신세계가 집약되어 있는 원자력발전 같은 것에 의존해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접근법으로는 설혹 ‘탄소중립’은 달성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의미 있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급진적인 방향전환에 성공해서 순환적 생활패턴을 회복하고 대기 중의 온실가스도 경감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을 때, 기후위기는 인류 문명에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녹색평론》은 지난 30년에 걸쳐서 우리의 생태적·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날 유일하게 건강한 길은 농업 중심 사회의 재건이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추구해온 방법, “대규모의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단호히 그만두고, “소규모의 지역 중심, 자립적 생산·생활 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고,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의 제일차적인 관심사는 인간경제의 자연적 토대인 땅을 보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끝없는 성장이라는 공식에서 마치 소도구처럼 취급되어온 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상부상조와 자치, 자립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고작 단기적인 이익추구를 위해서도 자기가 걸터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서슴없이 잘라내는 자본과 기업의 대변인 노릇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의정부 아래에서, 법제도를 통해 땅과 땅을 보살피는 사람들을 옹호한다는 전략은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호 《녹색평론》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다양한 모색과 풀뿌리 차원의 실천적 움직임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한편 ‘녹색평론 30년’의 의미를 짚어본 특집에서는 창간사와 함께 《녹색평론》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점에 발표되었던 권두언들을 다시 수록하는 만용을 부렸는데, 그 이유는 10년, 20년, 심지어 30년 전 김종철 발행인의 발언이 오늘의 상황에도 놀랄 만큼 긴요하고 적실해서이기도 하지만, 《녹색평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차 확인하고 다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보다 재앙적인 미래가 훨씬 선명한 가능성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자포자기하거나 쉽게 꺾일 수는 없다. 어쩌면 그런 ‘합리적’인 태도도 기계문명의 결정론적,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의 소산일지 모른다. 미래는 현재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허무주의는 근대의 유행병이라고 할 만한 교만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사람살이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최선을 다해 땅을 보살피고 자급과 자치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인 동시에 인간존재로서 책임을 다하는 태도라고 믿고 있다.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도승이었던 토머스 머튼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다고 믿었던 셰이커교도들이 어떻게 해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을 짓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려고 애썼던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어느 순간에라도 끝장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각자가 음미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난 한 해, 독자들의 격려와 지원이 없었다면 《녹색평론》이 결호 없이 발간되는 일은 난망했을 것이다. 특히 선장 잃은 배의 난파를 우려하며 ‘합리적 소비자’로서 구독을 중단하거나 유보하기보다 주변에 정기구독을 권유하고 몇 년치 구독료를 미리 납부하거나 후원회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신뢰와 우의를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다 충실하고 유의미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잡지의 발간 일정에 쫓기지 않고 편집실의 역량을 보강하면서 재정적 기반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30주년이라는 고비에서 1년 휴간이라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송구스런 말씀을 드린다. 《녹색평론》의 발간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우리 사회에 《녹색평론》의 필요성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현실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녹색평론》이 절박하게 전해야 할 진실이 있고 그 역할을 대신할 매체가 달리 없다면, 우리는 사력을 다해서 고 김종철 발행인의 유지를 이어가려고 한다.
휴간 기간에도 독자 여러분들의 비판적인 관심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가능하다면 정기구독 및 후원회원으로서 계속 남아서 《녹색평론》이 독립적인 매체로서 우리가 처한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질문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에 적극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독자와 필자들이 편집실과 동지적 연대감을 갖고 자신의 일처럼 이 잡지의 발간에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는 것은 《녹색평론》의 자랑이며 가장 중요한 밑천이다.
오래전부터 《녹색평론》을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을 우화(寓話)를 떠올리며 잠시 작별을 고하려고 한다. 랍비들 사이에 전해져온다는 그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지옥과 천국을 차례로 방문한 경험을 들려준다―지옥에서 본 인간들은 아니나 다를까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었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향기로운 죽이 그득한 커다란 가마솥이 있었다. 그런데 죽을 떠먹을 국자가 너무 크고 길어서 사람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기 입에 죽을 떠넣을 수 없었다. 한편, 천국에서는 과연 사람들이 혈색 좋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조건은 지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어마어마하게 자루가 긴 국자를 자기 입으로 가져가려고 애쓰는 대신, 사람들은 다른 사람, 서로 상대방의 입에 죽을 떠넣어주고 있더라는 것이었다(1996년 11―12월호 서문). 지옥도, 천국의 가능성도 우리들 가운데에 있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