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주권과 신자유주의
2007년, 500여 명의 농민을 비롯한 국제 활동가들은 국제적 식량주권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말리 셀링게에 모였다. 그리고 18세기에 농업기술을 보급하여 말리 민중을 먹여 살림으로써 ‘아프리카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말리 여성 농민 닐레니를 기리는 의미로 ‘닐레니 2007’로 명한 행사를 개최하였다. 다음에 인용한 것은 여기서 발표된 〈닐레니 선언〉에 나오는 문구인데, 식량주권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주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식량주권은 환경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문화적으로도 적합한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이며, 또한 민중들이 그들의 고유한 식량과 농업생산체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권리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체계와 정책의 중심을 시장과 기업의 요구가 아니라 생산과 공급,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하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식량주권은 현재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식량체계에 맞서 지역적 생산자들을 중심에 둔 식량, 농업, 소목축업, 어업 체계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다. 식량주권은 지역, 국민경제와 시장을 우선시키고, 농민과 가족농이 추구한 농업, 어민, 목축인과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지속성을 토대로 한 식량생산, 공급, 소비의 권한을 부여한다. 식량주권은 모든 민중에게 공정한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투명한 무역과 소비자가 식량과 영양물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증진시킨다. 식량주권은 우리의 토지, 영토, 물, 종자, 가축, 생물의 다양성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권리가 식량생산자의 손에 있다는 점을 보장한다. 식량주권은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 간의 불평등과 탄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공공농업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량주권이라는 개념을 먼저 꺼내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농정을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공공농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위기 속에서 제기되는 국가의 역할이고, 식량주권을 실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구에 대한 약탈을 기초로 식량조차 상품으로만 인식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결과가 지금과 같은 지구의 위기이다. 현재 조성된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식량주권이 실현되는 공공의 이익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에서는 지금까지의 농정을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뿌리를 둔 적폐농정으로 규정하고, 식량주권을 실현하는 공공농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농업이라는 표현 자체가 생소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농산물 판매를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생계를 영위하는 농민들에 대한 정책을 공적 영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공(公共)’의 사전적 의미는 ‘국민 모두 혹은 사회 전체와 관련된 것’(위키낱말사전)이다. 우리가 공공의료나 공공교육 같은 용어는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공공농업이란 용어가 생소한 이유는 농업을 산업적 측면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산업(産業)은 인간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하기 위한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농업을 농업인이 생산활동을 통해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여 수익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보면 농민 개개인의 사적 영역(산업활동)으로만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의료를 설명하는 예를 통해 공공농업이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공의료는 사전적 의미를 두루 포함한다면 “대중과 사회에 전반적으로 관계된 의료”라 할 수 있다. 즉 “공공의료는 국민들에게 보편적 필수의료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어떤 계층도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따라서 정부, 의료인, 국민이 함께 만들어가고, 노력해가는 것이 공공을 위한 의료의 시작과 끝”이 된다(경문배, “공공을 위한 의료”, 〈법률신문〉, 2020년 8월 6일).
농민들은 생산활동을 통해 얻은 농산물을 판매하여 소득을 올려 생계를 유지한다. 이것은 농업을 산업적 측면으로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폭넓은 관점에서 보면 농민들의 생산활동은 공공재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고 판매는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농민과 농업에 공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국민에게 공공재인 식량을 공급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유지하며 인간이 발생시킨 탄소를 저장하는 등 농업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농업의 다원적 기능 또는 가치라 부른다. 그래서 선진국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런 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증진시키면서 산업으로서의 농업을 유지할 방안을 모색하는 농정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2019년에 농업분야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고,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설립 이래 최초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지위로 변경된 한국의 정부는 농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한국 농정은 농업을 산업적 측면으로만 바라보았고, 신자유주의 논리에 뿌리를 두고 수입농산물과의 경쟁을 끊임없이 부추겼다. 수입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이기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를 세뇌하면서 농업에서 농민 개개인의 사적 영역을 극대화하며 규모화와 효율성 추구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다수의 농민을 배제하고 몇몇 규모화된 농민만을 위한 것이었고, 거기서 나온 성과로 치장된 농정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농가소득 상위 20%와 하위 20% 사이의 격차가 11배 가까이 벌어지는 극심한 양극화이다.
이것이 지금 한국 농업의 모습이다. 이로 인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농민층 분해, 농민 양극화는 지금의 농업정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19년 농가경제 실태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1분위) 농가보다 상위 20%(5분위) 농가의 소득이 11배 가까이 많다. 2019년 4분기 기준 도시노동자 가구의 소득 5분위 배율이 4.4배인 점을 감안하면, 농가 간 소득 불평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농가 간 소득 양극화뿐만 아니라 도농 간 소득 격차 또한 계속 벌어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통계청 원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9년 도시가구 소득 대비 농가소득 비율은 62.2%를 기록했다. 도농 간 소득 격차는 1995년 96%로 거의 비슷했지만, 2000년 80.5%로 떨어지더니 최근 들어 60%대까지 추락했다.
결국 지금까지의 농정은 도농 간 소득 격차를 2배 가까이 벌려놨고, 농가 규모화 등을 통해 농가(농민) 간 소득 격차도 최대 11배 벌어지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농산물을 판매해 얻는 농업소득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수입농산물은 국내시장을 잠식해서 사료를 포함한 식량자급률은 21% 수준이다(참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식량자급률 평균은 102% 정도이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코로나19로 식량의 수출, 수입이 중단되어 식량공급체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더욱이 기후위기로 인해서 세계 곡물 생산량이 감소되었고, 곡물 가격 상승이 초래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2020년 쌀 생산량, 채소작물 생산량이 감소하여, 우리는 현재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식탁물가를 경험하고 있다.
작년 6월부터 시작된 국제 곡물 가격 상승은, 오늘날 식탁의 5분의 4를 수입농산물로 채우고 있는 한국 국민에겐 당장의 식탁물가 폭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급한 현안이다. 2020년 잦은 강우와 냉해로 급감한 농업 생산량은 실제 식탁물가의 요동을 가져오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각종 언론들은 “신선품에서 가공품까지 식탁물가 대란”이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발생한 우리 농촌의 일손 부족 현상도 기존 신자유주의 농정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농촌의 일손 부족은 농촌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심각해져왔는데 (불법)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한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국가 간 이동이 제한되자 2021년 농번기 때 우리 들녘은 최악의 인력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촌 일손 부족은, 신자유주의 농정의 핵심인 규모화를 통한 가격 경쟁력 확보라는 전략이 이제는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가격이 떨어져도 생산면적을 더 늘려서 떨어진 가격만큼을 보전하면 된다는 인식이 농민들 사이에 팽배했다. 하지만 8~9만 원 하던 하루 일당이 1~2년 사이에 12~15만 원으로 뛰어버린 현 상황에서 규모화로 비용 상승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곧잘 창궐하는 시대에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에 기대서 생산면적을 늘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서 국가가 개입해 농촌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농업의 지속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정말 간단하지만 있다. 국민에게 필요한 식량에 대해서 생산기반을 유지하게끔 하고 생산된 식량을 국민에게 공급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면, 거기에 추가하여 식량생산에 필요한 작업을 코로나19 등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을 농촌으로 유입시켜 맡도록 하면 어떨까? 도시에서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생활기반을 정부에서 마련해준다면 농촌 일손 부족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농촌으로의 인구 유입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정말 간단한 국가의 역할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국가는 지방정부의 역할로 떠넘기고 있고, 보여주기식 정책만 있을 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질서는 블록화되고 지역화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조건 없는 자유무역으로 세계의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다는 케인스 그룹과 WTO의 논리는 무너지고 말았다. 전 세계는 서둘러 자국 농산물을 자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몰락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농업을 여전히 얽매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국민에게 지속가능한 식량공급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자국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으면 국가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농업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이동제한 등으로 국내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요 곡물에 대한 수출 제한을 내리는 국가들이 나타나고 있다. 작년 3월 팬데믹의 불안감이 증폭되던 시기에는 세계 최대 밀가루 수출국인 카자흐스탄이 밀가루와 더불어 설탕, 감자 등 주요 식품에 수출 제한령을 내렸다. 또한 중국, 아프리카, 필리핀에 대한 주요 쌀 수출국인 베트남도 일시적으로 쌀 수출을 중단해 전 세계의 식량공급망에 부담을 줬다. 2021년 현재에도 러시아 등 일부 수출국은 수출관세를 도입했고, 아르헨티나 등 일부 국가는 쇠고기 수출 금지를 논의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 네슬레와 코카콜라 등 다국적 음식료품 회사들이 가격을 인상하면서, 곡물 가격의 급등이 세계적인 식품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2021년 6월에 발표한 5월 월간 식량가격지수 상승률은 2011년 9월 이후 최고치이다. 세계 식량 가격의 상승은 특히 수입에 의존하는 가난한 나라들의 식료품 가격 인플레이션을 가중시키고 있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론들은 매일 장바구니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고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연초부터 각종 음료수 가격을 비롯해 식탁물가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두부, 즉석밥, 통조림 등 가공식품의 가격이 큰 폭의 상승세를 보인 데 이어 최근에는 라면도 버티지 못하고 가격인상을 결정했다며, 언론에서는 급등하는 밥상물가로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한편 언론은 폭염과 집중호우 등 기후위기에 따른 농산물 생산량 감소가 원인이라는 언급은 하지만, 한국 식료품의 주원료인 밀의 경우 자급률이 0.7%밖에 안되는 것과 같은 한국 먹거리의 본질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식량안보와 관련해서는 한국정부와 주류 학자들은 케인스 그룹의 논리(자유로운 농산물 수출을 통해 식량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작년 3월,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정부대책으로 나온 것도, 한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외국의 농장에서 수입을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국경폐쇄 등으로 이동이 제한되어 발생할 수도 있는 식량위기에 대응한다는 대책이 그 정도니, 값싼 외국농산물을 수입해서 국민에게 식량으로 공급하면 된다는 인식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는 더 있다. 올해 초에는 옥수수 등 일부 품목의 관세를 12월까지 0%로 하기로 하고 신속하게 반입하기 위해 선체 내 검역을 허용하는 등 검역주권을 포기한 사례가 있다. 이렇게 한국정부의 대책에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 물론 당장의 현실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자급률을 올릴 것인가에 대한 대책은 전혀 제시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정부 관료들이 이렇게 농업을 무시하고, 소멸해가는 산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2020년 발표한 한국판 뉴딜에서 그린뉴딜은 친환경·저탄소 등 그린경제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내용은 전혀 포함시키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러시아를 비롯해 몇개 농산물 수출국들에서 수출관세를 도입하여 자국의 농산물 공급에 안정을 도모한다는 언급을 하였다. 만약 자급률이 0.7%밖에 되지 않는 밀 생산량이 급감하여 밀 수출국들이 수출을 중지한다면 그때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런 상상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정부는 어떠한 변화된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에게 안정적인 먹거리를 공급하는 것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다. 자급률이 낮은 원인을 찾아 식량의 자급률을 높이는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기본역할이다. 자국 국민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를 간섭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부는 좀더 적극적으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농민기본법과 먹거리기본법
그러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공공농업으로의 전환이다. 이는 공동의 이익을 지켜가기 위한 모두의 과제이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책을 만드는 주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료가 중심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농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야 진정한 공공농업을 실현하는 정책이 나올 수 있다.
전농이 문재인 정부의 농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한 이유는, 바로 현장과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농정의 기본방향이 경쟁과 규모화, 효율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현장의 목소리는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를 보고 성과를 논해야 하는 관료 입장에서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는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이 무너지면 결국 피해는 국민의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먹거리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역할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먹거리를 공공재로 인식한다. 서유럽에서는 폭우로 1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동토 시베리아가 펄펄 끓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한 기후위기의 결과물이다. 기후위기에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농업이다. 그리고 농업이 붕괴되면 식량위기에 직면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식탁의 5분의 1만을 자급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극심한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농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공공농업이다.
전농 등 농민단체들은 공공농업으로의 전환을 통한 식량주권 실현을 위해 농민기본법 제정과 먹거리기본법 제정 운동을 전개할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현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6조 1항에 명시되어 있는 “시장경제 원리를 바탕으로 한 효율성”이라는 내용은 신자유주의 농정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농정으로는 농업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없다. 더욱이 세계는 식량 생산과 공급에 있어 자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코로나19와 급격한 기후위기에 맞서 세계, 특히 선진국들은 자국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여낼 수 있는 정책으로의 전환을 급속히 진행하고 있다. 유럽연합 2021~2027 공동농업정책(CAP) 개혁안을 살펴보면, 2003년 폐지했다가 2014년 부활시켰던 생산연계직불금을 이번에 더 확대하고 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생산량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농장에서 식탁까지’ 전략처럼, 농업부문의 그린딜은 단순히 환경친화적 농축산물을 생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축산물의 1차 생산 과정에 추가하여 가공·유통 과정의 환경친화성을 높이고 소비자가 이러한 환경친화적 농식품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관련된 생산·가공·유통 주체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농민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고, 식량 등에 있어 생산과 공급에 대한 국가의 책임감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개방농정의 효율적 정착을 위한 제도인 현재의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인 농민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농민기본법’과 먹거리 공급에서의 국가의 역할을 규정하는 ‘먹거리기본법’을 새롭게 제정해야 한다. 이렇게 제정된 두 축의 기본법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농정을 공공농업을 위한 농정으로 전환시켜 식량주권을 실현할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