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훈 지음
《동네 의사와 기본소득》(루아크, 2020년)
노동의 가치
3년 전 춘천환경사업소 김 지부장이 단식을 시작한 지 16일째 되던 날, 장기간의 단식으로 인해 건강 상태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농성장을 방문했다. 환경사업소는 춘천시의 모든 쓰레기를 분리, 종합 처리하는 시설이다. 김 지부장은 환경사업소의 민간위탁 철회와 춘천시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 중이었다. “어제 체중을 재보니까 1킬로가 늘었어요. 옆에서 체중계를 보고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위원장님! 몰래 어디서 뭐 먹는 거 아녜요, 하더라고요. 하하하.” 진료가 끝난 늦은 저녁시간에 시청 앞에 있는 천막 농성장을 찾아갔을 때 위원장은 이런 농담을 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물어보니 실제로는 단식 전보다 몸무게가 8kg이나 빠졌다고 한다. 몇달 전 집회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눈살이 쏙 빠지면서 없던 쌍꺼풀도 생겼다. 혈압을 체크해보니 고혈압 범주의 혈압이 나왔다. 전에는 혈압이 정상이었다고 한다. 단식이 장기화되면서 새벽에는 근육통이 생기고 장 기능에도 변화가 왔다.
‘요리는 농업의 마지막 단계’라는 말이 있다. 친환경 농산물은 그에 걸맞은 친환경 요리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 말은 요리하는 이를 큰 의미의 농부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날 밤, 시청 앞 농성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을 마주하면서 이 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농업의 마지막 단계는 요리가 아니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천의 쓰레기를 치우던 마흔여덟 명의 노동자들은 도시의 농부들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며칠만 안 버려도 집 안에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환경사업소의 쓰레기 처리장을 방문해본 지인은 겨우 몇 시간 있다 왔는데도 사흘간 몸에서 악취가 나고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농약병이 터지는 바람에 다섯 명이 병원에 실려가도, 쓰레기를 선별하다 주사 바늘에 찔리고 황산이 튀어서 화상을 입어도 쓰레기를 나르는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석면, 살충제 PHA, 농약 그라목손, 포름알데하이드, 다이옥신….
현장을 다녀온 예방의학과 교수는 “예방의학을 공부한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사업장을 가봤지만 이렇게 온갖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있는 현장은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그런 곳에서 마흔여덟 명의 노동자들이 춘천의 모든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최저임금에. 그것도 그중 일부는 받지도 못했다. 이런 부당한 대우에 저항했던 노동자들에게 회사(한라산업개발)와 시청은 계약 해지를 통보했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이 넘는 시간을 길바닥에서 농성하며 버터내고 있었다.
환경사업소에 내 가족이 일하고 있다면 나는 그 일을 계속하라고 했을까? 돌아오는 길에 나를 따라온 질문이다. 나는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복직되길 기원한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가족이라면 말렸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이들은 일을 하겠다고 한다.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눈물 나는데 한라산업개발은 노조원들을 거리로 내쳤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에 가장 높은 노동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의사보다 환경사업소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도 있는 사회가 정상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 노동에 대해서 이따위로밖에 대접을 못하는가라는 울분이 솟아올랐다. 비정상도 만연하면 정상으로 여겨진다.
노동자들이 시의 공무원들에게 그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시가 노동자들에게 그 일을 계속해달라고 애원하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시청의 관료들이 제발 일을 해달라고 노동자들에게 애원하는 집회를 하고 노동자들의 집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는 세상.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고임금을 주고, 그마저도 기본급의 65%만 지급하는 게 아니라 650%의 보너스를 지급해서라도 그 일을 해달라고 노동자들에게 애원하는 세상은 너무 혁명적일까. 이렇게 겨우 정상이 되는 것을 혁명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혁명은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 사회는 손바닥이 뒤집힌 사회다. 비정상적으로.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위에 있고 위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래에 있다. 뒤집힌 손바닥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 전복을 위해 필요한 일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 되면 하기 싫은 일을 누가 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 어렵고 힘든 일은 기피하게 될 것이다. 나는 기본소득이 주는 최대의 이득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는 기피할 수 있는 힘, 일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사업주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지 않는 것은 그 일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이 노동시장에 널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너희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아”라는 믿음이 ‘너희’를 함부로 대하게 한다. 충분한 기본소득이 된다면 산업예비군은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 그러면 열악한 작업환경의 사업주는 자본을 투자해서라도 환경을 개선하려 할 것이다. 일하기 힘든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저절로 올라갈 것이다. 춘천환경사업소 노동자들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어떤 변화가 올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그 사회에서는 자연스레 계급과 계층 사이의 격차도 줄어들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나뉘어 자갈길처럼 울퉁불퉁 처우가 차이 나는 노동계급의 상황도 모래사장처럼 고르고 더 평등하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모두가 혜택을 보기 때문에 조세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영세기업은 기본소득을 위해 낼 세금이 적으니 부담도 가볍다.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에 기본소득을 더해 충분한 소득을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임금이 적고 환경이 나쁜 직장을 그만둘 용기를 더 쉽게 낼 수 있다. 그만두겠다는 노동자가 많아지면, 일터에서 그들의 협상력은 강해진다.
“기본소득을 받으면 모두가 싫어하는 기피 업종 일은 누가 하겠는가?” 기본소득에 대한 반론 중 하나다. 화장실이나 찜질방 청소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그런 일자리는 더 높은 임금, 더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일할 사람이 생긴다.(61쪽)
우리들 각자가 서로 빚지고 있는 존재
아침에 일어나보니 길이 늘어나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길은 한여름에 엿가락 늘어지듯이 길게 늘어져서 애들 걸음으로 20분이면 가던 길이 한 시간 반이 걸렸다. 100년 동안 내릴 비가 간밤에 한꺼번에 와버린 듯 아랫동네는 모두 물속에 잠겼다. 큰아들놈이 놀던 골목길도 잠기고 함께 품앗이하던 이웃들의 집도 모두 물에 잠겨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물속에 잠겨버린 그의 동네를 소양호라 불렀다. “이 밑으로 걸어가면 시내까지 4km밖에 안 걸렸어.” 왕진 가서 만난 송 할아버지가 언덕 아래로 가리킨 곳에는 길이 아니라 호수가 있었다. 소양강댐이 만들어지면서 물로 덮인 곳이다. 댐이 생기면서 길이 사라졌고 이웃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는 데도 거대한 산 하나를 넘어야 했다. 날이 궂을 때는 옷을 두 벌 따로 챙겨 갔다. 길도 없는 산을 넘어갈 때 흙탕물에 젖어버리면 중간에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모두 시내로 유학 보낼 수밖에 없었다. 농사로는 꼬박꼬박 다가오는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부모들은 아이들을 따라서 하나둘씩 시내로 옮겨 갔다. 100여 가구가 있던 마을은 결국 대여섯 가구만 남았다. 지금은 도로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소양호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도 춘천 시내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예전에는 걸어서도 30분이면 갔던 곳이다. 그럼에도 수몰된 지역은 아니어서 보상은 없었다. 할아버지 내외도 시내까지 혈압, 당뇨약을 타러 간다.
춘천은 소양강에 기대어 사는 도시다. 한 해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춘천에 찾아오는 것도 아름다운 강과 호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호수 밑에 잠겨 있는 삶에, 예를 들면 송 할아버지에게 우리는 어떤 대가를 지불했을까. 지불은커녕 그런 삶이 있는 것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춘천에 10년 넘게 살았고 매일 강으로 산책을 나가면서도 단 한 번도 그 물속에 잠겨 있는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나도 예외일 수 없다. 자본주의는 정확하다. 땀 한 방울, 일분일초를 돈으로 환산해 계산한다. 하지만 자본이 고려하는 것에 한해서만 그렇다. 소양강은 처음부터 저런 모습으로 저기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할아버지의 삶을 삼키고 저리 흘러가는 것이다. 매일 소양강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나는, 그리고 소양강에 기대어 사는 춘천시민들은 할아버지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과 같다.
대기, 하천, 강, 바다, 산, 땅은 지구인 모두가 나누어 쓰고 후대에 물려줘야 할 환경이자 자원이다. 그 위에서 공장은 상품을 생산하고 사람들은 이윤과 임금이라는 형태로 소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을 기본소득은 ‘공통부’라고 부른다. 공통부란 우리 모두에게 속한 재산이나 자원, 유산을 뜻한다.…우리가 사회를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공통부에 대해 모두에게 똑같은 청구권이 있기 때문이다.(50~51쪽)
수면 위의 삶만 계산하는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은 역사학이다. 주고받는 것을 정확히 계산하는 자본주의의 장점은 왜 역사의 영역에서는 발휘되지 않고 퉁치고 넘어가는 걸까. 이제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으나 당연히 고려해야 했던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하고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것이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공짜로 주는 게 아니고 필요해서 주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시애틀 추장의 정신에 대한 자본주의의 뒤늦은 대답이다. 자본주의가 원래 정확히 계산에 넣었어야 할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돌려주는 당연 배당이다. 공짜로 누리는 이들은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본소득이 없는 세상에서 이 세상의 부를 독점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기본소득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자연과 사람, 과거 혹은 동시대인들에게 우리들 각자가 서로 빚지고 있는 존재라는 진실을 이제야 사회가 발견했단 뜻이다. 빚은 갚아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그 행위가 기본소득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우리들의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구성할 것이다. 기본소득을 받는 우리는, 기본소득 이전의 세계에서는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개인은 공동체에 더 겸손해질 것이고 한 종으로서의 인간은 자연에 대해 더 겸손해질 것이다. 기본소득 이전의 사회에서 개인은 종종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 사회와 타인은 늘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사회에서 개인은 근본적으로 수혜자가 되며 사회와 대립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내면의 힘이야말로 기본소득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발명된 것이 아닌 발견된 것
이 책의 필자는 책을 쓴 이유가 기본소득이 “진료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의 사연을 시발점으로 기본소득에 관해 흔히 하는 질문들에 대해 쉽고 설득력 있게 답한다. 저자가 인용하는 수많은 통계들은 그의 주장이 구체적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성실히 증명한다. 다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는 이야기의 구체성이 너무 빨리 사라진다는 게 좀 아쉽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일반화된 개인들이다. 그 개인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빠르게 기본소득 이론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그 개개의 이야기는 개별적인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기본소득을 설명하는 예시로 자주 기능한다. 예를 들어, 만성 콩팥질환을 앓고 있는 할머니가 독감에 걸린 걸 확인하고 응급실로 전원된 이야기가 그렇다. 할머니는 응급실에 갔을까? 그는 왜 만성 콩팥질환이 있음에도 투석을 하지 않은 걸까? 그런 의문들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지만 지은이 자신도 책에 썼듯이 답변을 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가 대진의이기 때문에 환자―의사 관계의 지속성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한계는 진료실이라는 공간의 특성에서 온다. 진료실은 이야기가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공간이다. 환자가 “제가요…”로 얘기를 시작하려하면 벌써 처방이 완료되어 나가야 하기 일쑤다. 그렇지만 그런 한계 속에서도 그의 글은 빛난다. 특히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엄마에게 정녕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라고 묻는 장면은 오래 마음속에 남는다.
거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본다. 미세먼지로 멀리 삼악산이 뿌연데도 앞집 할아버지는 오늘도 쓰레기를 태운다. 창문을 열어보니 매캐한 냄새가 들어와 창문을 닫는다. 건너편 차도로 빠라빠라빠라밤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꽉 닫은 창문의 틈새를 뚫고 미세먼지와 더불어 새 들어온다. 어쩔 수 없이 이곳이 내가 사는 세상이다. 아주 단단히 문을 잠가도 내 삶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함께 사는 세상이다. 우리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어디에서 만나는가. 모든 곳에서 만난다. 매일 만난다. 어쩌면 매 순간 만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이 없는 곳에서 사는 삶 자체가 기본소득이 필요하단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고통을 만나는 순간, 분노를 느끼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순간, 모르는 타인을 경계하는 순간, 일을 쉬는 게 불편한 순간, 모처럼 쉬면서 벤치에 앉아 따듯한 햇볕을 쐬며 김밥을 먹는 순간, 집 앞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를 보는 순간 그리고 오늘처럼 함께 사는 것이 다른 의미를 갖는 세상이 그리운 순간… 그 모든 순간에 기본소득은,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사람이 내쉰 공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듯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살아있는 삶이 물속에 잠겨 있는 한, 그 삶이 토해내는 공기의 다른 이름이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이미 왔어야 한다. 숨을 쉬기 위해. 살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절박하게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