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부터 온갖 매체를 통해서 알고 싶지 않은 뉴스가 전해진다. 극히 흉악하다거나 끔찍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기괴하다고 해야 할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도처에 만연한 부패와 윤리적 타락도 이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일’로, 어느새 크게 지탄받을 일도 수치스러운 일도 아니고, 단지 나한테 기회가 안 주어져서 배가 아픈 일로 치부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투기판이 되어가는데 나만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돼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 각자의 내면은 날로 피폐해지고, 일상은 적의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세계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는데, 인간사회인들 온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일지 모른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결국 사람과 사람, 그리고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을 대하는 태도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일 테니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혹은,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나갈 수 있을까? 《녹색평론》이 비교적 초창기부터 현대의 통화제도, 금융시스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지역통화, 은행의 신용창조, 기본소득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현대화폐이론(MMT) 등을 소개하면서 ‘돈’과 금융체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노력해온 것은, 무엇보다 오늘날의 사회적·생태적 위기의 뿌리에 금융통화제도의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화폐가 거의 전적으로 은행대출, 즉 부채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빚은 원금과 함께 이자를 붙여서 상환해야 하는데, 이 이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로서 미래의 노동, 자원, 생산을 담보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사회적·문화적·생태적 희생이 수반된다고 할지라도 세계경제의 가차 없는 성장, 확대가 끝없이 요구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실로 낭비적인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 그리고 지구 생물권과 인간사회에 가해진 가공할 폭력을 염두에 둔다면 범죄적이라고나 해야 할 과잉 생산과 소비를 멈추게 하고자 한다면, 금융통화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에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그렇다면, 성장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이러한 금융체제가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공식적 경제의 고작 2~3%가 실물경제를 반영할 뿐이고 나머지 거의 모두가 투기적 카지노경제로 쏠려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경제성장을 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실체(인간(노동), 토지(자원), 자본)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실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2008년 월가 금융파산 사태로 눈에 띄게 분출되었지만, 각국 중앙은행의 (헛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는 전 세계 불황의 배후에는 2006년 피크오일(국제에너지기구(IEA)도 2010년 보고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이후 석유생산이 갈수록 경제성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이다.
물론 기후재앙이라는, 현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을 증언하고 있는 외면할 수 없는 현안도 있다.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 제로(‘탄소중립’)를 달성하기 위한 중간단계로서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역내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종래의 40% 감축목표보다 상향 조정하여 55%까지 줄이겠다고 합의했다(미국은 2005년 대비 50%에서 52%로 상향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그 수준이 기후위기를 막는 데 충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적어도 인류사회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몰려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화석연료가 우리를 죽이고 있다, 하루빨리 청정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초점이 조금 빗나간 것 같다. 단순히 화석연료에서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여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기후재앙도, 경제위기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본지 169호(2019년 11―12월) 참고).
최근에 발표된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2050년에는 10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는 세계인구 모두가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60% 적은 수준으로 충분하다(Joel Millward―Hopkins et al., “Providing Decent Living with Minimum Energy: A Global Scenario”, Global Environmental Change, Vol. 65, 2020).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needs)를 위해선 충분한 곳이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greeds)에 대해서는 극히 불충분한 곳”이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우리가 진정한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성장이 아니라 자족의 경제일 것이다.
세계적 금융·통화 전문가 베르나르 리에테르가 지적한 대로, 근대 경제학이 만들어낸 희소성에 대한 두려움과 탐욕은 경쟁적·약탈적 통화체제 아래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증폭된다. 우주의 풍요로움에 대한 믿음이 결핍되었을 때 우리는 거액의 은행계좌를 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숫자가 많이 찍혀 있는 은행계좌가 제공하는 ‘안정’과 ‘자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구 위에서 이웃과 함께 인간으로서 정의롭고 품위 있게 살아가기 위한 다른 모든 조건을 대가로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이 문명의 지속가능성은 우리 모두가 ‘대량 생산―대량 소비’라는 단 하나의 맹목적 원리로 작동하는 거대한 성장기계의 부속품이 되기를 강요하는 구조를 무너뜨리는 일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출발은 금융통화제도의 혁명적 개혁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