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네 유타카 지음, 김형수 옮김
《농본주의를 말한다》(녹색평론사, 2021년)
우네 유타카,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어릴 적 이름은 나가후지 유타카(永藤豊)였는데, 아내와 결혼하며 아내의 성을 따서 우네 유타카(宇根豊)가 됐다. 흔히는 아내가 그렇게 하는데 왜 그는 그 반대로 했을까?
1950년생이다. 우네는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던 1989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농사를 짓는 농부다. 한편 ‘농사경험을 사상화하고 표현하는 일에 생애를 건’ 농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공저까지 합쳐 50권에 가까운 책을 쓴 저술가이기도 하다. 혼자 쓴 책만 스물세 권이다. 한국에는 《즐거운 논학교》가 소개돼 있다. 농학 박사이자 도쿄농업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1973년부터 후쿠오카현 농업개량보급원으로 일했고, 퇴직은 2000년에 했다.
우네는 1978년부터 시작한 저농약 벼농사 운동으로 유명하다. 그는 농부 스스로가 논 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논 생물 조사판’을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저농약 벼농사를 기술화하고, 이론화해서 보급하는 데 힘썼다. 그것은 관 주도로 이루어지는 소위 스케줄 농약 산포 방식(병해충의 발생 여부나 피해 확인 없이 정기적으로 농약을 치는)을 과학적으로 비판하며 농부 스스로가 농약 산포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실천적 사회변혁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네는 나아가 논에는 해충도 아니고 익충도 아닌 벌레도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1984년의 일이었는데, 그는 그 벌레들을 ‘그냥 벌레’라 이름 지었다. 그 뒤 그 이름은 널리 쓰였고, 마침내는 학술 용어로까지 정착되는 데 이르렀다. 우네는 논 생물 조사를 통해 거의 모든 고추잠자리가 논에서 태어나는 것도 발견했다. 1990년대의 일이었는데, 그것은 농사는 작물만이 아니라 생물과 환경도 생산한다는 걸 뜻하는 큰 발견이었다. 이런 깨달음에 바탕하여 우네는 벼만이 아니라 생물도 키우고 환경도 아름답게 만드는 이른바 ‘환경 벼농사’의 세계를 기술화하여 보급했다.
2000년대에는 퇴직과 함께 만든 ‘농(農)과 자연 연구소’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일을 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논 생물 조사 방법을 개발하고 보급했다.
- 농사는 먹거리만이 아니라 ‘자연환경까지 생산한다’는 사실 위에서 ‘환경직불금’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 논 생물과 밥 한 그릇의 관계를 수치화하고, 나아가 그림으로 그리는 데 성공했다. 이 그림은 우네의 그림으로 도안화돼서 현재까지 수십 만 매 이상이 판매되고 있다.
- 논 생물(동물, 식물, 미생물) 5,668종의 목록을 작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뒤 그의 관심은 그 모든 것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농본주의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물로는 이 책 《농본주의를 말한다》를 비롯하여 《농본주의가 미래를 연다》 등이 있다.
농사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
우네가 마침내 다다른, 인류의 미래라 여기는 농본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우네는 그것을 농사와 농업의 차이로 말하고 있다. 우네는 농사가 산업화, 근대화, 자본주의화하며 농업이 됐다고 본다. 우네에 따르면 농사의 근대화란 곧 농사를 자본주의화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세계관의 변화다. ‘다수확’, ‘생산성’ 등이 중시되며 천지자연이 주역이었던 전근대 농민들의 세계관이 근대를 지나며 인간 중심으로 바뀐다. 예를 들면 근대화는 해충이라는 개념을 몰랐던 농부들에게 방제·구제라는 발상과 사고법 및 기술을 가르쳤다. 그것은 자연의 제약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극복하고, 돈이 되도록 생산을 늘리는 것이 농업의 사명이라는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둘째는, 경영이나 경제 개념의 침투다. 농사가 농업이 되며 무엇이나 돈을 중심으로 보는 발상법이 시골에도, 농부에게도 스며들었다. “경영노력이 부족하다”, “경영능력의 향상이 과제다”라는 말들을 농부들도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됐다. 농사가 ‘경영’하는 것이 되며, 농업경영은 소득이나 이윤의 액수로 평가되고 비용과 생산성으로 측정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셋째는 그에 따른 풍경의 변화다. 논밭은 물론 산천도 보기 흉하게 변했다. 논 생물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예를 들면 흔하던 고추잠자리와 제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논에서 자주 눈에 띄는 동물 150종 중 69%에 해당하는 103종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풍경만이 아니다. 날개 없는 무당벌레, 벼의 지하실 재배, 무인 트랙터 개발과 같이 농업은 천지자연에 부담을 주는 방향으로 서슴없이 나아가고 있다.
넷째는 먹거리 오염이다.
다섯째, 그래서 행복지수가 올라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 밖에도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다시 말해 농사가 농업으로 바뀌며 바뀐 것이 많지만 그만하고 이 책의 주제인 농본주의로 돌아가자.
우네에게 농사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농사란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천지자연을 지키고, 마을공동체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농업은 농사 중의 한 부분, 곧 돈이 되는 부분이다. 곧 농사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게 우네의 견해다. 우네는 농사를 ‘천지자연에 떠 있는 커다란 배’라고 비유하며, 농업은 그 배에 올라타고 있는 작은 한 부분이라고 본다.
농사는 천지자연에 떠 있는 배
우네는 우리가 모두 타고 있는 이 배를 천지유정 공동체라 부르기도 하는데, 천지는 유정, 곧 목숨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뜻에서다. 그러므로 농사에서는 경제, 경영만이 아니라 유정, 곧 모든 목숨 있는 것들 또한 생각해야 한다. 천지자연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만을 은혜로 주는 게 아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 예를 들면 고추잠자리, 풀숲에서 올라오는 여름철의 후끈한 열기, 먹지도 못하는 뱀딸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좋다.
우네는 이어 말한다.
“우리는 오직 천지자연의 품 안에서만 생명의 안락한 고향을 찾을 수 있다. 땅은 생명의 근원이다. 땅을 망가뜨리는 자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천지자연의 품에 안겨서 산다.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천지의 은혜에 감사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감각이다. 사람도 천지자연의 일원이라는 감각이야말로 농사의 본질이다.”
우네는 농업기술로 수확량이 늘어났을 때 그 기술이 천지자연에 부담을 주지는 않았는지, 해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부담이나 해침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일에도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런 기술은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물론 그 아래의 천지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농본주의란
농본주의란, 다시 말하지만 농사를 ‘농업’이 아니라 ‘농사’로 보는 관점을 되찾는 것이다. 농업은 농사의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농사의 전부로 만들어온 것이 근대 자본주의였다. 그러므로 근대화란 ‘농사의 농업화(산업화)이자 자본주의화’였는데, 그 차이를 우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는 농본주의의 눈이고, ( )는 자본주의의 눈이다).
‘소득’은 [농사에 대한 평가의 일례]에 불과했는데, (농업 가치의 대부분)이 되었다.
‘노동시간’은 [시간을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것이었는데, (좋은 노동의 기준)이 됐다.
‘이윤’이 생기면 [천지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이 온당했는데,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수)로서 자기 소유로 취한다.
‘생산비용’은 [천지자연에 대한 감사]였는데, (적은 편이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수확량’은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양]이었는데, (농업기술의 성과)가 됐다.
우네는 말한다.
“농민이 가장 행복을 느낄 때는 천지자연과 하나가 돼서 행복한지 어떤지조차 모를 때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상태로, 자아실현과는 조금 다른 세계다. 농민의 관심은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천지자연에 대해서다. 예를 들면 올챙이가 평년보다 적으면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다음 해에 정상으로 돌아오면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왜 그럴까?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네는 료칸이란 승려의 시로 소개한다.
세상에 남길 것 무엇이 있을까.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 산에는 두견새 울고,
가을에는 단풍이 질 뿐이네.
이 책을 읽고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린 고 김종철 선생님이 어느 날인가 혼잣말처럼 하셨던 말이 기억난다. “나는 일본에 부러운 것이 딱 한 가지 있어요. 일본에는 옛날부터 뛰어난 농사상가들이 있었잖아요? 그들은 농부였지만 공부가 깊었지요. 혜안을 가진 현인, 철인이었지요. 대학이나 연구소 쪽 사람들은 그들에 견주면 아기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소개한 책을 일본에서 찾아보고 그런 것이 있으면 한국에 소개를 했으면 좋겠어요. 없다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그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 눈에는 우네도 그 현인 중의 한 사람이다. 저농약 벼농사 운동에서 농본주의까지의 그의 삶은 현인, 혹은 예언자로서의 삶으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또 한 사람의 뛰어난 농사상가인 니노미야 손도쿠(二宮尊德)의 다음과 같은 시가 소개돼 있다.
소리도 없이 향도 없이
천지는 늘 쓰이지 않는 경전을 되풀이할 뿐
천지가 곧 경전이라는 얘기인데, 그 경전을 읽기에는 농부가 가장 좋을지 모른다. 시골살이, 혹은 농사는 늘 천지자연을 봐야 하므로 철인이 되기에 가장 뛰어난 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도 귀농운동 덕분에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지닌 이들이 꽤나 많이 시골살이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 그들이 틀림없이 큰일을 해낼 것이라 보는데, 그들이 이 책을 꼭 봤으면 좋겠다. 작년부터 전 세계 인류가 고통을 받고 있는 돌림병 코로나19도 근본적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농본주의로의 귀환 말고는 풀 길이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서양 선지식이 쓴 책 《성장의 한계》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이 한 말도 한마디로 줄이면 이것 아닌가? 사람의 건강은 천지자연의 건강을 떠나서는 얘기할 수 없다는. 이 책도 같다.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다음과 같다. “바보야,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천지자연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