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수 사건과 은폐의 공식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오염수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사고 당시부터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는 오염수 중 일부는 원전 부지에 보관 중이다. 엄청난 양의 보관된 오염수의 처리방식을 두고 일본정부는 그동안 논의를 해왔지만 결국 해양방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를 두고 우려를 감추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이 시점에 국내에서는 또다른 오염수 사건이 발생했다. 경주 월성원전의 오염수 사건이다. 원전 지하와 주변 지하수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지하수가 다량 발견되었으며, 이를 두고 논란이 진행 중이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왜 이렇게 사고가 발생하면 대부분 오염수가 문제되는 것일까? 그것은 원자력발전소의 구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는 물을 끓여서 이 수증기의 이동하는 힘으로 증기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하는 설비를 말한다. 즉, 원전은 화력발전소의 일종으로 물을 끓이는 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설비이다. 당연히 많은 물이 사용된다. 원자로 내부와 증기발생기 사이를 왕복하는 1차수, 증기발생기에서 열을 얻어서 수증기로 변하는 2차수, 이 수증기를 식혀서 다시 물로 바꾸는 막대한 양의 냉각수, 그 외에도 여러가지 공정에 다양한 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는 큰 강가나 바닷가에 건설되는 것이고, 사고가 발생하면 거의 항상 오염수가 발생하게 된다.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원자로 자체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원자로 내부의 물(1차수)이 모두 빠져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핵연료가 녹아버렸기 때문에 방사성물질과 1차수 사이의 차단벽을 이루는 핵연료봉 역시 녹아버렸다. 당연히 초고농도의 오염수가 발생했고, 이 물은 대부분 바다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사고 이후에는 녹아버린 핵연료를 계속 식혀야 했기 때문에 물을 계속 부었고, 이렇게 새롭게 발생한 오염수 중 일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부지에 사고 이후 만들어진 수많은 거대한 물통들이 바로 이런 오염수를 저장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월성원전 4기의 지하에서 고농도의 방사능 오염수가 발견되었는데, 원전 당국(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은 이 오염수가 어디에서 발생되었는지, 그 양은 얼마인지, 얼마나 퍼졌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지 적어도 8년 이상 지났지만 기본적인 정보조차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러저러한 가능성들만 전문가들에 의해서 언급되고 있을 뿐 정작 책임 있는 당국의 설명은 아직 없다. 현재까지 조사단을 꾸리겠다는 원칙만 합의된 상태이다.
원전에서의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면 항상 따라오는 것이 원자력계의 은폐 시도이다. 후쿠시마 핵사고의 당국, 즉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은 후쿠시마의 오염수에 대해서 정보 은폐의 의혹을 사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전 당국도 오염수 사건에 대해서 은폐의 의혹을 사고 있다. 원전사고의 공통점은 방사성물질에 오염된 공기와 물에 대한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이건 한국이건 어떤 나라이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양국의 원전 당국이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이들은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오염수의 위험을 은폐한다. 일본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일본정부는 후쿠시마 핵사고에서 발생된 오염수의 총량, 핵종별 방출량을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다. 현재 보관 중인 오염수에 관해서 언론에 보도된 내용도 마찬가지다. 일본정부의 발표를 보면 마치 그 막대한 양의 오염수가 모두 정화가 되어 삼중수소를 제외한 다른 방사성물질은 대부분 제거된 것처럼 발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염수 제거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는 언론보도는 그동안 수도 없이 많았다. 정작 필요한 정보는 은폐한 채 “인체에 큰 영향 없다”라는 결론으로 직행하고 있다. 전형적인 은폐 방식이다.
한국의 원전 당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원전 하부에서 “삼중수소가 고농도로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감마핵종도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어법인가? 감마핵종은 세슘을 비롯한 여러가지 방사성물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삼중수소뿐 아니라 여러가지 방사성물질로 오염된 물이 발견된 것인데 이 사건을 ‘삼중수소 누출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사건의 이름을 정할 때부터 은폐가 시작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사건은 당연히 ‘오염수 누출 사건’이라고 불러야 옳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오자마자 한 원자력 교수는 삼중수소의 인체 영향은 멸치 1g 정도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후 당국은 이러한 황당한 발언에 대해서 가타부타 설명이 없다. 이 교수와 발언 내용에 동의하는 것으로 읽힌다. 방사성물질의 누출 사건이 발생하면 정확하게 누출량, 누출 경로, 확산 정도를 조사한 후 주민의 피폭량을 평가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건강영향을 평가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안전한지 위험한지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전 당국과 멸치를 언급한 원자력 교수는 이 모든 과정을 뛰어넘고 안전하다는 결론으로 직행하였다. 나는 이것이 바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은폐의 공식이라고 판단한다. 위험성 평가 과정을 뛰어넘어 안전하다는 결론으로 직행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공통의 은폐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원자력 안전성 평가 기준―피폭량
원전의 안전성 평가 방식은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다. 바로 인체영향이다. “원전에서 발생한 방사성물질이 인체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가 바로 원자력 안전 평가의 지표이다. 원전에서 방사성물질이 발생해도 인체에 영향이 없다면 아무리 고농도의 방사성물질이 환경으로 누출되었다고 해도 안전하다고 평가한다.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원전 당국이 반드시 언급하는 것이 바로 “인체영향은 미미하다”는 점인데 그 이유가 바로 원전 안전성 평가가 인체영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 원자력계의 안전성 평가 방식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적인 생물학이나 의학적인 관점에서 어차피 생물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비슷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조사하기 쉽고, 직접적인 관심사인 인체영향을 지표로 삼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방사능의 인체영향을 평가하는 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영향 평가는 객관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피폭량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숫자로 표시되는 피폭량과 인체영향을 조사하여 객관화시켜 놓으면 이후부터는 사고 때마다 피폭량만 조사하면 인체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피폭량과 인체영향의 관계를 정립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된다. 이 중요한 일을 맡은 기관은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라는 국제기구이다. 국가나 유엔과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국제기구이며 그 역사는 100여 년에 이른다. 이 기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들에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피폭선량 권장기준 등을 권고안으로 발표하고 있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ICRP의 권장기준 등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세계 의학계도 이 기구의 권장기준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ICRP는 1mSv의 방사선에 피폭되면 1만 명 중 1명의 확률로 암이 발생한다고 평가한다. 피폭량과 암 발생은 정비례하므로 만일 100mSv에 피폭되면 1만 명 중 100명에서 암이 발생한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현재는 피폭량만 알아내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암 발생 확률을 계산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만 ICRP의 연구는 현재도 진행 중이고, 지속적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을 반영하여 권장기준치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 100년쯤 전에는 인체의 피폭량 기준이 현재의 100배에 달하는 연간 1인당 100mSv였다. 그러던 것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피폭량 기준치가 낮아졌다. 방사선의 인체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더 적은 양의 방사선 피폭이 인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자연스럽게 권장기준치도 낮아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권장기준치는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ICRP의 피폭량 권장기준치는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주민들을 피신시켰는데, 그 피신 조건 역시 피폭량이었다. 피폭량을 계산하여 기준치 이상인 지역은 일본정부의 비용으로 피신을 시켰던 것이다. 물론 일본정부가 이 기준치를 20배나 높이는 바람에 비난을 사기는 했지만 피폭량을 기준으로 피난지역을 설정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 피폭량 기준치는 원전의 설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원전은 주변 주민들의 피폭량이 연간 1mSv를 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 기준치가 바뀐다면 전 세계의 모든 원전의 설계가 바뀌거나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ICRP는 어떤 방식으로 피폭량을 계산하는 것일까? 그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첫째, 원자력발전 과정에서 발생되는 방사성물질은 약 1,000가지 정도라고 한다. 그중에서는 불과 몇분 사이에 대부분 사라지는 종류가 많아서 이들을 제외하면 약 200가지 정도가 남는다. 이 중에서 유명한 것이 세슘, 스트론튬, 요오드, 삼중수소, 우라늄, 플루토늄 등이다. 원전사고에서 누출된 방사성물질(이하 핵종)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에너지가 다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고유 에너지를 핵종별로 계산해두었다. 이것이 바로 핵종별 선량계수이다. 더 큰 선량계수를 갖는 핵종은 더 큰 피폭량을 야기한다. 즉, 핵물질의 선량계수와 피폭량은 서로 비례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당연하지만 인체에 영향을 준 방사성물질의 양이 많을수록 피폭량은 증가한다. 그런데 방사성물질이 인체에 영향을 주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외부피폭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피폭이다. 말 그대로 방사성물질이 인체의 외부에 있으면서 방사선만 인체를 향하는 경우 외부피폭이라고 한다. 내부피폭 역시 말 그대로 방사성물질이 인체 내로 들어와서 그곳에서 하루 24시간 인체에 방사선을 쪼이는 경우를 의미한다.
셋째, 외부피폭의 경우에는 선량계라는 기계를 통해서 직접 측정이 가능하다. 원전 근무자들이 원전 내부로 들어갈 때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이름표처럼 생긴 기구이다. 그러나 내부피폭의 경우에는 이렇게 직접 피폭량을 측정할 수가 없다. 따라서 특별한 방식으로 내부피폭량을 계산해야 한다. 게다가 방사성물질 중에는 음식이나 호흡을 통해서 인체에 들어오는 종류도 있지만 인체 내로 들어오지 않는 것도 있다. 또한 인체 내로 들어온 물질들 중에는 빠른 시간 내로 배출되는 것도 있지만 평생 배출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방사성물질마다 분포하는 인체 내 장기가 달라서 위험성 평가에는 이런 사항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니 내부피폭량을 계산하는 데는 여러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는 것이다.
ICRP가 피폭량이 몇 밀리시버트인지 평가하는 방식은 이렇게 외부피폭량과 내부피폭량을 각각 계산한 후 이 둘을 더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ICRP의 방식을 따라서 피폭량을 계산하고, 이 피폭량을 근거로 인체영향을 평가하며, 이 인체영향을 근거로 그 사고의 위험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피폭량 계산 방식의 문제점과 그 영향
그런데 이러한 ICRP의 피폭량 계산법에는 몇 가지 큰 문제들이 있다. 이들을 모두 소개하기는 지면상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지적해야 될 것 같다. ICRP는 방사성물질의 위험성을 평가할 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각 핵종이 내뿜는 방사선만을 위험요인으로 인정한다. 핵종별 선량계수를 고려한 피폭량만을 위험요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에서 발생되는 핵종 중에는 인체에 들어온 후 방사선 이외의 피해를 일으키는 물질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우라늄은 인체 세포 내에서 유전물질인 DNA와 단단하게 결합하는 특징이 있다. 당연히 유전자의 변화나 기능저하 등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학적 특징이 일으키는 피해는 피폭량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또한 방사성물질 중에는 여러가지 중금속들도 포함되지만 이 물질들의 중금속으로서의 피해는 피폭량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게다가 우리 몸에서 유전자를 이루는 원소들, 즉 탄소, 수소, 질소 등은 핵종전환?이라는 기전을 통하여 유전자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만 이 역시 피폭량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현재 많은 과학계 인사들이 이 문제를 ICRP에 제기하고 있으나 ICRP는 아직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ICRP가 각 핵종들의 방사선 위험만을 피폭량에 반영하고 각 핵종들의 화학적인 성질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을 무시한 결과는 외부피폭량 계산에는 영향이 없으나 내부피폭량을 줄어들게 만든다. 이에 따라서 피폭량이 적게 계산된 결과 피폭량 결과와 역학조사 결과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ICRP의 피폭량 계산법은 영국 웨일스 지방 핵실험에 의한 피폭사고, 북부 스페인에 미쳤던 체르노빌 영향, 걸프전 참전 군인의 피해, 체르노빌 이후 유럽의 출산율 감소와 태아사망률 증가, 한국 원전 주변 주민들의 갑상선암 증가 등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등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방사성물질에 의한 피폭 사고가 있었고 이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ICRP의 방식으로 피폭량을 계산해서는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위의 사례들은 모두 ICRP의 피폭량 계산 결과로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너무 큰 건강영향이 있었던 사건들이다. 이렇게 ICRP의 피폭량 계산 결과와 역학조사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수많은 사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폭량은 직접 측정한 외부피폭량과 ICRP가 개발한 방식으로 계산된 내부피폭량의 합이다. 즉, 피폭량 중 내부피폭량은 분명한 이론치이다. 그러나 역학조사 결과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 결과이다. 과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만일 이론치와 실제 측정치가 다르다면 당연히 이론을 수정해서 실제 측정치에 맞추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수정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이 이론은 과학계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발생한 일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ICRP의 계산법은 실제 측정치인 역학조사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는데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학조사 결과를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모두 방사선 누출 사고에 의해서 주민들이 피폭되었고, 이후 많은 질병들이 나타났으나 계산된 피폭량이 적었기 때문에 피해가 인정되지 않았던 사례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하였다.
2011년에 공개된 원전 주변 주민들에 대한 암 발생 역학조사는 한수원의 출연금으로 20년에 걸쳐서 실시된 연구였다. 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원전 주변 주민들이 비교집단에 비해서 갑상선암 발생률이 2.5배 정도로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이것이 바로 실제로 측정된 역학조사 결과다. 그러나 한수원과 원전 당국이 ICRP 방식으로 조사한 주민 피폭량으로는 이렇게 많은 암 환자가 발생할 수 없었다. 이렇게 역학조사 결과와 피폭량 계산 결과가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당연히 이론치가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 재판정에서는 그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원전 주변 주민 갑상선암 발생에 대한 한수원의 책임을 묻는 재판에서는 역학조사 결과가 아니라 계산된 피폭량을 더 중시한 판결이 나온 바 있다. 주민의 갑상선암 발생에 한수원의 책임은 없다는 판결이었다.
이렇게 ICRP의 피폭량 계산법은 원자력, 혹은 방사선 안전 평가의 기준이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의 피해 정도를 평가하는 데도 궁극적으로는 이 방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될 것이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인 오염수 사건 역시 같은 방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ICRP의 피폭량 계산 방식은 실재적인 피해보다 훨씬 낮게 평가되기 때문에 방사성물질에 의한 피해임에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ICRP의 피폭량 계산 방식은 세계 원자력계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측치인 역학조사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피폭량 계산법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서 이미 제시되었으나 ICRP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실상 ICRP는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한 모든 의혹들을 무력화시키는 ‘궁극의 무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월성원전 오염수 사건을 살펴보자. 고농도의 오염수가 월성원전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한수원이 이 사실을 인지한 것은 적어도 8년 전인 것 같다. 원안위는 몇년 후에 이 사실을 보고받았고, 이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수원은 이 고농도의 오염수가 빗물이 농축되어 발생했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취소하였고, 아직 어디서 누출되었는지, 누출된 오염수의 총량이 얼마인지, 얼마나 확산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부실이다. 그러나 조사단을 꾸리는 데 시간을 보내고, 북한 원전 등 다른 사건으로 물타기하고, 그러다 보면 아마 이 사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은 채 마무리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설사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진다 해도 결국 ICRP 방식을 따른 주민 피폭량으로 사고의 위험성이 평가되면 ‘미미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역시 마찬가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은 오염수 방출에 의한 주민 피해 정도를 피폭량 방식으로 평가하여 ‘기준치 이하’임을 중명할 것이고, 오염수 처리 방식 중 가장 돈이 덜 들면서 가장 위험한 방식인 해양방출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무리 오염수가 많이 발생하는 원전사고가 발생해도 ICRP의 피폭량 계산 방식이 통용되는 한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무력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가 피폭량 문제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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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종전환은 방사성물질이 알파나 베타 붕괴를 겪으면서 다른 물질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삼중수소의 경우 인체 내로 들어온 삼중수소가 대사과정을 거쳐서 유전자 분자를 구성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베타붕괴를 하면 이 수소는 헬륨으로 바뀌게 된다. 이 경우 유전물질인 DNA는 구조가 완전히 바뀌게 되어 삼중수소가 내뿜는 방사선(베타선)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유전물질에 준다. 방사성물질의 화학물질로서의 인체피해는 핵종전환 이외에도 자유라디칼 형성 효과, 효소활성 영향, 광전자 효과 등으로 다양하지만 ICRP는 오로지 방사선 효과만을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