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가 된 살처분
이번 겨울에도 살처분의 칼바람이 농촌에 휘몰아쳤다. 조류독감과 함께 겨울이면 찾아왔던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조류독감이 발생한 사육장 반경 3km 이내에 있는 모든 닭과 오리농장에서는 살처분이 이루어졌다. 바이러스 감염 여부와 관계없이 생명이 끊어지기도 전에 포대에 싸여 땅속에 파묻혔다. 2010년 이후 올해 1월까지 8,000여 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그렇게 살처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살처분 방식은 건강하게 닭과 오리를 키우는 모든 농장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다.
정부는 예외 없는 살처분을 강하게 비판한 시민사회의 요구에 적용 거리를 1km로 축소했을 뿐,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안일한 방식에 중독된 인간의 잔인함에는 무관심하다. A4 용지 크기의 케이지에서 30여 일 만에 짧은 삶을 마감하는 공장식 양계의 끝이 살처분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고문일 정도의 취약한 환경에서 사육된 닭은 태어날 때부터 ‘기저질환자(?)’였기에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병들어 죽기 전에 소비자의 입으로 신속하게 보낼 계산으로 착안한 ‘영계’ 마케팅은 이제 한국인의 입맛까지 바꿔 놓았다.
살처분은 닭과 오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제역과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지난 10여 년간 소와 돼지가 80만 마리 넘게 살처분되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좋은 조건에서 사육되는 가축들, 이들은 바이러스의 숙주이기도 하면서 인간들의 식탁에 없어서는 안될 식자재가 된 것이다.
공장식 축산과 산업적 농업
우리에게 있어 축산은 농가의 입장에서는 부업적 성격이 강했고, 육류는 밥상의 주재료라기보다는 부재료였다. 이러했던 축산이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부터 공장식 축산으로 변모하고, 육류가 거의 매일 밥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40~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닭과 돼지는 음식찌꺼기도 해결해주는 요긴한 동물이었고, 소는 도시로 유학 보낸 자녀의 등록금 밑천이기도 했다. 40년 전만 하더라도 60여 만 농가가 닭을 키웠지만, 지금은 3,000여 농가에 불과하고, 1만 수 이상을 키우는 곳에서 전체 사육의 4분의 3을 감당하고 있다. 돼지는 1,000마리 이상을 키우는 곳이 전체 사육 농가의 절반을 넘고, 40여 년 사이에 사육 농가 수는 7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소도 40여 년 전에는 20마리 이상을 키웠던 농가의 비중은 4%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마리 이상의 소를 키우는 농가가 전체의 40%를 키우고 있다. 사육 농가 수는 급감하고 규모는 늘어나다 보니 가축사료의 내부의존은 크게 낮아졌고, 대신 수입 사료곡물 없이는 키울 수 없는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졌다.
공장식 축산은 녹색혁명형 농업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가축을 비좁고 열악한 축사 안으로 몰아넣게 된 것은 다수확품종의 재배로 곡물 생산량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이는 농업의 화학화, 기계화, 단작화로 가능했다. 더 많은 화학비료와 농약의 투입, 대형기계의 사용과 이와 연결된 단작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곡물 생산의 증대로 연결되어 곡물의 사료화로 이어졌다. 이처럼 농약과 화학비료에 주로 의존하는 곡물 생산과 공장식 축산이 서로 얽혀서 우리의 농업과 밥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당장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농업 생산방식의 확산은 농촌의 유지 발전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규모화, 기계화가 농민의 부를 축적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규모를 키울수록 시장은 농민을 더욱 옥좨왔고, 기계화가 진행될수록 농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기후를 대가로 한 농산물 수출, 그리고 한국 농업
농업의 화학화, 기계화는 거의 모든 농업 생산부문으로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이 본래 수행해왔던 생태환경의 유지와 관련된 긍정적인 다원적 기능들이 상당부분 축소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농업이 기후위기의 가해자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농업, 임업 및 기타 토지이용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25%를 차지한다고 하며(IPCC), 포어와 네머식(Poore & Nemecek)은 먹거리 공급사슬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비중을 26%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중 축산과 양식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1%로 가장 크고, 농작물의 생산이 27%, 토지이용에서 24%, 가공과 운송 등에서 18%가 발생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산업적 먹거리체계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이 전체 발생의 44~57%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
특히, 농작물 생산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의 상당부분은 산업적 농업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학비료에 기인한다. 화학비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다량으로 배출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농경지에 살포되는 화학비료가 생태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화학비료의 질소 성분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치명적 온실가스인 아산화질소뿐만 아니라, 대기 중에 2차 미세먼지와 오존을 형성하는 대기오염 물질인 질소산화물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알무트 아네스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증가한 아산화질소 배출량의 70% 정도가 2007~2016년까지의 농업생산에 기인했다고 한다.2)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추가로 살펴봐야 할 내용은 동일 기간 동안 전 세계 질소질 비료의 연간 소비량은 2% 정도 감소했는데, 거대 농산물 수출국의 질소질 비료 소비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아네스는 중국과 인도, 브라질을 지목했지만, 진실은 이것만이 아니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은 20%, 브라질은 80%, 인도는 20%, 러시아연방은 50%, 우크라이나는 90%, 호주는 40%, 뉴질랜드는 60% 증가했다는 사실이다(농림축산식품부). 이들 국가는 잘 알다시피 대표적인 농산물 수출국들이다. 수출국들이 확보한 가격경쟁력은 질소질 비료의 투입량 증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렇게 확보한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세계 농산물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충격적이다. 이들 국가는 단순히 식량생산이 기후를 위협하는 것을 넘어서서, 기후를 팔아서 이윤을 챙겨왔다.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주장은 거짓이었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굶주림은 자유로운 무역의 결핍 때문에 발생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수출국의 논리는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공멸의 괴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화학비료의 사용과 관련해서 한국의 농업은 떳떳할까? 2018년 한국의 농경지에서 사용된 화학비료는 1㏊당 268㎏(이 중 질소질은 55% 정도)인데, 이는 호주의 5배, 미국의 2배, 캐나다의 3배에 달하는 양이다. 더욱이 과다 투입된 화학비료는 매년 축적되어 토양 내 질소의 잉여 집적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지구온난화와 대기오염뿐만 아니라 토양의 오염, 수질오염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강고하게 고착되어 있는 것이 한국 농업의 현주소다. 대형기계에 주로 의존하는 심경(깊이갈이) 방식이 지력을 높여서 작물의 성장을 촉진한다던 과학영농기술도 외눈박이 기술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심경은 땅속의 부식질을 파괴하고, 땅속에 갇혀 있던 탄소를 방출시켜 기후위기를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농업의 화학화와 기계화로 인한 표토 유실은 땅이 물을 여과하고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을 빼앗는 결과가 되어 작물의 건강을 지탱하는 농경지의 영양소, 무기물을 고갈시키게 된다. 그 결과 재배되는 작물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영양소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4년 미국 영양학회지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1950년에 재배된 농작물의 영양소와 1999년에 재배된 농작물의 영양소를 비교하였더니, 단백질, 칼슘, 인, 철분, 비타민 B2, 비타민 C가 감소한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산업적 농업의 확산이 생태계의 파괴, 기후위기뿐만 아니라, 먹거리도 부실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업적 농업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산업적 농업과 맞물려서 진행되어온 기후위기는 당장의 농업생산마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를 보더라도 냉해와 긴 장마, 우박, 태풍과 호우, 산사태 등 갖가지 기록이 과거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최고, 최저, 최장, 최다, 최강 등의 새로운 기록들로 채워졌다. 이런 기록들만 보더라도 기후위기의 직접적 당사자로서 농업이 전면에 나서야 하고, 그 출발은 산업적 농업의 극복에서 찾아야 한다. 산업적 농업은 단지 농업생산에만 국한되어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종자를 비롯한 농자재 기업, 임노동, 국제무역 등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 강고한 벽을 허물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산업적 농업의 모순이 응결된 지점을 올바르게 찾아낸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그 응결점에 대한 언급에 앞서 한 가지 먼저 지적할 사항이 있다. 자본주의사회는 상품경제이기에 사람과 재화, 재화와 재화는 시장―가격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모순의 응결점을 가격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농업의 경우는 농산물 제값 받기가 문제 해결의 핵심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을 가지고 문제를 풀게 되면 오히려 산업적 농업의 폐해가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고, 농업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 시장은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력주의, 물질주의, 결과주의로 연결되어 오히려 기후위기를 가속화할 것이 자명하다. 특정 품목으로 생산이 집중되고, 이로 인한 단작화와 규모화가 촉진되고, 이로 인해 산업적 농업방식이 확산되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으로서의 가격에 집중하는 한, 문제의 해결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거의 모든 재화가 시장에서 거래되면서 시장이 나름의 자율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 되었다면서도, 토지와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시장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고 처리할 수도 없는 ‘외부’로 규정했다. 토지는 농업생산에서 필수적인 생산수단이라는 점에서, 자연환경은 기후위기 속에 그 가치에 대한 소중함이 더욱 커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토지와 자연환경이 연결되어 있다는 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토지 자체가 외부로 놓인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의 운동이 토지소유 때문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고, 더욱이 농업생산에서 필수적인 토지는 농민과 강고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한 사회기반시설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자본은 국가권력을 뒤에 업고 이윤을 얻기 수단으로 땅을 농민과 분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농민으로부터 땅을 끊임없이 수탈하는 과정이었으나, 여전히 다수의 농민은 자신의 땅을 경작하면서 이에 저항해왔다. 또한, 시장 바깥의 외부에서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던 자연환경은 공장식 축산과 산업적 농업에 의해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이 기후위기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농민들이 저항하며 지켜온 토지와 자연환경의 유지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녹색혁명에 기반한 산업적 농업이 확산되면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유지되어온 소농의 지혜와 저항력이 크게 훼손된 것이 사실이다. 소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영농일 뿐, 그 방식은 산업적 농업의 방식과 많은 점에서 닮아져 있다. 영농 현장에서 화학화와 기계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강고한 자본의 지배에 맞서서 집단적 대응을 바탕으로 하는 소농의 저항력도 많이 쇠락했다. 소농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로 연결되었고, 공동체의 위기는 소농의 위기로 연결되었다. 그런데도, 소농과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기후위기라는 엄중한 상황을 극복해낼 수 없다는 절박함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체제는 합리적인 농업을 방해하며, 합리적인 농업은 자본주의체제와는 (비록 자본주의체제가 농업의 기술적 발전을 촉진하더라도) 양립할 수 없다. 합리적인 농업은 자기 노동에 의존하는 소농이나 혹은 연합한 생산자들의 관리를 필요로 한다.”(《자본론》). 기후위기라는 엄중한 상황은 맑스가 강조했던 소농 혹은 연합한 소생산자들의 역할과 책무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챠야노프는 소농이 농사와 연결할 수 있는 자원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지혜를 바탕으로 영농을 해왔기에 자본주의적 농장이 생산을 멈춘 곳에서도 소농들은 경작을 계속해왔다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농민들이 자본주의적 기업농에 저항하지 않고, 이들이 하는 방식대로 농업환경의 변화에 대응했다면 농민들의 상당수는 이미 소멸해버렸을 것이다. 소농은 생산적인 자원 배치를 통해 대항하고, 자율성과 자기통제의 여지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농은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에 능통하고 이것이 바로 농민들이 자본에 저항하는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농의 강인한 생명력은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챙겨온 소농의 성정이 있었기에 거꾸로 소농이 중심이 된 지역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해결자, 소농과 공동체
녹색혁명형 농업, 산업적 농업, 공장식 축산으로 연결되고 통합된 현대의 세계화된 농식품체계는 생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특히 우리의 농민들은 유기농업운동이나 생협운동, 로컬푸드운동 등 소비영역의 다양한 주체들과 연대와 협력의 경험을 축적해왔다. 시민사회 진영은 건강한 밥상은 건강한 농민들에 의해서만 지속가능하다는 깨우침을 바탕으로 농민의 노력에 힘을 보태왔다. 여기에 최근에는 농업과 먹거리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먹거리 전략, 푸드플랜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대안 운동을 포괄하는 식량주권운동은 자본(기업)이 주도하는 농식품체계가 아니라, 먹거리의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근로대중이 주도하는 농식품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고민의 집약이었고, 유엔 농민권리선언은 이를 위한 경제적, 사회적, 제도적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성과였다. 농민권리는 자본의 지배에 순응하는 농업으로는 먹거리의 안정적인 생산이나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달성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농민들에게는 자본에 저항하는 농민 중심의 농업과 이에 결합한 사회적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할 책무가 주어져 있다는 점도 함의하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해서도 농민권리선언은 땅의 사람들인 농민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그 땅은 지역 속의 땅이고, 그 땅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농민의 권리와 농촌공동체의 복원과 유지에 기여하는 농민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유럽은 기후위기의 대응과 관련해서 농업생산에서 탄소배출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계획을 발표하고 있지만, 작년 여름 한국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에는 ‘농어촌·취약계층의 디지털 접근성 강화’, ‘농촌 태양광 융자지원 확대’ 등이 농업이나 농촌과 관련된 내용의 전부다. 소농이나 공동체는 없고, 대신 디지털과 태양광으로 포장된 자본과 산업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접근성 강화’와 ‘지원 확대’라는 형태로 여전히 농민을 대상화하고, 기후위기를 심화시킨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대안 운동과 담론을 기후위기와 연결하여 더욱 치밀하고 진지하게 재구성하고, 각각의 지점에서 끊임없이 자문(自問)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의 주체로 소농과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업이 과연 무엇인지, 산업적 농업이 달성할 수 없는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유기농업을 바라본 것은 아닌지, 화학비료 대신 수입 원료로 만들어진 유기질 비료를 사용하면서 유기농업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지, 공동체성을 잃어버리면서 개별적 차원의 경제적 이득을 더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유기농업에 길들여진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공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친환경 학교급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소농들의 유기농업 참여가 확대되었는지, 아니면 안전이라는 제도적 틀을 강화하면서 농촌 내 공동체성을 약화시켰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유기농업의 관행화로 일컬어지는 산업적 유기농의 확산으로 연결된 것은 아닌지도 봐야 한다. 실제로 유기생산 농가의 평균 판매 규모는 농가의 평균 판매 규모보다 훨씬 크다.
로컬푸드의 경우에도 지역 내 자원의 선순환이라는 큰 원칙 내에서 지역 내 소농의 참여 확대가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참여 확대가 단순히 개별적 참여를 넘어서서 소농들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성의 확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유통적 관점이나 단지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폄훼돼서는 안된다.
지방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푸드플랜은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푸드플랜은 지역 내 선순환을 고민할 뿐만 아니라, 소농과 공동체가 핵심적인 참여 주체이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아쉽게도 정책 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푸드플랜에서 먹거리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사업, 먹거리 가치사슬(6차 산업화 등)의 확대 등에 있어서도 소농과 공동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면 영농활동만으로는 소득을 온전하게 확보하기 어려운 소농의 소득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답은 뜬구름 잡는 고답적 이론에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필요한 나침반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찬찬히 뜯어 살펴보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런 희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해방 70년, 비틀거리며 온 길〉, 《녹색평론》 143호(2015년 7―8월)
죽임의 농업을 넘어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살림의 농업으로 전환하는 출발은 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녹색혁명에 바탕을 둔 산업적 농업이 깃발을 꽂았을 때부터, 공장식 축산으로 망가진 생명들이 식재료로 쓰이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그 훨씬 더 전에 기업농들이 농업생산에 참여하면서 땅의 황폐화를 확인했을 때부터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고민하며 켜켜이 쌓아온 길을 찬찬히 뜯어 살펴보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자들의 연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들,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업을 고민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과정들, 깨져버린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대안 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들, 이를 지지하고 응원하기 위해서 다소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온 과정들, 그리고 이를 확산시키고 지속가능한 형태로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온 과정들을 찬찬히 뜯어본다면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나침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의 출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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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원규, 〈기후변화와 국제 식량안보 대응 동향의 시사점〉(농특위 전문가 세미나 자료), 2020년 12월 22일.
2) https://www.eurekalert.org/pub_releases/2020-10/kift-gfp101920.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