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어 겨울로 접어들고 있지만, 코로나19 감염병은 변화의 조짐이 없다. 하기야 변화하지 않는 거로 따지면 우리도 코로나바이러스 못지않은 듯하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고 질리도록 말했지만, 이 말에 걸맞은 변화는 아직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 코로나 ‘이후’ 대책으로 “대한민국 대전환”과 “새로운 100년의 설계”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나왔던 한국판 뉴딜도 사실은 ‘디지털’이든 ‘그린’이든 경기를 부양해 하루빨리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만일 지금의 사태가 ‘이전’과 별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라면 이런 접근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8월 〈2020 경향포럼〉에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만약 바이러스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공황이나 2008년만큼 근본적 침체는 오지 않을 것이다. 바이러스라는 외생변수가 문제다. 이 악재만 사라지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반등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크루그먼의 예측에서도 코로나19는 경제 외부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태라는 인식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바이러스 감염병을 뜻밖에 발생한, 극복해야 할 일종의 장애로 보면, 여기에 대한 대책으로는 보건과 방역 강화, 백신과 치료제 개발, 경제회복 등이 있을 것이다. 모두, 우리가 지금껏 열심히 해오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다.
만일 바이러스 재난이 ‘지금의 경제’와 연결되어 있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설혹 가능하다 해도, ‘이전’으로의 복귀는 문제의 원인을 지속하거나 강화할 뿐이다. 바이러스 재난은 반복될 것이고 그때마다 더 가혹해질 것이다. 같은 원인을 놓고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21세기 들어 부쩍 늘어난 바이러스 감염병이 인간의 자연파괴에서 비롯되었다는 과학적 근거는 충분하다. 최근에만도 세계보건기구(WHO), 유엔환경계획과 국제축산연구소(ILRI),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이 바이러스 감염병 창궐은 야생동물 서식지 파괴 등 자연생태계 훼손과 기후변화가 주요 원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생태문제의 뿌리에는 대량 생산·유통·소비·폐기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경제’가 있다. ‘경제성장’은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군림한다.
이렇게 보면, 코로나19는 단지 경제의 외생변수가 아니라 지금까지 진보와 발전으로 여겼던 경제성장에 내재한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이제는 성장신화의 미몽에서 깨어나라고 우리를 깨우는 죽비소리다. 결국, 바이러스 재난의 근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극복할 것은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 자신이고, 싸울 것은 사람과 자연을 희생하여 성장을 거듭해온 탐욕의 경제다. 코로나19는 현상으로는 질병의 문제지만 근본으로는 자연과 경제 문제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했다(프란치스코 교종, 〈찬미받으소서〉). 기후문제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문제다(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코로나19를 질병으로만 접근하면 이 바이러스 감염병이 가리키는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놓치고 결국 문제해결에 실패할 것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
지금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 특히 ‘지금의 경제’를 근원적으로 반성할 때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9월 녹색연합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만 14~69세 시민 1,500명에게 실시한 ‘기후변화 위기 인식’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 응답자의 97.7%는 기후위기가 심각하다고 답했는데, 그렇게 인식한 계기로 응답자의 95.8%가 올여름의 폭우, 코로나19, 재작년의 폭염을 꼽았다.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가 최근의 재난을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공통의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다. 재난에 대한 시민의 인식이 깊어진 것이다. 하지만 지난 4월 그린피스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9세 이상 남녀 1,600명에게 실시한 그린뉴딜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재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61%는 그린뉴딜이 코로나 이후 침체한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그린뉴딜의 이점을 묻는 질문(복수 응답)에서 응답자의 81%는 ‘기후위기 해결’, 76%는 ‘경제성장’을 꼽았다. 압도적 다수가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대부분 기후위기 해결과 경제성장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화석연료산업 지원’과 ‘환경규제 완화’에도 반대가 더 많았지만, 경제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경제성장을 바이러스 재난의 원인이 아니라 해법으로 또는 재난과 별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한국판 뉴딜, 특히 그린뉴딜에서도 농업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진보든 보수든 정부의 농촌 홀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산업농이 배출하는 다량의 온실가스, 기후변화로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식량위기, 농업과 농촌의 생태적 가치와 기여 등을 생각하면 그린뉴딜에 농업이 빠졌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농업은 이렇게 철저히 무시되었지만, 자동차산업은 그린뉴딜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린뉴딜에서 가장 비중이 큰 ‘친환경 미래 모빌리티’ 사업은 20조 3,000억 원의 예산으로 전기차 113만 대와 수소차 20만 대를 보급할 예정이다. 그야말로 ‘현대자동차’에 안성맞춤인 사업이다. 기후위기와 바이러스 재난에 대비한다는 그린뉴딜에서도 정부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성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은 지난 9월 24일 국회에서 통과된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에서도 나타난다. 국회가 “현재의 상황을 ‘기후위기’로 엄중히 인식하고” “IPCC 1.5℃ 특별보고서의 권고를 엄중히 받아”들여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를 결의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 결의 달성에 필수적인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1.5℃ 특별보고서〉의 권고인 45%로 구체화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상향”한다는 두루뭉술한 문구로 갈음했다. 더구나 수치 명시를 반대한 쪽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었다. 또한, 결의안은 “양보와 타협, 이해와 배려의 원칙”에 따른 “환경과 경제”의 공존을 주장했다. 표현 자체야 문제가 없지만 ‘환경’과 ‘경제’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누가 양보하고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 누가 누구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가? 산업화 이후 세상을 지배해온 성장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힘이 세다. 그냥 놓아두면 경제가 환경에 대해 일방적인 양보와 타협, 이해와 배려를 강제할 것이고, ‘정의로운 전환의 원칙’도 지키기 힘들어진다. 기후위기에 비상하게 대응하려면, 경제가 철저히 환경의 요구에 따르도록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 요약하면,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 재난을 계기로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은 높아졌지만, (기후변화의 근원인)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의식도 여전히 강고하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인류의 경제활동은 유한하고, 성장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닫혀 있는 생태계 속에서 이루어진다.”(허먼 데일리, 《성장을 넘어서》) 상식의 눈으로 현실세계를 보면, 경제성장의 한계는 너무나 자명해진다. 개발과 성장의 장밋빛 전망에 들떠 있던 1970년대에 큰 경종을 울렸던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는 사실 ‘상식’의 과학적 예견이었다. 《성장의 한계》에 쏟아진 비판이나 비난 세례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상식을 억누르고 현실을 왜곡하는지 보여줄 뿐이다. 경제는 자연에 의존하는, 자연의 하위체계다. 자연은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원의 원천이고 경제활동에서 나오는 폐기물의 매몰지다. 생산에 투입할 자원은 자연에서 나오고, 소비의 최종 결과인 폐기물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자명한 진실을 거부하고 “유한한 세계에서 기하급수적 성장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미치광이거나 경제학자”밖에 없을 것이다(케네스 볼딩). 자원이 유한하다는 것은 재생 속도보다 빠르게 자원을 소모하면 결국 고갈된다는 뜻이다. 기술혁신과 대체재로 한계를 극복한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성장 이데올로기는 경제가 자연의 “흡수역량(매몰)과 재생역량(투입)”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생태적 수용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현실을 부정한다.
자연의 한계 내에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경제활동이 고려해야 할 주요 요소는 배분과 분배와 규모다. 배분이 자원의 효율 문제라면, 분배는 사람 간의 공정 문제고 규모는 자연이 부과하는 한계 문제다. 과거와 비교해 오늘날 분배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아무리 공정하게 분배한다고 해도 자연이 부과하는 한계에는 변함이 없다. 분배 역시 ‘규모’ 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생태적 수용성 대비 경제규모로 최대 한계와 최적 한계를 생각할 수 있다. 성장을 지속하면 경제는 최대 한계에 이르기 전에 최적 한계를 지나게 될 것이다. 이 한계를 넘어가면 성장의 편익보다 비용이 더 커지고 성장은 비경제적이 된다. 우리가 이미 최적 규모를 넘었다는 증거는 날로 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폭우, 태풍, 산불 등 각종 기상재해의 일상화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의 창궐로 이제는 성장의 효용보다 비효용이 크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생태적 수용성을 무시하고 성장을 계속 고집하면, 경제는 언젠가 최대 한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경제의 성장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기후위기는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인류의 멸종위기는 과장이 아니라 지금의 성장을 계속 밀고 나갈 때 조만간 다가올 현실이다.
탈성장을 말한다
“역병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이다(프랭크 스노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부정하면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가지 말아야 할 ‘이전’의 길만 보게 된다. 지표상으로 경제는 계속 성장해왔지만, 세상은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산업화 이후 우리는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적 훼손을 외면하거나 정당화해왔다. 바이러스 재난은 폭력적 삶의 방식이 이제 한계에 달했고, 바뀌지 않으면 상황은 반복되고 악화할 것이라 경고한다. 성장이 지금의 재난을 초래했는데도 계속 성장에서 출구를 찾는 것은 우리가 성장에 얼마나 중독되었는지 보여줄 뿐이다. 중독의 극복은 당연히 힘들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성장에 중독된 사회는 성장 이외의 다른 길을 상상하기 힘들다. 코로나19 감염병에 비친, 욕망에 찌들고 성장에 중독된 우리 모습을 인정할 때 비로소 출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답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성장에서 벗어나기, ‘탈성장’이다.
탈성장은 성장신화에 사로잡힌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구호이자 운동이다. 다양한 이론과 행동을 포괄하는 탈성장은 무엇보다 기존의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탈성장은 성장이 지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삶(buen vivir)’을 누릴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주목한다. 성장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행복과 복지를 증가시키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적어도 부유한 나라에서는 성장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적 규모를 넘어선 경제성장은 효용보다는 비효용이 더 크다. 과도한 경쟁과 긴장, 생활환경의 오염, 감당할 수 없는 쓰레기 배출, 교통 체증, 출퇴근 시간의 증가, 장시간 노동 등은 모두 성장의 산물이며 성장이 이미 적정 수준을 넘었다는 신호다. 이반 일리치는 “과도한 에너지 소비가 물리적 환경을 파괴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적 관계를 필연적으로 퇴보시킨다”고 경고했다(《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반도체 제조, 핵발전, 석유화학과 같이 고도의 집적, 거대기술로 운영되는 설비는 필연적으로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기술관료체제를 초래한다. 탈성장은 성장이 초래할 필연적 귀결을 막기 위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성장의 포기다.
탈성장은 기후변화 대응에 필수적인 전환 과정이다. 지속적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자연생태계에 부담을 가중하며,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성장을 포기해야 한다. 온실가스는 성장이 오늘날 자연생태계에 끼치는 가장 큰 부담이다. 성장과 온실가스 배출 사이에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고 “성장하면서 물질소비 또는 탄소배출을 실제로 줄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탈성장 사전》). 〈IPCC 1.5℃ 특별보고서〉 권고의 이행은 성장에서 탈성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성장을 전제로 구축된 사회에서 성장의 포기는 커다란 사회적 고통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무엇보다 실업이 증가할 것이다. 코로나19 재난은 경제성장이 멈추거나 감소했을 때 누가 더 먼저 더 많이 고통을 당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2050 순배출 제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의로운 전환’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한민국 대전환”을 선언한 한국판 뉴딜은 탈성장으로의 정의로운 전환에 집중해야 한다. 온실가스를 더 많이 배출하는 사람이 더 많은 책임을 지고 경제성장을 위해 강제된 기존의 불평등 구조에서 희생을 당해온 이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IPCC 특별보고서〉의 탄소배출 감축 권고를 준수하는 정책 내에서 이루어내야 한다. 지금은 디지털이니 그린이니 하며 겉모습만 바꾼 미봉책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한국판 뉴딜은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판 뉴딜은 사상 최대 규모의 돈잔치, 경기부양책으로 전락할 것이다. 반짝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성장의 비효용과 그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커질 것이다.
정부는 160조 원을 투입하는 한국판 뉴딜로 일자리 190.1만 개를 만들겠다고 한다. 어떤 근거로 일자리 숫자를 산출했는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서 만들겠다는 일자리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짚어봐야 한다. 질문은 이렇다―창출하겠다는 일자리는 정책 담당자 자신들에게도 매력 있는 그런 것, 자신들도 기꺼이 하고 싶은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관료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부가 일자리를 일방적으로 급조하는 방식으로는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서도 단기간의 싸구려 일자리만 양산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미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 노동자 또는 공무원 같은 ‘내부자’와 중소기업이나 기타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외부자’로 이루어지는 1차 노동시장과 2차 노동시장으로 편성되었다(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한번 2차 노동시장에 발을 디디면 1차 노동시장으로 옮겨 가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자신이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청년들이 기를 쓰고 몇 년씩 취업준비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판에 한국판 뉴딜의 일자리 양산은 2차 노동시장을 확대하여 노동의 불평등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정부의 정책입안자들은 일자리를 너무 쉽게 ‘숫자’로 표현해왔다. 그들이 말하는 일자리는 사람의 특성, 소질, 바람이나 지역의 특성 같은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사람의 생존 그리고 경제성장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자리든 찾기만 하면 실업상태는 고용상태로 변화한다. “산업경제의 사회적 목표를 충족하고 산업사회의 정부를 만족시키는 것이다.”(웬델 베리, 《오직 하나뿐》) 우리는 먹고살려고 일하지만, 그것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가능한,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단기간에 일방적으로 대규모의 일자리를 창출해서 제공하겠다는 정부의 관료적 발상과 방식으로는 그런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차라리 정부가 사람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스스로 찾고 만들 수 있는 버팀목을 마련해주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삶’의 조건
어디에 버팀목을 놓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지만 방치되고 취약해진 부문을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농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사보다 더 기본이고 근본인 일은 없다. 농사는 먹을거리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농업은 자연생태계 보전, 문화와 전통 보존, 지역공동체 형성, 식품의 안전성과 국민 생존권 보장 등 다양한 공익기능을 수행한다. 한마디로 농사는 ‘좋은 삶’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농업의 현실은 먹을거리만 살펴보아도 믿지 못할 정도로 암담하다. 세계 5대 식량 수입국의 하나인 우리나라는 2019년 기준 식량자급률 45.8%, 곡물자급률 21.0%를 기록했다. 지난 10년간 각각 10.4%포인트, 8.6%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자급률이 거의 100%인 쌀을 제외하면 2017년 기준 식량자급률은 8.9%, 곡물자급률은 3.1%로 급감한다. 식생활 변화로 이제 제2의 주식이 된 밀은 1인당 소비량이 쌀의 절반을 넘지만, 자급률은 불과 1.2%다. 거의 전량을 수입한다는 뜻이다. 충격적인 수치다. 식량은 일차적으로 팔고 사는 상품이 아니라 주권이다. 식량주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곡물시장에 의존하는 ‘식량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차원의 식량위기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육류수요의 급증과 곡물의 연료 사용은 곡물수요를 증대하여 곡물시장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요소는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기후변화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식량 식민지의 운명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촌은 모든 삶의 뿌리다. 우리나라는 이런 농촌이 무너진 지 오래다. 그러니 도시인들 무사할 리가 없다. 지금 우리나라 농촌에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도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농촌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고 빈집은 늘어가지만, 도시에서는 할 일도 살 곳도 없어서 아우성친다. 갈수록 도시의 삶이 황폐해지자 귀농을 바라는 사람은 꽤 되지만,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농촌에서의 기본적인 생계보장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탈성장 전환을 위한 다양한 실행방안 중에 기본소득이 있다. 그동안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비윤리적이라고도 여겼던 기본소득에 관한 인식은 코로나19 재난을 계기로 많이 바뀌었다. 문제는 재원이라는 생각도 많아졌다. 농민기본소득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성장논리에 의해 철저히 뒷전으로 밀려난 우리나라 농업을 복원하는 전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기왕의 농부들은 물론 새로 농사를 짓겠다는 이들이 최소한도로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몇년 전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계산에 따르면, 전국 110만 농가에 월 50만 원씩 지급한다면 연간 총 6조 6,000억 원의 예산이 소요된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우리가 매년 미국 무기 구매에 쓰는 돈이 10조 원 언저리다. 한국판 뉴딜의 예산이 160조 원이고, 당장 내년에만 20조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농민기본소득에 필요한 돈이 우리나라가 감당하기 힘든 규모는 아니라는 것이다. 농촌으로 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필요한 예산도 늘어나겠지만, 농민이 수행하는 공익적 기여를 고려하면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기존의 관행농업 역시 성장주의에 매여 있고 다량의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변화에 책임이 큰 현실에서,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이동이 자연생태계 보전을 비롯한 공익적 가치를 자동으로 증진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경쟁과 환경오염이 심한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오겠다는 이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일정 정도 자급자족하는 생태적인 삶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에게는 점점 시장에 포획되어 상품화되고 있는 농촌의 생태적 전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로 농사가 소문나서 사람이 농촌으로 몰리면, 도시도 그만큼 여유가 생기고 기업도 좋은 일자리를 만들 가능성이 커진다. 나라의 근간을 튼실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균형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유쾌하고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일단 성장중독에서 벗어나면, 또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탈성장은 단순한 성장주의 비판을 넘는 ‘또다른 세상’의 전망이다. 탈성장은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이면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이 가능하다는 확신이다(〈찬미받으소서〉). 성장은 언제나 큰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탈성장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적은 것이 많은 것이고, 단순한 것이 좋다고 말한다. 탈성장은 세상을 보는 또다른 시각이다. 소유와 소비, 경쟁과 독점, 효율과 이윤, 통제와 지배, 무한한 욕구가 성장을 나타낸다면, 단순과 절제, 협력과 나눔, 환대와 보존, 돌봄과 공생, 자족과 충분함은 탈성장을 가리킨다. 탈성장과 관련된 다양한 삶의 태도는 더는 성장할 수 없다는 좌절에서 비롯된 강요된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가 ‘좋은 삶’에 필수적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자발적 선택이다. 탈성장은 우리 각자의 내면의 성찰과 변화를 요청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변화는 우리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절제는 탈성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차원의 덕(德)이다. 절제의 내면화로 탈성장에 조응하는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양식이 가능해진다. 대부분의 종교는 절제를 삶의 중요한 덕으로 가르친다. 이런 면에서 종교와 탈성장이 지향하는 삶은 서로 많이 닮았다. 성경의 안식일 정신은 ‘자발적 자기제한’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안식’은 어원상 ‘멈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안식일과 그 확장으로 볼 수 있는 안식년과 희년은 의도적인 멈춤을 통해 절제와 자족의 덕을 기르는 한편 이웃과 자연을 배려하도록 한다. 여기에는 인간에게 자신의 욕구를 제한하고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으며, 충분함을 모르는 이 욕구를 좇아서는 만족도 행복도 누릴 수 없다는 시각이 들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성장은 행복을 증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로 얻는 시간의 여유가 행복을 증진해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 재난으로 맞은 이 시련의 때가 지금까지 의문을 품지 않았거나 외면해왔던 성장의 문제를 대면할 최적기이다.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성장의 종말이 곧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성장의 종말을 부정하고 성장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재난을 겪으며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경제성장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실제로 많은 정부가 바이러스 팬데믹 비상사태를 맞아 성장보다 안전, 보건, 방역을 선택했다. 성장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지난 6월 세상을 떠나신 김종철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계는 그냥 이대로 망해가는 대로 내버려두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대안은 없다(TINA)’라는 구호가 너무 오랫동안 현실을 왜곡했고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을 마비시켰는지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탈성장을 대안으로 ‘이전’과 진정으로 다른 ‘이후’를 상상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또다른 세상은 아직 가능하다. 탈성장은 ‘성장의 전락(轉落)’이 아니라 근원적인 ‘세상의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