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소비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깊이 생각해볼 때, ‘대안이 없다’는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고식적인 관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기 있게 이 상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회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를 경험해왔고, 그것은 아직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생활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80~81쪽
이번 달로 110만 명이 넘는 인명을 (직접적으로) 앗아간 코로나바이러스가 연내에 종적을 감출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할 것 같다. 확실히 110만 명 정도는 대량학살을 통해서 몸집을 불려온 산업문명의 역사에서는 잠시 멈칫할 만한 숫자도 아닐지 모르지만, 유사한 재앙이 거듭될 것을 예고하면서도 이 문명의 궤도는 조금도 수정될 태세가 아니다. 그 속에 갇혀서 다시 그것을 강화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근대문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생활양식, 문화라는 틀로 현대인의 정신적 세계까지 포박하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이해하는 능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좋은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까지 빼앗긴 것 같다. 오늘날 지구 위의 많은 사람들이 ‘대안이 없다’는 논리에 저항하지 못하고 왜소한 생존만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협소한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만 봉사하는 정치·경제·문화 시스템과 본질적으로 다른 가치―호혜와 연대의 원리에 기반한 경제 및 생활양식의 구체적인 모습을 인류 역사와 토착문화의 전통 속에서 찾아내 보여주었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세상을 떠난 것은 우리 시대의 큰 손실이다. 이번호 《녹색평론》은 ‘두려움, 수치심, 불안’으로 정의되는 현대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대안을 모색해온 그의 작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짧은 에세이를 소개하면서 고인을 추모하고자 한다.
편집실은 고 김종철 발행인이 생전에 남긴 글과 강연 원고를 재수록 혹은 리뷰하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새기고 음미하려는 노력을 지속할 계획인데,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리뷰에세이(〈순진성의 경이, 그리고 사랑〉)로 그 문을 연다. 아무쪼록 이번호 《녹색평론》도 진정으로 풍요로운 세상, 더 많은 소비가 아니라 ‘가난’이 축복이 되는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라는 비전을 갖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