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선생님이 지난 6월 25일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나라 나이로 일흔 넷이셨다. 먼저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더 오래오래 우리를 가르쳐주시길 소망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이어 각오를 생각하게 됐다. 선생님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한국적 생태사상을 일궈오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우리 후학들이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이어가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품게 했다.
선생님의 생태사상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약간의 글들을 써왔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우리 현대 지성사에 대해 신문에서 두 번 다뤘는데,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두 번 모두 소개한 바 있다. 하나는 2013~2014년 경향신문에서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우리 현대 사상가 24명을 탐구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2018~2019년 한국일보에서 ‘100년에서 100년으로’라는 제목으로 역시 우리 현대 사상가 60명을 조명한 것이었다.
이 두 기획에서 모두 살펴봤던 이들은 이기백, 강만길, 리영희, 이어령, 김우창, 백낙청, 이효재, 최장집, 박세일, 그리고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을 다룬 까닭은 선생님이 서구 생태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적 생태사상을 발전시키셨다는 데 있었다. 우리의 생태사상은 장일순에서 시작하여 선생님에 와서 그 사유가 튼튼해지고 풍요로워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님과 《녹색평론》
선생님은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진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마산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이어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영남대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1970년대 이후 선생님은 백낙청 교수, 염무웅 교수, 김현 교수, 김병익 선생, 유종호 교수, 김우창 교수 등과 함께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그 활동의 결과로 선생님은 문학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을 내놓았다. 선생님의 문학평론에 대해 김우창 교수는 “주어진 대상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검토함으로써 어떠한 결론에 이르려는 그의 논리의 끈기는 당대에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고평(高評)했다.
선생님의 사상이 우리 지식사회에서 크게 관심을 모은 것은 1991년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한 이후부터였다. 선생님은 《녹색평론》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을 맡았고, 우리 사회 생태학 담론을 주도해왔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간디의 물레》(1999),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2008), 《땅의 옹호》(2008), 《발언 I·II》(2016), 《대지의 상상력》(2019), 그리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2019) 등은 그동안 선생님이 발표한 저작들이었다. 더하여, 선생님은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2),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2007)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이 가운데 일찍이 내 시선을 끈 것은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다. 이 책은 선생님이 《녹색평론》을 펴내면서 쓴 서문들을 모은 것이다. 서문 모음집이라고 해서 책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각 권의 《녹색평론》을 대표하는 글들인 만큼 선생님 사유의 넓이와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선생님은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생태학적 재난은 …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선생님은 강조한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199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호 서문에서 펼쳐진 선생님의 생각이다. 오늘날에도 경청할 만한 주장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외려 설득력이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의 ‘책머리에’에서 선생님은 경고한다. “인간다운 덕성과 자질을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물신주의의 일방적인 위세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인간관계, 그에 따른 인간성의 황폐화… ‘근대의 어둠’은 훨씬 더 깊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이 이런 생태학적 분석과 처방만은 아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외환위기와 IMF 사태, 황우석 사건과 생명공학, 월드컵 거리 응원과 공동체, 그리고 한·미FTA 등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달궜던 주요 이슈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모색한다. 길지 않은 서문들의 모음집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근대에 어둠’에 맞서는 생태학적 계몽과 인문학적 비판정신을 선사한다.
한국적 생태사상의 모색
《발언 I·II》 또한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저작이다. 이 두 권의 책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선생님이 언론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인데, 자연과 인간, 생명과 사회, 미래와 대안에 대한 원숙한 통찰을 보여준다. 선생님은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과제는 …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희생시키지 않고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벗어날 것이며,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안고 이 암울한 시대를 비통한 심정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일 것이다.
이 땅에서 생태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이라면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는 무위당 장일순이다. 장일순은 우리 사회에서 환경과 생명의 소중함을 선구적으로 일깨워준 사상가였다. 《녹색평론》은 장일순의 글들을 모아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편집해 출간하기도 했다.
선생님[장일순] 서화에 자주 등장하는, ‘천지는 같은 뿌리요 만물은 한 몸(天地同根 萬物一體)’이라는 글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신없이 살다 보니 다들 바보가 되었지만, 찬찬히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 삼라만상이 모두 한 가족, 형제자매로 돼 있다는 것은 분명히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의 근본 한계를 자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입니다. … 무위당의 생명사상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의 차원을 넘어 진실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정치사상이기도 합니다.
2016년 9월 ‘한살림 서울’이 주최한 ‘무위당학교’에서 선생님이 강연한 〈무위당의 생명사상과 21세기 민주주의〉에 나오는 말이다. 선생님이 장일순의 사상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생명공동체 전체의 조화와 공생을 지향하는 장일순의 생명사상을 선생님은 서구의 다양한 생태학 담론과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와 접목시켜 한국적 생태사상을 모색하고 발전시켰다.
이 강연문이 실린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는 선생님의 생태사상이 집약된 저작이다. 생애 마지막 10여 년 동안 선생님이 발표한 글들과 강연으로 이뤄져 있다. 이 책은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와 《발언 I·II》에 제시된 선생님의 생태사상이 더욱 넓어지고 한층 깊어졌음을 발견하게 하고 깨닫게 한다.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선생님은 성장시대의 종언, 민주주의, 기본소득 등을 위시한 21세기 생태학의 새로운 의제들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그 함의를 성찰적으로 숙고한다.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의 생태사상은 서구의 ‘심층생태학’에 가깝다. 하지만 ‘사회생태학’과 ‘정치생태학’을 선생님이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선생님이 일찍이 제시한 대안은 협동의 공동체, 상부상조의 사회관계, 연대와 협력에 기반한 호혜적 경제, 생태적 생활의 조직화다.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공존 및 공생을 모색하는 생태학적 계몽이 선생님이 추구해온 한국적 생태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어느 나라든 사상가에게는 두 그룹의 독자가 있다. 현재의 독자뿐만 아니라 미래의 독자도 존재한다. 선생님은 현재의 독자는 물론 미래의 독자에게 앞서 인용한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를 위한 생태학적 메시지들을 타전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드문 미래지향적 사상가가 바로 선생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른 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
서구 인문·사회과학에서 생태학은 아르네 네스의 심층생태학,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학, 앙드레 고르의 정치생태학으로 분화되면서 발전해왔다. 심층생태학이 환경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사유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역설한다면, 사회생태학은 의식 변화와 제도 개선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리고 정치생태학은 자본주의 생산 및 소비 체제의 급진적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생태사상과 그 대안에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공존한다. 단기적 시각에서 볼 때 생태학적 대안이 원칙은 옳으나 다소 한가로운 이상적인 주장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 시각에서 볼 때 생태학적 대안은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진정한 현실주의적 주장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선생님의 생태사상이 갖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존의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아가, 이 지속 불가능한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대한 우리의 물질주의적 의식 및 문화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하는 것도 너무나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은 절박하게 주장한다(《발언II》).
지금 세계는 벼랑 끝에 있다. … 가장 무서운 것은 임박한 생태적 파국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소멸을 자초하고 있는 소행성인지도 모른다. …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 절실한 것은 장기적인 비전과 공생의 윤리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일대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반복적인 전염병의 발생은 그 단적인 증거들이다. 당장 올해 우리 인류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코로나19는 자연파괴의 진행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접촉이 증가해 발생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생태학적 윤리와 실천은 이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생존적인 필수라는 사실을 우리 인류는 지금 깨달아가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장기적 비전과 공생의 윤리를 탐구하는 선생님의 생태사상은 현재의 사상인 동시에 미래의 사상이다. ‘근대의 어둠’을 올바로 인식하며 그 근본적 해결책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를 일궈가야 하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부여된 더없이 중차대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책머리에’에서 선생님은 말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암울하다고 해서 우리는 마냥 절망 속에 빠져 있거나 체념에 잠겨 있을 수는 없다. … 당장에 희망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데 전념하는 길 이외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위대한 영화예술가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걸작 〈희생〉의 모티프가 되었던 중세 수도사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현실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즉,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일망정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물을 길어 붓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그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보는 행운이 우리에게도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선생님이 진정 전하고 싶어 했던 말은 바로 이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생태학적 사유와 실천에 부단한 최선을 다한다면,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우리는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세계적·한국적 차원을 두루 고려한, 이 땅에서 찾기 드문 진정한 생태사상가였다. 나를 포함한 후학들이 이제는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이어가야 할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삼가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