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도 텃밭엔 생(生)의 활기가
5월 15일 기준, 코로나바이러스 세계 확진자 수가 450만 명을 넘고 누적 사망자가 30만 명을 넘는 등, 코로나 사태가 곳곳에서 지속된다. 한국도 한숨 돌리나 했더니 클럽이나 노래방 등이 새 진원지가 됐다.
한편, 아침마다 둘러보는 텃밭에선 매실과 자두가 토실토실 큰다. 가장 늦게 싹이 트는 감나무도 감꽃 틔울 태세고 대추나무 역시 막차 타듯 푸른 싹을 내민다. 참새들은 수시로 닭장을 뚫고 들어와 모이를 훔치고 까치들은 강아지 밥을 서리한다. 암탉 한 마리가 알을 낳는 족족 품더니 마침내 병아리 여섯 마리를 출산했다. 산에서 온 송홧가루가 보름 이상 툇마루를 수놓더니 이제는 아카시아 향기가 은은하다. 코로나로 세상이 어지러워도 텃밭이나 가축은 물론, 고라니나 꾀꼬리 등 야생(野生) 생명체는 활기차다. 이태리 베네치아에 고래가 돌아오고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이 깨끗이 보일 정도로, 속물 세상이 멈춰야 원초적 생명이 살아난다. 사람이 꽃이라지만, 사람이 폐(弊)다. 꽃이 되려면 먼저 폐를 없애야 한다.
이제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고 한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한국판 뉴딜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4월 22일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한국판 뉴딜’을 선언했다. 코로나 위기 극복과 디지털경제 구축이 핵심이다. 기간산업(항공, 해운, 조선업 등) 위기 대처용 40조 원의 안정기금 조성과 출자(지급) 보증, 또 정부 주도 50만 고용 창출 등, 기업과 고용을 위한 85조 원 규모다. 이를 위한 3차 추경과 입법까지 당부했다. 그 전 제2차 비상경제회의에선 100조 원 규모의 비상금융으로 기업 지원도 약속했다. 이번엔 35조 원을 추가, 소상공인과 저신용 기업까지 지원한다. 또, 긴급고용안정대책 10조 원도 있다. 이어 5월 7일의 ‘한국판 뉴딜’ 구상에선 경제구조 고도화와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3대 프로젝트(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 디지털화)와 10대 중점과제(DNAUS)를 추진하는 것으로 압축됐다. 고용창출 효과가 큰 대규모 국가산업(디지털, 비대면 중심)으로 코로나 이후를 견인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5월 13일 청와대는 한국판 뉴딜에 ‘그린뉴딜’ 포함 여부를 검토하라고 관련 4개 부처에 지시했다. 5월 12일 국무회의 비공개 토론 말미에 대통령은 “일시적 일자리 창출로 위기를 넘기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도형 경제로 바꿔나가는 지속가능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 정리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딜’은 딜인데 ‘뉴’가 없다. 기업·고용을 위한 돈잔치만 요란할 뿐, ‘그린’은 또 무슨!
또다른 의문
2019년 12월 이후 약 6개월간 사상 초유의 코로나 사태 속에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공감을 얻는다. 그래서 ‘포스트 코로나’ 담론이 흥한다. 코로나의 충격만큼, 이런 제안은 일견 신선하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 상황 아래 느꼈던 무력감을 넘어설 실마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무슨 내용과 방향이 ‘포스트 코로나’에 필요할까? 냉정히 보면, 이런 식의 담론은 1997년 말 IMF 사태나 2014년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도 있었다. 즉, “IMF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 또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식! 그러나 진정 무엇이 달라졌는가?
돌이켜보면, ‘IMF 이후’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나라 경제가 튼튼해져 민초의 살림살이가 더이상 불안해지지 않는 것, 민주주의와 복지가 꽃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자본개방, 탈규제, 민영화와 노동유연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착실한 정착이었다. 그것도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아래서! ‘세월호 이후’는 어떤가? 이에 대한 ‘촛불’의 열망은 100년 이상 누적된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권력을 민주화한 인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새 사회였다. 그러나 현실은? 문재인 정부의 꾸준한 정착과 선거전 승리 외에 무엇이 바뀌었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가짜뉴스와 극우 담론이 설치고, 다른 편에서는 자본의 이윤욕망이 민주정부 깊숙이 내면화했다. 대통령 주도의 ‘한국판 뉴딜’조차 (비록 막대한 돈을 쏟지만 결국은) 자본의 이윤욕망에 종속돼 있다.
이렇게 대형 사고(위기)가 터질 때마다 비슷한 담론이 반복되고 결국 우리는 반복적으로 속는다. 그때마다 문제제기는 옳은 듯한데, 왜 그 결말은 유사한가? 무엇이 잘못되고 어디서 뒤틀리나?
과거 군사독재 청산에는 ‘모두’ 한마음이었지만 그 독재를 부른 자본(資本)엔 무감했다. 결국 40년 전 목숨 건 광주항쟁에도 불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역시 자본의 노예가 됐다. 이번 코로나도 ‘모두’ 극복을 원하나, 그 뿌리를 폐(廢)하지 못하면 ‘포스트 코로나’ 역시 자본의 노예가 된다.
재난자본주의와 악(惡)의 일상성
“이 사태가 언제 끝날까? 하루빨리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역시 보통사람들, 즉 민중(생존자)의 열망이다. 수개월에 걸쳐 보기에도 흉한 마스크 얼굴, 타자를 잠재적 괴물 취급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우리는 한편으로 심신이 불쾌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K방역과 대처가 세계의 모범이라 칭송되는 바람에 일종의 사회적 정신분열을 겪었다. 그러나 아무리 칭찬과 주목을 받고 (그간 ‘헬조선’으로 바닥을 치던) 사회적 자존감이 회복되더라도, 우리 일상이 심하게 구겨진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일상 복귀를 희구하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예전처럼’ 만나고, 놀고, 공부하고, 일하고, 만들고, 팔고, 사고, 쓰고 싶다? 그러나 이게 진정 뭘 뜻할까?
여기서 바로 그 ‘일상’이란 결국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를 핵심으로 하는 자본의 이윤증식과 그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해온 우리의 생활패턴이다. 그리하여 어서 코로나 상황 속 사회적 거리두기나 ‘경제 마비’를 종식하고 또다시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경제 및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민주당 정부의 한국판 뉴딜이나 그린뉴딜 같은 담론 역시 바로 이 근간을 그대로 둔 채, ‘디지털’로 재포장된, 자본의 새 상품이다.
그간 인류 역사는 농사를 시작한 신석기시대부터 따져도 1만 년이다. 그중 (지금처럼 자연과 인간을 대규모 파괴하는) 자본주의 삶의 양식은 길게 잡아도 600년, 짧게는 300년, 더 짧게는 100년 정도다. 1만 년 중 1% 내지 6%밖에 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시간이 수십억 년 된 지구를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했다. 악(惡)이 된 자본이다. 그러나 자본은 결코 저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한편으로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들(시장과 국가권력 포함)이 자본운동을 주도하고, 다른 편으로 노동력을 팔아 먹고사는 노동계급이 고용을 통해 자본운동에 동조하기에 자본의 시스템이 영속된다.
영국발 산업혁명은 국내시장의 독점화와 포화를 낳았고 신시장 개척을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을 식민지화했다. 외적 팽창과 함께 국내시장에서도 부단한 상품 혁신과 광고·유행을 통해 돈벌이 공간을 창출한다. 그러나 자본(물질)의 논리는 인간(생명)의 논리와 전혀 다르다. 외적으로는 전쟁, 내적으로는 공황이 자본을 위기로 내몬다. 그 위기는 다시 인간과 자연에 전가된다.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은 생존경쟁과 분열에 빠진다. 생존자들은 더 강한 자본과 일체감을 느끼며 동일시한다. 그런 느낌, 생각, 행위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교육·전파되며 내면화한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자본운동에 위기가 오면 정부와 기업은 ‘충격요법’으로 자본의 위기 탈출을 돕는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자본주의’라 했다.
사실, 이윤중독 시스템은 위기를 먹고산다. 자본 자체에서 오는 필연적 위기를 기회 삼아 그간의 사회진보를 원점으로 돌린다. 기업과 정부가 늘 위기감을 조장하는 배경이다. 재난자본주의 테제를 증명하듯, 최근 코로나 사태를 맞아 각 나라마다 돈을 풀어 자본운동에 신선한 피를 공급한다. 한국의 경영자총협회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4월 총선 전에 이미 국회에다 40대 입법 건의안을 제출했다. 정부 역시 빅데이터 내지 원격의료, 규제완화 등 재벌의 숙원 사업을 해결한다. 국민 역시 일의 내용보다 돈만 되면 고용창출에 환호한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그렇게 우리는 자본과 일상을 같이한다. 한나 아렌트를 원용하면, ‘악의 일상성’이다. 우리 일상이 곧 자본이자 악이니! ‘포스트 코로나’를 제대로 논하려면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생활양식?
경쟁과 이윤을 축으로 움직이는 자본의 문제를 정직하게 이야기할라치면 대개 두 가지 편견이 따라온다. 첫째, 그럼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냐? 둘째, 그럼 과거(원시)로 가자는 것이냐?
사회주의? 그렇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대안으로 나온 게 맞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는 그 안티테제다. 하지만,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실존했던 사회주의체제는 그 이념적·도덕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 일당독재, 엘리트주의, 비밀경찰, 생산력주의, 전체주의 등 문제로 인해 그 사회경제적 지속가능성을 상실했다. 그렇게 1990년 무렵 현실사회주의가 파산했지만, 그렇다고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테제처럼) 자본주의야말로 사회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불행한 것은, 후쿠야마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 대부분이 그리 본다는 것이다. 자본이 뒤에서 웃고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따라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사회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병행돼야 한다. 반성의 기준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이다. 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즉, 결과가 아닌 과정)이어서, 우리는 실천 과정에서도 불굴의 성찰자가 돼야 한다.
과거(원시) 회귀? 누구도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만드는 게 삶(시간, 생명)의 이치다. 따라서 과거로 가자는 말이냐, 라는 문제제기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다. 과거의 상처란 무엇인가? 수없이 많지만 압축하면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억압이다. 그 끝은 죽음이다. 이게 두렵다. 현재(기득권) 상실에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태 우리가 공들여 쌓은 ‘탑’의 정체는? 그것은 자본 주도 경제성장(이윤증식)에 토대, 저항 무마를 위해 조금씩 공정 분배를 해온 시스템이다. 즉, 파이의 크기(자본)와 파이의 분배(노동)를 추구하는 자본―노동의 공조가 여타 희생양(사회적 약자, 제3세계, 자연, 농업, 공공부문, 감정, 인간관계 등)을 부단히 약탈하는 시스템! 이제 ‘디지털’이 새 무기다. 파이의 원천(파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과거로 회귀가 아니라 미래로 전진이란, 이 약탈 시스템을 극복하고 참된 공존공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코로나(사스, 신종 플루, 메르스 등) 사태가 결국, 자본의 돈벌이 시스템과 그에 동조한 인간의 일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더이상 그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도 인간답게 살기를 바랄 순 없다. 자본 원리에의 복종이란 마치 독일 속담처럼 ‘내가 걸터앉은 나뭇가지를 스스로 자르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출구는 (어정쩡한) 민주화가 아니라 (확실한) 탈자본에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마하트마 간디의 20세기 초 사르보다야 운동에서 나온 명제, “인간의 필요를 위해선 지구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위해선 지구가 서너 개 있어도 모자란다”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같은 원리는 19세기 말, 도로시 데이와 함께 초기 가톨릭노동자운동의 선구자였던 피터 모린의 명제, “만일 아무도 더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것이다. 또, 만일 모든 사람이 가장 가난해지려고 한다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에도 있다. 이 둘을 합치면? ‘소박한 필요’ 충족이 새 사회의 실마리다. 코로나로 인간활동이 대폭 줄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오히려 나아질 조짐도 있지 않던가? 이게 힌트다.
만일, 우리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계속 살아남으려면 이런 근본적 통찰이 필요하다. 이 발상의 전환을 개인에서 공동체로, 사회구조로, 나아가 온 세계로 넓혀야 한다. 요컨대, 자본을 지양한 시스템과 새 인간의 탄생, 이것이 답이다. 그 핵심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생(conviviality)이다.
그러나 이 역시 ‘발상’일 뿐, ‘현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부터 변하되, 더불어 변하고 사회구조가 모두 변해야 한다.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일상의 변화와 시스템의 변화가 맞물려야 한다. 이윤이 아니라 필요의 원리로, 경쟁 아닌 연대의 원리로, 소유 아닌 공존의 원리로 가야 한다.
나는 1999년부터 20년 이상 읍 단위 작은 마을에서 산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진 불법 아파트를 저지하고자 마을 이장도 했다. 아침마다 생태뒷간의 똥오줌을 모아 퇴비로 만든다. 하늘의 비와 해, 땅의 미생물과 흙, 그리고 우리 가족의 똥오줌이 협력해 상추와 풋고추 등을 기른다. 아이들은 그걸 먹으며 비교적 자율적인 인격체로 성장했다. 이제 각자 짝을 찾아 독립해도 좋을 단계다. ‘나부터’ 교육혁명이었다. 우리집 하수는 빗물과 함께 정화 연못에 모이고 부레옥잠, 고마리, 미나리 등이 정화를 하면 도랑을 따라 내려간다. 처마 아래와 아궁이 옆 물통에는 빗물이 고인다. 이 물을 잘 모았다 필요시 텃밭과 나무에 뿌린다. 20년 전 심은 나무들은 훌쩍 커서 듬직하다. 이 작은 일상의 실천에서 나는 삶의 기쁨과 함께 깨달음도 얻는다. 텃밭 채소나 열매를 상품화 않으니 적정생산―적정활용―적정순환이 가능해,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파괴성이 없다. 물론, 이것조차 내게 대학이라는 안정된 수입원이 있어 쉬웠다. 그러나 교수라도 90% 이상은 그리 살지 않는다. 역으로, 실제로 시골서 사는 사람의 90% 이상은 큰 수입 없이도 그렇게 산다. 소득보다 땅과의 교감이 일차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델을 온 사회가 같이 실천할 방법은 없을까? 실은, 이 역시 온 사회구성원들이 이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자본주의가 일차적으로 자산계급에 의해 추동되었지만, 그 지속성이 결국 노동계급에 의해 담지되듯,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 사회 역시 먼저 자기해방한 이들에 의해 선도되되, 그 지속성과 확장성은 결국 전 구성원에 의해 실천돼야 한다. 그러려면 더이상 파이의 성장이나 분배가 아니라 그 원천에 생사를 거는 개인과 조직, 교육과 언론, 정치와 운동이 활발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우선 자본의 파괴성에 대한 통찰과 그에 대한 공범관계로서의 노동에 대한 성찰이다.
불행히도 기존의 정당정치나 선거 방식으론 이런 변화를 이룰 순 없다. 이미 지난 100년 동안의 실험 속에서 그 불가능성이 증명됐다. 그래도 선거 때마다 이게 반복된다. 같은 맥락에서,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한국판 뉴딜’이나 ‘그린뉴딜’조차 답은 아니다. 돈을 풀어 과거 일상 내지 황금기(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 경제 절정기)로 복귀하게 풀무질하자는 발상, 성공해도 큰일, 실패해도 큰일이다. 성공해서 큰일인 까닭은 기존 대량 생산―유통―소비―폐기 시스템을 새로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실패해도 큰일인 것은 적폐 청산은커녕 되레 극우 부활의 기회이기 때문. (지금도 기득권 검찰의 행태를 보라!) 그러니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 적폐가 결국은 자본에서 발원했기에, 철저히 자본을 지양하는 기획이 필요하다.
끝맺기 전에
‘한국판 뉴딜’은 민주당이나 대통령의 의도와 다르게 흐를 공산이 크다. 즉, 그것으로 민생을 살리고 복지를 구축하며 지속가능한 사회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긴 어렵다(실은 1930년대 미국의 뉴딜조차 자본위기(대공황)에 대한 응급조치였지, 자본을 넘는 기획은 아니었다). 일시적 인기 상승과 시장 활성화는 되지만, 또 근본 문제제기나 폭동(파업)은 예방하지만, 패러다임을 바꾸는 건 아니다. 일자리 50만 개 창출, 전 사회적 고용보험, 긴급고용안정자금 10조 원, 기간산업안정기금 40조 원, 비상금융조치 135조 원 등, 천문학적 돈으로 기업을 살리고 고용을 늘린다는 원리가 기존 자본주의와 얼마나 다를까? 박정희식 개발독재에서 ‘민주화’ 이후 재벌 주도 자본독재를 거쳐, 이제 촛불정부 주도의 ‘민주 자본주의’ 시대인가? 거듭 말하지만, 자본의 패러다임, 즉 상품의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에 기초한 삶의 방식은 이윤(돈벌이) 증대엔 도움이 되지만 인간적 필요(살림살이) 충족엔 도움이 안된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판 뉴딜과 그린뉴딜 얘기가 나오자마자 언택트(비대면)나 정보기술 분야의 주가가 치솟는다. 따라서 (안철수식의) ‘새로운 먹거리’ 추구는 오히려 제2의 코로나 사태와 같은 비상상황만 반복할 뿐이다. 그런 식이라면 실컷 돈만 쓰고 (자본의 지배체제는 여전한 채, 미래세대에 부채만 잔뜩 안기고) 지금까지의 모든 성찰을 다시 원점으로 돌린다. 좀더 날카롭게 말하면, 정부가 공권력의 힘으로 현재와 미래세대로부터 노동력과 혈세를 추출, 자본(고용, 이윤, 이자, 지대, 배당, 차익추구 관계)에 헌납한다. 노동진영조차 그 일부(임금, 지원금 등)를 떡고물로 받으며 자본에 동조한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건, 상품, 노동, 화폐, 자본, 기술, 시장에 의존 않는 삶의 양식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씨 뿌린 텃밭에 새싹들이 고개를 쏘옥 내밀 때, 알을 깬 병아리가 새 세상을 맛볼 때, 매화 끝 매실이 햇살에 웃을 때처럼, 작지만 온전한 삶의 기쁨이 탈출구다. 땅·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보는 자들, 자본, 투기, 사기, 개발, 부패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을 엄단하고, 차라리 집집마다 재난지원금 대신 텃밭을 나눠 주고 동아리를 이뤄 농사의 재미를 느끼게 돕는다면, 돈이 별로 안 들고도 기쁨은 클 것이다. 이런 식의 발상이 사회화한다면, (제임스 쿤슬러가 말한) ‘장기 비상 시대’(수백 년간 힘든 시기)가 오더라도 ‘재난자본주의’라는 속임수 대신 (레베카 솔닛이 말한) ‘재난공동체’가 형성되어 고난을 이겨낼지 모른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도 함께 살아 기쁘고, 설사 함께 죽어도 전혀 억울하지 않은 죽음, “삶에 최선을 다했노라”며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 차원에서 존엄한 죽음(삶)을 위해 억지 연명치료를 포기하듯, 인간과 지구의 존엄을 지키려면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억지 연명책도 포기해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