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수 지음
《배를 돌려라, 대한민국 대전환》(한티재, 2019년)
제도권 안으로 간 사회운동
변호사이자 전업 시민운동가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하승수가 시민자치, 분권, 풀뿌리운동을 아우르는 시민단체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던 때가 20여 년 전이다. 너무 긴 시간이 흘러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방자치 부활 이후에도 토착 기득권세력이 지역에 해악을 끼치는 상황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 것이 제안의 요지였던 것 같다. 환경운동 언저리에 있었던 나에겐 다소 생소한 주제였다. 하지만 지방자치가 가져올 변화의 긍정성을 기대했던 시절이라, 오랜 고민 없이 작은 시민단체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여러모로 그는 정세의 맥점을 잘 알고 있는 운동가다. 어떤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앞서서 기획하고 활동했다. 풀뿌리 자치운동을 제안한 이유도 그런 차원이었다. 지방정부를 견제하고 변화시키는 풀뿌리 지역운동이 두텁게 형성되어 중앙정부를 상대하는 주창형 시민운동과 양립할 때, 곳곳의 기득권세력을 감시하는 데 효과적이다. 동시에 성숙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생활정치의 근간인 시민 자치역량 증대는 지방자치 시대에 필요한 요소다. 이 두 가지 역할이, 함께 만들었던 시민단체의 목적이었다.
제도로서의 지방자치는 조례와 예산이라는 두 개의 큰 기둥으로 움직인다. 이 두 개의 영역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지방정부에 불편한 긴장감을 주는 파트너다. 그런 점에서 법률 지식과 회계분석 능력을 가진 하승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풀뿌리 활동가다. 시민사회의 행정·의정 감시, 예산 분석·감시, 정보공개, 시민참여, 참여자치 등 지방자치와 연동된 여러 분야에 그의 기획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풀뿌리 기득권 구조가 강화된 역사에서부터 지역사회의 지배구조 분석,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 탐색,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방안까지 그가 경험하고 활동했던 지역 민주주의에 대해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 2007년에 출판된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후마니타스)다. 10여 년 가까운 풀뿌리운동의 한 시즌을 정리한 그의 보고서다.
《배를 돌려라, 대한민국 대전환》은 두 번째 시즌을 정리한 책이다. 전자의 책이 지역 차원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면 이 책은 국가가 지행해야 할 항로를 제시하고 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그는 여러 사람들과 결속해 정치권력을 향해 경쟁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집단, 요컨대 정당을 만들고 지금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풀뿌리에 천착하며 정치권력에 관심 없어 보이던 그가 정치의 요체인 정당운동에 참여한 것을 의외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풀뿌리운동에 참여하면서도 그는 대리인운동으로 잘 알려진 일본 ‘가나가와네트워크’ 모델을 참고하며 지방선거에 적극 개입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운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그다지 어색한 경로는 아니다.
사회운동세력이 정당의 형태를 취하며 적극적인 정치참여에 나섰던 사례는 많다. 독일의 녹색당, 스웨덴의 해적당,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한국의 민주노동당, 녹색당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제도권 밖의 정치참여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행위로서 사회운동이 정당운동으로 전이되는 것은 자연스런 맥락이다. 유권자의 지지를 통해 대표성과 정당성을 얻음으로써 국정을 수행하고 시민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고 정책적으로 표출하는 데 정당만큼 효과적인 제도는 없다.
정당활동 중에도 하승수는 《행복하려면, 녹색》,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삶을 위한 정치혁명》, 《껍데기 민주주의》 등을 집필했다. 사실 이 책 《배를 돌려라, 대한민국 대전환》은 이 저서들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하다. 공생·공유·공정 사회를 위해 기본소득, 기본주거, 기본 농지·농사·먹거리와 탈성장, 탈지대, 탈화석연료·탈핵, 탈토건, 탈집중, 탈경쟁교육 그리고 탈차별·탈혐오, 이른바 3공(공생·공유·공정)을 위한 3기 7탈(세 가지 기본을 보장하고 일곱 가지 전환을 하는 것)의 밑그림이다. 국가정책의 방향을 바꾸자는 것인데, 요컨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이다.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경제구조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주택 통계에 따르면,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 중 다주택자(2채 이상 보유) 수가 2014년 13.6%에서 2018년 15.6%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증가세는 멈추지 않았다. 현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정책만 하더라도 20여 가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부동산 양극화는 더 심화되었다. 서민과 청년에겐 부동산은 언감생심이다.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집을 사들이고 그것을 임대하여 돈을 벌고 또다시 집을 사들이는 부동산 뫼비우스 띠는 견고하다. 이들이 부동산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플레이어’다. 서울 강남, 서초 주택 소유자 중 다주택자는 20%를 넘는다. 전국에서 가장 비싼 땅을 보유한 사람들이 주택을 다량 보유한다는 이러한 통계는 한국사회 불평등의 슬픈 단면이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할 단 하나는 ‘지대불로소득’이라고 말한다. 지난 10년간, 부동산에서 발생한 소득은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넘었다. 해마다 440~520조 원 규모다. 지대불로소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이 책은 지대불로소득의 개념을 부동산에 한정하지 않는다. 전강수 교수(대구가톨릭대)의 개념을 빌려 부동산, 학벌, 독점, 상속, 일자리, 특권, 자연자원, 권력관계 등에서 지대가 발생한다고 본다. 특혜를 통해 이익을 얻고 있는 남산과 설악산 케이블카, 버스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세금으로 소득을 보장받는 버스업자들의 지대, 권력 유착과 부패로 재산을 축적한 재벌 일족, 관료집단들이 누리는 전관예우 지대, 의사와 같은 학벌로 누리는 지대, 교수들이 누리는 직업 지대(김종영 교수(경희대)는 “대한민국의 교수는 우주 최강의 직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지대불로소득을 묵인하고 확장하는 정치권력이 있다. 지대를 추구하는 경제구조, 그것이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본질이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의 설립자이자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가이 스탠딩 교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여문책, 2019)라는 책을 통해 불로소득자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소득과 부의 대부분을 독차지하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분석했다. 불로소득자는 희소한 자산(또는 인공적으로 희소하게 만든 자산)을 소유하거나 통제함으로써 소득을 창출하며, 자본주의의 새로운 소득분배체계의 주된 수혜자가 되었다. 불로소득 자본주의의 제도적 구성은 부호 계급과 자본이득을 노리는 엘리트 등 일부 특혜를 받는 집단이고, 이들이 인류의 부를 빼돌리는 무시무시한 세계체제가 만들어졌다고 가이 스탠딩은 결론짓는다. 마치 지대 추구 경제체제로 치닫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대안
책의 서문에서 하승수는 정직한 비관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이고 실질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대안은 그럴싸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긴 시간 그가 견지해온 태도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피하기 위해 실현 가능한 기획을 집요하게 실천해오면서도 그에겐 유연한 대응능력이 있다. 가령 이 책은 ‘자율선택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만 18~64세 시민들에게 총액 5,400만 원을 세 가지 유형으로 지급할 수 있게 했다. 1유형은 월 150만 원(최저임금의 70%에 해당)을 3년간 수령, 2유형은 월 50만 원을 9년간 수령, 그리고 유형3은 월 10만 원을 45년간 받는 것이다. 이럴 경우 연간 43조여 원이 필요하다. 현실을 감안하여 유연하게 접근한 결과다.
기본소득 원칙론자에겐 다소 미흡한 제안일 수 있다. 기본소득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요컨대 보편성, 개별성, 무조건성, 주기성, 현금성, 충분성 등에 비춰 봤을 때, 한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지급한다는 보편성과 조건 없는 무조건성, 주기성 그리고 충분성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즉 연령대를 제한하거나 지급 기간과 총액을 설정하는 등 기본소득이 가진 본래 함의에서 후퇴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승수의 제안이 파괴력을 지니는 까닭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제안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금은 논의의 수준을 넘어 기본소득을 구체화된 제도로 설계할 때라는 것이고, 연간 43조 원이라는 금액은 명목 국민총생산(GDP) 1,730조 원(2017년 기준)의 2.48%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당장 시행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산 낭비를 줄이고 탈세를 막고 약간의 증세만으로 가능하다. 아동·청소년과 65세 이상 노인들은 아동수당과 청소년수당 그리고 기초연금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보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경험을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경험이 쌓이면 권리가 되기 때문이다. 불가역적인 제도로 고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기본소득 외에도 이 책은 기본주거와 기본 농지·농사·먹거리 실현방안의 밑그림을 제시한다. 다주택 소유에 대해 규제하면서 3주택 이상의 주택 소유를 금지하고, 국토보유세 도입을 고려한 부동산보유세 대폭 강화, 국민연금기금을 활용하여 주택가구 안정과 공공임대주택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기본주거를 실현할 수 있다. 기본 농지·농사·먹거리 실현은 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면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에게 농지를 제공하고, 농민에게 농민수당(기본소득)을 지급하며, 농사접근권과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모두에게 보장함으로써 인간도 살리고 환경도 살리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남아 있는 문제도 많다. 국가정책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돈의 흐름, 즉 예산의 성격을 바꾸고, 정부나 정치에 대한 신뢰를 높이며, 행정조직도 변화된 상황에 맞게 전환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선거법과 같은 민주주의와 기본권을 담아내는 법 개정, 나아가 헌법을 제대로 바꾸는 것과 남북의 오랜 갈등도 풀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전환예산과 이에 맞는 정부조직, 승자독식의 선거법 개혁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큰 그림을 소개한다.
가슴 설레는 미래를 향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기초적인 의식주마저 걱정해야 하는 현실과 자신들이 물려받을 불확실한 미래가 지금의 젊은 세대를 우울하게 한다. 미래가 오늘보다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은 어제보다 나아지지 않은 오늘을 경험한 결과이다. 이제는 나침반이 엉터리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과거의 잣대로 급변하게 될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한편, 현세대가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를 미래의 상속자들에게 맡기는 태도도 무책임하다. 이 책이 제안하는 대한민국 전환의 밑그림은, 구호나 선언이 아닌 당장 정책으로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설계이다. 엉터리 나침반을 고치거나 바꿀 때가 되었다.
20대 국회가 저물어가는 요즘, 우리는 소모적인 정치의 비상식을 목격하고 있다. 21대 총선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난장판이다. 하승수의 대한민국 대전환의 밑그림과 같은, 국가의 향방을 토론하는 국회를 (앞으로도)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만큼 우울한 건 없다. 무엇을 시도하든 잘되지 않을 거라는 패배주의가 우리 속에 자리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지금의 거대정당들은 그것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국회를 보며 좌절하고 있다가 이 책이 제안하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왼쪽 가슴의 떨림을 느낀다. 심장이 뛰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힘든 일이 될지라도, 배를 돌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