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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연료 시대는 어차피 끝나야
그러니까 어떤 각도로 보든지, 화석연료, 특히 현대문명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석유의 대량소비는 시급히 종료되지 않으면 안된다. 기후변화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동시에 EROEI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석유에 깊이 중독돼 있는 우리들의 생활방식은 급진적인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은 농사의 중요성이다. 최근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세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그린뉴딜’이라는 것은 물론 기후위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예를 들어, 그동안 자동차에 주로 의존해왔던 교통시스템을 철도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전국적인 고속철로망의 건설이라든지, 태양광, 풍력, 바이오매스, 수력 등을 이용한 재생가능에너지의 대대적인 확충이라든지, 기타 경제시스템을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쪽으로 전환하기 위한 각종 프로젝트가 제안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 그린뉴딜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환경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경제도 살리겠다는 계획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오랫동안 생태계가 훼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방치되어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환경과 경제가 상극적인 관계에 있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근대적 산업경제의 논리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반드시 환경훼손을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를 풀기 위한 하나의 타개책으로 나온 게 바로 그린뉴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미국에서는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양식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 그린뉴딜이라는 아이디어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미 몇몇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지금 제안되고 있는 그린뉴딜에는 중요한 문제가 내포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기후위기 상황이 단순히 태양광이나 풍력을 이용한 재생에너지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해소될 것처럼 보고 있는 것이 그렇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린뉴딜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기후위기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 즉 근대적 산업경제 그 자체를 혁파하지 않고는 모든 노력이 임시 미봉책에 그친다는 사실을 깊이 성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재생에너지라는 것에도 적잖은 문제점이 있음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태양광 패널의 경우, 거기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희토류는 독성물질이라는 점이 흔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은, 재생에너지시스템을 확대하면 화석연료나 핵물질 기반의 대형 발전소들이 생산하는 전력과 맞먹을 전력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이다. 따져보면, 그것은 종래의 생활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자면 무엇보다 생활수준의 대폭적인 축소, 즉 단순·소박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흔히 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재생에너지시스템이 널리 보급될지라도, 지금과 같은 대형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가 생산하는 것만큼의 전력을 생산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또, 그게 설사 가능할지라도, 에너지만 풍부하다고 해서, 재생 불가능한 지하자원을 포함해서 온갖 물자를 끊임없이, 그것도 낭비적으로 소모하는 것을 강제하고 있는 산업경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린뉴딜,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 점에서,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그린뉴딜은 그것 자체는 좋은 발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정말 유의미한 프로젝트가 되려면, 거기에는 생태문명의 핵심 논리, 즉 순환적인 삶의 패턴의 회복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단지 물자와 에너지를 절약하는 차원을 넘어서, 어디까지나 경제생활의 기본 패턴이 순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생태사상가들이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린뉴딜을 도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렇게 할 때 거기에는 생태적 농사라는 아이디어가 핵심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생태적 농사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산업경제에서는 농업이라는 것도 진정한 농사와는 이미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상업주의 논리의 지배 밑에서 지금 농사는 기계와 화학물질의 대량 투입으로 움직이는 공업화된 농업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농업의 필연적인 결과는 토양의 피폐화·사막화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의 전면적 붕괴이다. 즉, 인간사회는 기후변화로 인한 파국에 직면하기 이전에, 근대식 농법이라는 미명으로 온갖 농약 및 석유화학물질들로 오랫동안 ‘대지를 독살’해온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빨리 생태적 농법의 복원을 통해서 땅을 살리고, 농민과 농촌을 살리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더욱이 한국의 경우는, 되풀이하지만, 산업국가들 중에서도 식량자급도가 제일 낮은 나라이다. 오늘날 경제력이나 총 경제규모로는 한국이 세계의 10위권이라고 하는 엄청난 수준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 경제의 근본 기초를 생각하면 한국 경제보다 더 위태로운 경제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농사다운 농사를 되살리고, 그와 동시에 지역 공동체들을 회생시키는 것 말고 어떤 다른 것이 있겠는가?
농사가 정상화되어 농촌과 지역 공동체들이 살아나고, 그 자연스런 여파로 수도권에 밀집된 인구가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지역 중심 경제와 문화가 활기를 띠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될 기본 조건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농민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무조건적 소득을 보장하는 농민기본소득제를 서둘러 과감히 도입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 모두의 삶·생명의 근원적 토대를 지키고 보살피는 사람들에 대한 전 사회적인 인정과 존경을 그런 식으로라도 표시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 뒤에, 상당한 시차를 두고, 전국적인 인구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전 국민적 차원의 기본소득을 점진적으로 확대해나간다면 어떨까? 그것이 균형적 분권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사회정책이기도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나라에는 약 230만의 농민이 있다. 이는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의 500만 농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이다. 미국의 저명한 생태사상가 루이스 멈퍼드에 의하면,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최소한 농민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 견해대로 당장에 농민 인구를 증가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점진적으로나마 우리는 농민을 포함한 농촌 인구를 늘려나가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태적 농사가 번창하는 사회를 하루빨리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농촌보다 먼저 도시민들의 생존·생활부터 붕괴하고 말 것이다.
농촌, 농민이 살아야 흙이 산다
지금 한국정부는 이른바 스마트팜이니 대규모 시설농이니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그런 것이야말로 근본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뜬구름 잡는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속가능한 농사, 그리하여 생명의 보금자리인 땅을 영구적으로 지키려면, 농사는 철저히 생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생태적 농사란 상업주의 논리와는 기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농을 보호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농업 관련 전문가들은 흔히 소농을 마치 사라져야 할 역사적 유물인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미국식 대규모 영농, 즉 기계·화학물질에 의존하는 농법을 모범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식 대규모 단작농업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석유화학 및 기계공업의 여파로 생겨난 농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농사의 공업화’의 필연적인 결과로 발생한 잉여 농산물의 처리를 위해 미국정부가 밀어붙인 것이 ‘자유무역’ 논리라는 것, 그 때문에 세계 전역의 소농경제가 무너져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제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미국식 농업 모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 우리가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근년에 들어 유엔에서 나오는 농업 관계 보고서들도 왜 소농 중심의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즉, 지속가능한 생태적 농사를 위해서는 농민공동체의 오랜 지혜와 협동적인 노력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이제는 유엔을 포함한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책으로서, 동시에 EROEI 때문에라도, 석유시대의 종언에 대비해서, 생태적 농사 중심의 사회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농민기본소득제의 시행이야말로 매우 필요하고 긴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어쩌면 제일 중요한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즉, 우리 사회의 다수가 어떻게 농사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농민기본소득의 필요성에 합의를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우선, 농민기본소득의 실시에 대해서는 도시 주민들의 상당한 반발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 농민들에게만 특혜가 주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사정을 잘 모르는 도시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간, 이 나라 정부는 일반시민들이 부동산 거래 등을 할 때에 농어촌특별세라는 것을 부과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어촌 살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거둔 세금이 실지로 어떻게 쓰였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오늘날 피폐일로에 있는 농촌 형편을 보면, 그런 지원금이 적어도 소농공동체의 회생을 위한 방향으로는 사용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점에서, 농민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농어촌 지원 프로그램들의 실상과 허상을 철저히 검증하는 작업이 수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의 책임
지금까지 말해온 이야기의 요지는, 상업주의 논리를 과감히 청산한 토대 위에서 생태적 농사를 기축으로 한 경제, 사회, 문화의 재창조야말로 지금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 누구보다도 각성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언론인, 교육자, 학자, 지식인들일 것이다.
지식인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고등교육을 받고 이 나라의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이른바 유식자들 중 대부분은 주로 근대 서양의 문화와 사상·철학에서 자신들의 지적·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해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근대문명=산업문명으로부터 생태문명으로 전환해야 할 시대적 요구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할지 모르지만, 그 전환이 기본적으로 순환적인 농사의 재생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흔히 망설이거나 심지어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아마도 그 근본적인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 이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민초들의 삶의 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데에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기후위기 등 위기상황에 대해서 다수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소극적인 반응에서 우리는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위기의 심각성은 인지하면서도, 흔히 비관주의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는 냉소적 자세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 선생이 생전에 통렬한 어조로 지적한 바가 있다. 다카기 선생은 생애의 절정기에 반체제 탈핵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과학자였다. 그런 그가 주류 과학계를 과감히 이탈할 것을 결심했을 때, 그의 동료 학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세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라며, 탈핵운동은 해 봤자 소용없다는 식의 체념적·냉소적인 태도였다. 다카기 선생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식인이 취하기 쉬운 가장 부도덕한 자세라고 말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왜 기후변화 등에 관해 비관주의적 자세나 냉소적 태도를 드러내는지, 그리고 농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즉, 실제로 흙을 일구며 혼신을 바쳐 땀 흘려 일하는 민초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비관주의에 함몰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흙의 사람들’은 끝까지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세상을 구경꾼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섣부른 비관이나 체념, 혹은 냉소적 태도는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행태이기 때문이다.